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03
#2002.
포고하다 (2)
묘한 음색이었다.
조금 전까지 흑왕은 열정적이기까지 한 연설을 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의 가슴이 절절해질 정도로 혼을 실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낮은 콧소리를 듣는 순간, 백연홍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음색에 비한다면 이제까지 흑왕이 들려준 목소리는 딱딱한 모노톤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저 표정만 봐도 누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지 알 것 같군.’
기분이 이상하다.
그들은 흑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흑왕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이 순간, 백연홍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흐음.”
흑왕이 휴대폰을 바라보며 볼을 긁는다.
그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백연홍만의 착각일까?
하지만 그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는 다르게 흑왕은 쉽사리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전화가 걸려 온다는 건 딱히 대단할 게 없는 일이지만, 흑왕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이 그들을 침묵하게 했다.
그리고…….
“…….”
전화가 더는 울리지 않는다.
멈춰 버린 전화를 빤히 바라보던 백연홍이 황당함을 담은 눈으로 흑왕을 돌아보았다.
“안 받으십니까?”
“억울하잖아.”
“예?”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백연홍이 반문하자, 흑왕이 키득대며 웃었다.
“한 번쯤은 저 양반도 속이 타봐야지. 한두 번 정도 더 걸려오면 그때는 받아줄 생각인데.”
“…….”
백연홍의 눈가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저 양반에게 아이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건 좀…….
우우우우웅!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흑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거, 좀 받으십시오! 애도 아니고!”
“애 좀 타봐야 한다니까! 내가 속 썩은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빌어먹을.
조금 전 들은, 그 가슴 떨리는 연설의 여운이 아주 그냥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목 안에다 세정제를 밀어 넣고 솔로 벅벅 문질러 닦아내도 이렇게 깔끔하지는 않겠다!
우웅.
다시 진동이 멈춘다.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받아줄 테니까.”
“……어휴.”
백연홍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한편으로는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하는 이런 상황에서 걸려온 전화를 두고 장난칠 여유가 남아 있다니.
이건 담대함의 영역을 넘어서 무신경함의 영역이 아닌가.
“흐으음.”
흑왕이 재미있다는 듯 양손이 비벼 댄다. 아마도 전화가 다시 걸려오면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
“…….”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던 흑왕의 눈이 살짝 떨렸다.
“……왜 안 오지?”
“…….”
“어…….”
백연홍의 얼굴이 감쌌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 정말 당황한 흑왕의 얼굴이었다.
‘내가 진짜 저 인간을 믿어도 되는 걸까?’
어떨 때는 이보다 더 믿음직한 사람이 없는데, 어떨 때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다. 어쩌다 저런 인간이 나타났단 말인가.
“아, 안 오는데?”
“그럼 내버려 두십시오.”
“중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잖아.”
“그럼 거시든가…….”
“그럼 내가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없어 보이지 않나?”
“…….”
니 맘대로 하십시오.
제발 니 맘대로 하시고, 나는 이제 좀 내버려 두십시오.
“에이, 빌어먹을!”
결국 참지 못한 흑왕이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재빨리 전화가 걸려온 곳으로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초조한 얼굴로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던 흑왕의 얼굴에 당혹감이 짙어졌다.
“안 받는데?”
“…….”
백연홍이 해탈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흑왕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이!”
이를 뿌득뿌득 갈아대는 흑왕을 보고 있으려니, 싸우기도 전에 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는 전화가 연결됐는지 흑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전화를 안 받습니까?”
[담배 한 대 피우고 왔다.]“전화를 걸어놓고 담배를 피우러 가면 어떻게 합니까?”
[안 받길래.]“사람이 참을성이 없어, 사람이!”
백연홍의 고개가 슬며시 옆으로 돌아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십이비도들은 물론이고, 리우양마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전화를 다 하시고.”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있어서.]“이야기?”
[정확하게는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야겠지.]“확인이라…….”
흑왕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이야기는 다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저는 제 입장을 확고하게 전했을 텐데요.”
[…….]“아아, 이쪽으로 넘어오시기 위해서 다시 한번 들어두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강진호의 목소리가 살짝 격해지자 흑왕의 미소도 짙어졌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지금도 생각은 바뀐 게 없나?]“물론입니다.”
흑왕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힘으로 권리를 얻어내고, 그 권리를 모두가 누리게 하겠다?]“역사는 그렇게 바뀌어왔습니다. 혁명이란 언제나 피를 동반했죠. 혁명이 혁명일 수 있던 이유는 세상을 지배하던 강자들을 끌어내릴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혁명은 그저 반란에 불과하죠.”
[그렇군.]순순히 인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을 들은 흑왕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너는 힘으로 외부를 겁박해서 무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내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거겠지.]“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전에 대화를 했을 때, 네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나?]“……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무인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것 말이야. 사심 없이.]“아, 그 말 말씀이시군요. 물론 기억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가?]“그건 교주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대답해.]“물론입니다. 무인은 저의 적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더 제 편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낮은 침묵이 이어진다.
[무인들을 보호하고, 무인이 아닌 이들을 협박해 목적을 이루겠다는 거로군. 일단 목적을 이루고 나면 어떻게 되든 말이야.]“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압니다, 교주님. 제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진짜 실패는 패배해 목이 잘리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거죠.”
[…….]“제가 실패하더라도 세상은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진 뒤일 겁니다.”
전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흑왕은 안다.
그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을.
강진호는 지금 진지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럼 묻지.]“예.”
[네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들은 지금 누구를 겨누고 있지?]“물론 바깥세상에 힘이 있는 이들입니다. 국가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죠. 아니면 무지라는 무기로 자신을 가리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평범한 이들일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무인은 아니라는 거로군.]“물론입니다.”
흑왕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흑왕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뭔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강진호는 이리 사람을 들쑤셔 대는 이가 아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이다. 처음에는 강진호가 그의 의견에 조금쯤은 동조하려 하는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결이 다르다.
“교주님, 저는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꼭 지켜야 한다고 믿는 얼간이는 아닙니다.”
[알아.]“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릅니다. 이건 수단에 앞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나는 무인과 싸우지 않습니다. 무인과 싸운다는 것은 제가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 자치구는 시작부터 붕괴합니다.”
[…….]“제가 원하는 건 무인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지, 그 작은 땅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게 아닙니다.”
작은 것을 이루려 할 때는 욕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큰 것을 이루려고 할 때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흑왕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나 권력이 아니다. 더 큰 것, 이 긴 시간 그가 바라온 것은 바로 세상이다.
[그렇다는 건, 그 핵은 바깥세상을 향해서만 겨눠져 있다는 거로군.]“물론입니다.”
[그럼 됐어.]깊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럼 말해주지. 나는 네게 동조하지 않는다.]“…….”
흑왕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나는 네 미친 계획에 동조할 생각이 없어. 힘으로 얻어낸 것은 힘이 사라진다면 깨어질 수밖에 없지. 네가 평생 그 핵을 끌어안고 살 게 아니라면. 지금 모두를 협박한 대가는 반드시 무인들에게 돌아온다.]“……그걸 바꿔 나가기 위해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아니. 애초부터 단추를 잘못 꿴다면, 돌이킬 방법은 없어. 처음부터 모든 걸 풀어내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흑왕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이런 빤한 이야기를 할 거라면 뭐 하러 시간을 끌어가며 그의 입장을 다시 확인한단 말인가.
“그럼 제가 옳은가, 회주님이 옳은가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니. 이제 확인해야 하는 건 다른 거야.]“……그건 무슨 말입니까?”
[이제 확인할 건 네가 강한가, 아니면 내가 강한가다. 결국 무인이란 힘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지. 그게 무인의 방식이고, 강호의 방식이고, 마교의 방식이다. 잊지 않았겠지?]“교주님.”
흑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올 수 없습니다.”
[아니. 너는 나를 맞이하게 될 거야.]“이해를 못하시는 모양인데…….”
[이해를 못하는 건 너다.]“…….”
흑왕이 눈을 찌푸리던 바로 그때, 문이 격하게 열리더니 안쪽으로 한 사람이 뛰쳐 들어왔다.
“흐, 흑왕! 지금!”
“……뭐냐?”
“보, 보셔야 합니다! 이걸!”
안으로 뛰쳐 들어온 이가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패드를 흑왕에게 내밀었다.
그 화면에 떠 있는 광경을 확인한 흑왕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방송을 한 겁니까?”
[그래. 전 세계에. 네가 했던 그대로.]화면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강진호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상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강진호는 자신이 무인이라는 사실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흑왕이 한 그대로 세상 모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대놓고 말해버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화면 속의 강진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강진호의 모습은 마치 과거 마교의 옥좌에 앉아 있던 적천마존의 모습 같아 보였다. 그만큼 퇴폐적이고 패도적이다.
[네가 말했지. 너의 무기는 무인들에게 겨눠져 있는 게 아니라고, 네 적은 오직 바깥세상의 사람들이라고.]“…….”
[그 말대로라면 내가 거기로 가는 건 그 무기를 발사할 명분이 되지 못하겠지. 그건 나 역시 적이라는 의미니까. 설마 네게 반대하는 무인은 네 적이라고 말을 바꿀 생각은 아니겠지?]“뭔 궤변을…….”
흑왕이 입을 다물었다.
궤변이다.
하지만 틀린 것은 없다. 무인과의 대립으로 핵을 발사해 버린다는 건 그가 말한 이상향이 다른 무인들을 짓밟아야 이루어진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증명해라, 청마. 아니, 흑왕!]강진호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가 모든 무인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는 걸. 저들이 만든 무기로 방패막이를 하며 주둥아리를 놀리는 이가 무인을 대표한다는 걸 나는 참아줄 생각이 없다. 네가 정말 모두를 대표해 세상과 협상을 하고 싶다면. 먼저 나를 넘어라.]“…….”
화면 속의 강진호가 흑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갈 테니까.]“하…… 하하하…….”
흑왕이 광소를 터뜨린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광기와 광기.
처음 그들이 모든 것을 시작했을 때처럼…….
결국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이 두 사람일 뿐이다.
“기다리지요. 아니. 기다리지, 강진호. 어서 오라고.”
서로를 바라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비틀린 듯 처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