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11
#2010.
진군하다 (5)
“왔군.”
흑왕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자 리우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 아무 소식도…….”
“아니. 왔어.”
흑왕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 있다.
“느껴지지 않아? 공기부터 달라졌잖아.”
“…….”
리우양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십이비도들 역시 딱히 느껴지는 게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의심은 없다.
흑왕이 그리 말한다면, 그게 곧 진리인 법이니까.
십이비도의 안색이 일변하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우양의 안색도 조금 창백해졌다.
그는 흑왕과 십이비도를 상대하며 살아온 이다. 웬만한 일은 그를 긴장시킬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기지로 진입한 이들의 면면은 그런 리우양마저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쉬운 상대는 아닐 겁니다.”
“알아.”
“지금이라도…….”
“흐음?”
흑왕이 재미없다는 얼굴로 리우양을 바라본다.
“흥을 깨지 마라, 리우양.”
“…….”
“재미있는 축제잖아. 즐기면 그만이지.”
리우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마지막에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는 건지……. 아니, 제가 흑왕께서 패하실 확률이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재미없는 말을 하는군.”
흑왕이 턱짓으로 십이비도들을 가리켰다.
“왜 저놈들에게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줄 알아?”
“…….”
흑왕이 피식 웃었다.
“싱겁기 때문이지.”
“……예?”
흑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알고 있었을 거야. 이대로 목적을 달성하는 건 더없이 싱겁고 재미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야.”
백연홍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가 한 거라곤 여기에 틀어박혀 기다린 것밖에 없잖습니까?”
“그렇지.”
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막스에는 적당한…… 아니, 강력한 적이 필요한 법이지.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적이 말이야. 그게 무인의 방식이니까.”
“…….”
리우양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흑왕을 바라보았다.
“내가 교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뭔 것 같나? 내 말에 숨은 모순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말장난에 굴욕을 당하는 걸 참을 수 없어서? 천만에.”
흑왕이 입가를 비틀었다.
“다른 말은 다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한 가지는 교주의 말이 맞아. 무인계의 모든 것을 걸고 베팅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인들에게.”
“맞는 말이지.”
“확실히.”
십이비도 역시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무인의 습성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흑왕의 높은 뜻에 찬동한 이들. 그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단 하나도 그 말을 한 이가 흑왕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 뜻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흑왕의 뜻은 분명 높다.
하지만 그건 흑왕이 말했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강자가 아닌 자의 뜻은 아무리 옳다 해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게 바로 무인의 법칙이다.
옳음을 주장하고 싶다면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 어떤 세상에도 통용될 수 없는 야만의 법칙. 하지만 무인계에서는 그게 곧 진리이고 법이었다.
“강한 자가 옳다.”
“그렇지.”
인류가 현대까지 발전해 오며 쌓아 올린 이성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하는 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격하게 드는 리우양이지만, 그 역시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이 옳은가 그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 없는 다른 무인들 역시 저 말을 은연중에 옳다 여길 것이란 사실이었다.
강하지 않은 자가 자신을 대변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밖을 채운 무인들을 끌어모은 것은 흑왕의 의지가 아니다. 흑왕의 뜻도, 그의 비전도 아니다.
그의 명성과 그의 강함이었다.
무인이란 결국 강함에 끌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강자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 강함이라 가볍고 빤하게 지칭되는 단어를 얻기 위해서 그들이 어떤 고난을 이겨냈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무인의 강함은 육체의 강건함이나 재능의 영역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다.
특히나 초인의 영역에 드는 이들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이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누구를 존중하겠는가.
이건 단순히 누가 더 싸움을 잘하는가를 논하는 게 아니다. 누가 더 인간으로서 강하고 위대한가를 가르는 전쟁이다.
“내가 옳으니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처럼 허무한 게 없지.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말이야.”
흑왕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러니 증명하러 가자고, 최강의 적에게. 우리가 옳다는 것을, 우리가 더 강하다는 것을.”
그 말이면 충분했다.
십이비도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강한 적을 만날수록 의욕이 살아나는 것이 이들의 습성.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이들은 분명 이 시대에서 만날 수 있는 최강의 적이다.
“하나 묻고 싶습니다.”
“말해.”
“새치기도 됩니까?”
흑왕이 낄낄대며 웃었다.
“전이었다면 어림도 없다고 말했겠지. 하지만…….”
흑왕의 날카로운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한다.
“아마 저쪽도 이번엔 생각이 다른 모양이로군. 할 수 있다면 해봐.”
“좋습니다.”
문이 열린다.
흑왕, 그리고 십이비도.
어쩌면 고금을 통틀어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최강의 소수 무력대.
그들이 움직였다.
* * *
저벅저벅.
발소리가 긴 복도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기괴하군.’
지하로 이어지는 긴 복도.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기지이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 이곳은 꽤 많은 이들이 움직이는 소리로 북적였을 것이다. 핵미사일은 운용하고 관리하는 데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마치 죽어버린 세상처럼 정적으로 가득 차 있다. 벽면에 검게 말라붙은 피만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명해 줄 뿐이다.
“안에 사람이 없나?”
바토르의 말에 위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사일을 관리할 최소 인원은 남겨뒀을 겁니다. 흑왕의 스타일이라면 그들도 이미 포섭되어 있던 이들일 확률이 높겠죠.”
“흐음.”
“그 외의 인원은 방해만 될 뿐이니까요.”
마스터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긁어 댔다.
“그러고 보니 핵미사일 기지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군. 하지만…… 나름 익숙한 느낌인데? 그렇지 않나, 위긴스?”
“예. 마치 원탁 같습니다.”
지하에 존재하는 거대한 시설이라는 점, 그리고 긴 복도와 복도로 내부가 이어져 있다는 점이 익숙한 향수를 자극한다.
“어둡고, 조용하고, 눅눅하다라…….”
“빌어먹을, 귀신 나오게 생겼네.”
방진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 무너지는 거 아냐?”
“웬만해서는 그럴 일은 없을 걸세.”
“……확실합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가? 핵미사일 기지일세. 다시 말하자면, 핵방공호이기도 하다는 거지. 그리고 아마 일반적인 핵무기 시설도 아닐 걸세.”
“예? 그건 무슨 말입니까?”
“저 흑왕이 고른 곳이니까. 저도 폭탄 몇 방에 무너질 곳을 고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여길 무덤 삼아 뒈지고 싶다면 모를까.”
“거, 말투가 평소랑 다르게 좀 과격하신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피가 좀 끓는 느낌인 모양이지.”
“……진정하십쇼.”
입꼬리를 뒤트는 위긴스를 보며 방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부가 무너지는 경우는 있어도 내려앉지는 않을 걸세.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걱정 없이 싸울 수 있다는 거지. 마지막 싸움을 하기 위한 전장으로는 더없이 적절한 곳이야.”
“그거, 그리 좋은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강진호가 담배를 빼 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강진호가 반개한 눈으로 복도를 바라보았다.
이 복도의 끝에 아마 흑왕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그를 맞이하러 오고 있을 수도 있다.
“바토르.”
자신을 부르는 말에 바토르가 슬쩍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어떤 기분이지?”
“……나 말인가?”
“그래.”
바토르가 입가를 뒤틀었다.
“최고다, 주인.”
“…….”
“불가니 도가니, 그런 말을 지껄이는 놈들에게는 무학을 익히는 것이 자체로 의미가 있겠지. 그들에게 무학이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게는 오직 강자와의 싸움만이 의미가 있다. 싸울 상대가 없는 무학 따위 무의미할 뿐이지.”
바토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 적이 넘쳐 나지. 이 이상 기쁜 일이 있겠나?”
그 말에 마스터가 낮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드. 원탁의 수장으로서 오래 살다 보니 전사로서의 심장은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들어오니 젊은 날의 제가 되살아나는 기분입니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싸우다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방진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뭐, 다들 못 싸워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으셨나? 나는 떨려서 죽겠구만!”
“쯧쯧, 이런 놈도 무인이라고.”
“아니, 장로님! 사람이 각자 다 다른 거지요!”
장민이 한심한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보고는 강진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마존이시여, 길은 제가 열겠습니다.”
장민의 목소리 역시 평소와는 달랐다.
그의 목소리에서 이전까지 찾아보기 힘든 흥분이 느껴진다.
‘결국은 이런 법이지.’
무인이란 승리를 좇는 이들.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거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평생 동안 호적수를 찾아 헤멘다.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는 적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적수.
스스로의 증명, 그리고 그 이상의 무게.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모든 것을 건 승부를 하러 가는 지금이 즐겁지 않을 리 없었다.
세상의 운명을 짊어졌다는 무게감에 눌리지 않고, 적을 만나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결국은 다들 쓰레기지.’
그래서 무인이란 써먹을 수 없는 족속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쓰레기라는 점이지.’
이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다.
그의 긴 여정을 끝내줄 이가.
모든 것을 시작한 이이자 모든 것을 끝낼 이가.
“하나 당부하지.”
“…….”
“이기든 지든…….”
강진호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후회는 남기지 마라.”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에 결의가 가득 찼다.
그와 동시에…….
저벅, 저벅, 저벅.
강진호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모두의 속도도 점점 올라간다.
느껴진다.
이 복도의 반대편에서 그들을 향해 점점 다가오는 기운들이.
강진호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청마!’
전장에 들어왔다는 것을 육체가 인식하는 순간,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피가 달아오르고, 전신의 세포가 하나하나 일어난다.
입에 문 담배를 뱉어낸 강진호가 빠른 속도로 복도를 달려간다.
“저기!”
건너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종적을 발견한 순간, 강진호의 송곳니가 드러났다.
적의 목을 꿰뚫고 그 피를 마실 송곳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