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09
#2008.
진군하다 (3)
강진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광경이다.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뺀다면 말이다.
‘불온하군.’
도시 전체에 커다란 긴장감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민간인은 모두 대피했나?”
“예.”
뒷좌석에는 홍왕과 차이커창이 타 있다. 그중 차이커창이 강진호의 말에 대답했다.
“애초에 민가가 많은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장소가 장소이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혹시 몰라 정부 측에서 한 사람 남김없이 찾아내 모두 대피시킨 것으로 압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최악의 사태는 피해야겠지만,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은?”
“딱히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흑왕이 그리 나와 버린 이상, 기다리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겠지요. 그들에게 있어서 흑왕의 의지는 무엇보다 중요할 겁니다. 다만…….”
말을 하던 차이커창이 눈을 찌푸렸다.
“그 앞쪽을 점거하고 있는 이들은 흑왕의 명을 따르는 이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흑왕의 의견에는 동조하되, 그 통제는 먹히지 않는 이들이라 봐야 합니다.”
“그렇겠지.”
“그들 역시 흑왕과 회주님의 대화를 들었을 겁니다. 일부는 이탈했습니다만…… 여전히 많은 수가 남아 있습니다.”
차이커창이 침음을 흘렸다.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는데도 굳이 그곳에 남아 있다는 건 회주님의 진입을 막겠다는 의지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물론 회주님이 그곳을 뚫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괜히 힘은 빼지 않으시는 게…….”
차이커창의 말이 옳다.
흑왕을 상대하는 일이다. 조금 힘을 낭비한 것만으로도 승패가 갈릴지 모른다.
그 승부의 결과가 가져올 여파를 생각하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저희가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이라 정확한 전력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홍왕계의 정예들이라면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관둬.”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폼 잡는 게 아냐. 그렇게 해결하면 안 되기 때문이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대답은 강진호의 입이 아니라 홍왕에게서 나왔다.
“흑왕은 무인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마왕이 건 승부를 받아들였다.”
차이커창이 홍왕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쪽에서 보유한 전력을 동원해 흑왕계에 속하지도 않은 이들을 공격해 버리면 꼴이 사나워지지.”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되면 설사 이기는 한이 있더라도 분열의 씨앗을 낳게 될 거야. 차라리 흑왕이 이기는 게 나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거겠지.”
강진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설명은 아니지만, 그의 의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차이커창은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 모양이었다.
“의도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건 뒷일이 아닙니까? 뒷일까지 생각하며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이들은 아닐 텐데.”
“이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미학의 영역이지. 하지만 무인에게는 때로 논리보다 미학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홍왕이 씨익 웃었다.
“네가 나보다 더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을 이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사람은 철저하게 논리로 움직이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이지, 얼마나 큰 이득을 줄 이인가가 아니다.”
“…….”
차이커창이 입을 다물었다.
홍왕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다. 하지만 홍왕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차이커창이 두 사람을 슬쩍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리 담담할 수가 있지?’
이들이 이제부터 치러야 할 격전은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온 어떤 전투보다 험난할 것이 분명했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간다는 말이 이토록 더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겠는가.
하지만 강진호도, 홍왕도 평소 그들이 보여주던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게 참 대단하고도 신기했다. 차이커창이 저 입장에 있었다면 중압감에 으깨져 버렸을 텐데.
액셀을 밟아대는 운전수의 발이 오늘따라 야속하다.
하지만 그런 차이커창의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그들을 태운 차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음.”
강진호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의 눈에 이 열로 줄을 맞춰 정렬해 있는 전차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끝이 없군.’
살벌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광경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전차들이 포구를 겨누고, 그 뒤쪽으로 자주포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를 살벌한 얼굴을 한 군인들이 무장한 채 대기 중이다.
폭력이라는 말을 현실에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광경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광경은 인민해방군이 가진 힘을 과시해 주지는 못했다.
되레 이만큼의 전력을 모아서 겨누고 있어야 할 만큼 저곳을 점거한 이들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줄 뿐이다.
속속들이 차들이 멈춰 선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이들이 강진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무시무시하네요.”
이현수마저 이 광경에는 질렸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몇몇이 다가와 차이커창과 말을 주고받더니 앞쪽에 지시를 내린다. 그러자 사람 하나 지나갈 틈도 없이 대어져 있던 전차 중 한 대가 앞쪽으로 빠져나가 길을 열어준다.
“흠.”
홍왕의 입에서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전차가 열어준 사이로 빽빽하게 서 있는 무인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거리는 불과 몇 백여 미터.
포위하듯 둘러싼 전차들을 상대로 무인들이 중앙을 호위하듯 서 있다.
‘꽤나 상징적인 광경이군.’
이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이 왜 자리를 파하고 떠나지 않았는지, 이 광경을 보니 이해할 것 같다.
저쪽에서 이곳이 어떻게 보일까?
자신들을 향해 포구를 겨눈 채 끝도 없이 늘어선 전차들.
그건 이 세계가 가진 힘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 힘, 그 무자비한 폭력들이 무인들의 세계를 겨누고 있다. 지금 무인계가 처한 상황과 다를 바 없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바깥세상에 굴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할 것이다.
“독이 잔뜩 올랐군.”
홍왕의 평가에 차이커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저들의 시선 속에서 진득한 살기가 느껴진다. 그 살기에 반응한 군인들도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무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
‘잘도 지금까지 무력 사태가 터지지 않았군.’
이런 실은 누군가가 실수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뚝 끊어진다.
과도하게 긴장한 군인 중 하나가 실수로 발포를 해버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흥분한 무인 중 하나가 전차로 들려들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랬다면 반드시 유혈사태가 터졌을 것이다.
함께 선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들도 이 광경에서 지금 무인계가 처한 상황을 본 것이다. 흑왕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야기.
이 모든 일이 결국에는 세상의 뒤편으로 밀려나 고사해 가는 무인들의 비명 소리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그 마지막 단말마마저 끊어내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찰칵.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무심한 눈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강진호와 눈을 마주한 이들이 모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현수.”
“예, 회주님.”
“뒤를 부탁한다.”
“…….”
이현수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예. 뒷일은…… 뒷일은 제게…….”
이현수가 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몸을 떤 이현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뒷일은 제게 맡기십쇼. 대신 너무 오래 끌지는 마십시오. 점심 못 먹어서 배고프니까. 얼른 끝내고 홍왕이 사는 근사한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강진호가 피식 웃는다.
“그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거면 됐다.
서로 긴 대화가 필요한 사이는 아니니까.
이현수는 알고 있을 것이다. 강진호가 말한 뒷일에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뒤를 맡길 수 있는 이는 이현수밖에 없다. 설사 그 무력이 뛰어나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현수에게 무력 따위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니까.
이현수가 있기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싸울 수 있다. 뒷일 따위는 이현수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부탁한다, 이현수.”
“쯧, 못 미덥긴 하지만.”
“저 새끼한테 뒤를 맡겨야 하다니. 하아, 내 팔자가 어쩌다가…….”
“교를 잘 지켜보거라.”
총회의 이사들이 이현수에게 한마디씩을 남긴다.
다정한 말도, 가시 돋친 말도 있지만, 그들의 눈에 어린 것은 분명 신뢰였다.
이현수가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들 잊으신 모양인데, 저 이현수입니다. 여러분이 계신 것보다 제 마음대로 할 때가 훨씬 나을 겁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가십쇼.”
“저 주둥아리하고는.”
“그래도 든든하지.”
위긴스가 이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 딸을 잘 부탁하지.”
“아니! 못 돌아올 사람처럼 말씀하시지 말고!”
“하하핫!”
총회의 이사들이 이현수를 스쳐 지나가 앞쪽에 선다. 하나 남김없이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지켜본 이현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알고 있다.
이건 죽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전력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이현수가 필요하다. 싸우다 죽더라도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이건 저들이 이현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신뢰다.
“그럼…….”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걸음을 내디딘다.
“가자.”
“예.”
강진호, 장민, 바토르, 위긴스, 방진훈, 홍왕, 그리고 마스터.
모습을 감추고 있는 혈마까지, 모두 여덟 사람이 진을 치고 있는 전차들을 지나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저벅, 저벅, 저벅.
딱히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걷는 그들을 발견한 무인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족히 몇 천.
어느새 이렇게나 모여들었는지 놀라울 정도의 수.
그 무인들이 일제히 강진호들을 돌아보고는 맹렬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살기.
그 살기에 뒤쪽에 있던 군인들이 더 놀라 주춤주춤 물러난다.
기겁을 해 총을 겨누는 이들, 놀라서 방아쇠에서 다급히 손가락을 빼내는 이들, 심지어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이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거리를 격해 날아드는 그 가공할 살기를 받으면서도 일곱의 걸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거 아주…….”
홍왕이 입가를 뒤틀었다.
“거창한 환영 인사로군.”
“동감이야.”
강진호도 미소를 짓는다.
오싹오싹한 살기를 받고 있으니 전장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저벅.
강진호가 살기의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수록 그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