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08
#2007.
진군하다 (2)
말라붙은 풀이 거칠게 자라나 있는 삭막한 대지 한가운데에 검은 아스팔트길이 길게 나 있다.
고한봉이 그 아스팔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국내외를 오가야 하는 그의 직업상 활주로야 지겹도록 보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 활주로가 오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 처음이었다.
활주로 한중간에 자리한 수송기를 바라보는 고한봉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이건 어쩌면 역사적인 광경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역사는 기록되고 전해진다.
고한봉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그가 알고 있던 상식이 정말 상식인지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역사란 기록이 된 것보다 기록이 되지 않은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사실을 세계의 운명을 뒤바꿀 만큼 거대했던 일들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채 잊혀져 버리기도 하는 게 아닐까?
지금 저 활주로에 서 있는 일곱 사람을 보고 있으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꿀꺽.
고한봉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한민국의 총리.
그 자리는 분명 막중한 자리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한민국의 총리라는 이름조차도 무의미했다.
저들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상의 운명을 걸머쥔 이들이니까.
“후우우.”
길게 심호흡을 한 고한봉이 수송기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회주님.”
앞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고한봉을 바라본다.
“나오셨습니까?”
“당연히 와야지요. 당연히.”
고한봉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코드 원께서도 나와보려 하셨습니다만, 아시다시피 그분은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되는 분이시다 보니 스케줄을 빼지 못하셨습니다. 이해해 달라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굳이 뭐.”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괜히 저희도 부담만 됩니다.”
김명찬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강진호가 꽤 예의라는 걸 차릴 줄 알게 되었다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고한봉은 그저 강진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고한봉이 속이 탄다는 듯 깊게 심호흡을 했다.
“중국 쪽과는 협의가 되었습니다. 근처의 도로를 봉쇄하고 활주로로 사용할 겁니다. 차량 통제와 도로의 정비가 아직 덜 끝났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흐음.”
강진호가 턱을 긁었다.
포탈로 넘어가서 차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럼 따로 차량을 수배하거나 중국 쪽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그게 번거로워 택한 방법이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거면 됩니다.”
“저희 측 항공기로 모시지 못하는 것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중국 땅에 군용기를 넣는 것도 굉장히 민감한 문제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중국 땅에 미군 수송기가 들어가는 것도 민감하지 않은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하하하.”
고한봉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애초에 그는 이 결정에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출발하는 위치가 한국이고, 이 집단의 리더가 강진호라고 해도 인원 구성이 다국적군이니만큼 딱히 권한을 내세우기도 애매했다.
그가 이곳에 나온 이유는 그저 대한민국의 총리로서 강진호를 배웅하는 것과 함께…….
“회주님.”
고한봉이 단호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강진호가 그 말을 듣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치인으로서는요?”
“당연히 건투를 기원해야겠지요. 회주님의 승리는 정말 많은 것을 가져다줄 테니까요. 하지만…….”
고한봉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나중 일입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정치 논리를 가져오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인이기 전에, 한 나라의 총리이기 이전에 저도 한 인간이니까요.”
강진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세상은 격변하고 있다.
평범한 세상을 살아가던 이라면 이 흐름이 두려울 만도 하다.
“반드시 이기고, 반드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돌아오는 게 그리 달갑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
“그건 오해입니다, 회주님.”
강진호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자 고한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저희도 압니다. 무인들과의 공존은 이제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공존은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껄끄럽더라도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어주는 쪽이 낫습니다.”
“…….”
“회주님이 안 계시면 누가 주도권을 잡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운이 없으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으로 또 나뉠지도 모르지요. 그걸 일일이 대응할 생각을 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그러니 대한민국 총리로서 부탁드리 건데, 반드시 돌아와 주십시오.”
“……정치는 나중 일이라시더니.”
“하하, 원래 정치인은 입이 여러 개인 법입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고한봉과 인연을 맺은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건만, 무척 오래 본 사이처럼 느껴진다.
“반드시 돌아오죠.”
“예, 회주님.”
타이밍 좋게 수송기의 해치가 열린다. 강진호가 그 모습을 보고는 고한봉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건승을.”
강진호가 미련 없이 수송기로 향한다.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그 옆에 나란히 서 수송기로 향했다.
고한봉이 수송기에 오르는 모두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어떻게 저리 담담할까?’
고한봉조차 이렇게 떨려오는데.
저 막중한 책임감이 분명 저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송기에 오르는 저들의 발걸음에서는 딱히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그릇의 차이라는 건가…….”
고한봉의 두 눈에 비행기가 서서히 활주로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총리님.”
“……그래.”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들을 자신의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정치가의 역할이다.
“나는 내 전장에서 싸워야지.”
고한봉의 시선이 활주로를 달려 이륙하는 수송기를 끝까지 쫓았다.
‘반드시 돌아오십시오, 회주님.’
* * *
차이커창이 자신의 앞에 펼쳐진 8차선 도로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으면 차로 빽빽하게 차 있을 도로가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다.
‘공권력이라는 건 무섭군.’
홍왕계가 아무리 큰 힘을 가진다고 해도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다. 그들이 가진 힘은 폭력. 상대를 억누를 수는 있지만,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되는 힘이니까.
하지만 공권력이란 상대를 폭력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런 이들과 싸워야 한다는 거지.’
평소 같으면 이 광경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국가라는 체계가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의 나라를 연다고?’
새삼스레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실감이 난다.
도로 따위는 순식간에 통제해 버리는 체제와 그 명을 군말 없이 따르는 국민들.
반골밖에는 없는 무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에는 흑왕의 권위에 굴복해 통제를 따를지도 모르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는가. 결국에는 다시 폭력을 통한 통제가 시작될 것이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겠지.’
무인은 기생충이나 다름없다는 강진호의 말에 가장 공감하는 건 다름 아닌 차이커창이다. 그는 홍왕의 권위를 이용해 홍왕계를 통제해 오던 사람이니까.
‘오는가.’
차이커창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한다.
저 멀리 작은 점처럼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온다.
아니.
커다란 비행기 한 대와 그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싼 십여 대의 전투기.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이동이로군.”
에어포스원도 저만큼 많은 전투기의 호위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국 대통령 따위는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건 정말 중요하고 굉장한 자리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는 못해도 수십은 될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 업무의 인수인계와 대체에 문제가 발생할 뿐이지, 그 사람이 사라진 것으로 인한 피해 따위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다.
저들 하나하나가 다른 이로 대체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러니 대통령보다 더 호화스러운 호위를 받는다고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쿠웅!
순식간에 날아온 수송기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로에 내려앉았다.
천천히 속도를 줄인 수송기가 차이커창이 서 있는 곳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기이이잉!
지체할 것도 없다는 듯 해치가 열리고, 그 안에서 강진호를 위시로 한 일련의 무리들이 걸어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군부의 장성들과 외교부의 관료들이 그들을 마중 나갔지만, 강진호는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차이커창을 향해,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홍왕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다시 뵙습니다.”
“음.”
차이커창이 허리를 숙이자, 강진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홍왕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끝났나?”
“이미 예전에.”
홍왕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런 홍왕을 보며 강진호가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강진호에게 패한 이후로 홍왕은 기질이 조금 변했다. 웅대한 기운은 여전하지만, 그 안에 미묘한 불안함이 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홍왕에게서는 그런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처음 강진호와 조우했을 때에 느낀 그 강인함이 그대로 살아 있다.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의 정리가 끝난 모양이군.”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홍왕이 미소를 짓는다.
“내가 무엇을 원했든, 무엇을 이루려 했든, 죽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적어도 이 전투만은 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싶다.”
“…….”
“그리 생각했더니 마음이 편해지더군.”
강진호가 마주 웃었다.
“정답이지.”
강진호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뒤를 생각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건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
“우리는 당장 싸워 이기면 된다. 그게 무인의 방식이지.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이기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그건 무인의 원형이다.
“출발하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시간 끌 것 없겠지.”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로 삼십 분 거리입니다.”
“생각보다 멀군.”
“기지에는 공대공 시스템도 갖춰져 있습니다. 혹시 요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왕이 그리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 나쁠 것은 없다.
“다만…… 기지로 진입하는 곳에 무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흠.”
“홍왕계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투입해 길을 열겠습니다.”
“됐어.”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가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곳의 리더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마왕이다. 그가 홍왕을 모시는 이라고 해도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강진호의 명을 따라야 한다.
“모시겠습니다.”
차이커창이 신호하자 군용차들이 줄을 지어와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가장 선두에 있는 차에 오른 강진호가 팔짱을 끼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시작이군.’
그의 눈빛이 차게, 더없이 차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