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12
#2011.
협의하다 (1)
타닷!
바닥을 박차고 섬광처럼 나아간다.
하지만 강진호는 알고 있다.
피가 끓어오른다고 해도,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친다고 해도…….
이제는 웬만큼 억제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살의가, 과거 한때처럼 그의 통제를 벗어나 용솟음쳐도…….
‘여기는 아니야.’
이곳은 그의 전장이 아니다.
그가 싸워야 할 이는 오직 하나, 청마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맞아오는 이들은 명백히 청마가 아니었다.
십이비도.
흑왕의 수족이라 불리는 이들.
죽은 파권과 낭곤, 혈왕, 그리고 십이비도에서 이탈한 괴불을 제외한다면, 이곳에 남은 이의 수는 정확하게 여덟이다.
그 여덟을 마주한 순간, 강진호가 발을 멈췄다.
과거의 그였다면 발을 멈추는 일 따위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앞을 막아서는 이가 누구든 모조리 쳐 죽인다. 뒤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하지만 그는 결국 멈춰 섰다.
그리고…….
그건 강진호가 더는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성장이든 퇴보든 강진호는 더는 과거의 그가 될 수 없다.
“마존.”
공령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온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잘도 내 앞에 다시 나타났군.”
공령이 입술을 깨문다.
다른 십이비도들은 모른다. 아니, 백연홍 정도나 겨우 알지도 모르지.
지금 그들의 앞에 선 이가 대체 누구인지.
‘겪어보지 않은 이는 감히 알 수 없지. 절대로.’
아직도 그를 죽이기 위해 다가오던 강진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흑왕이 계략을 부려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공령은 없었을 것이다.
혈왕처럼 처절하게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때의 공령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확정된 결과와도 같았다.
“용기? 아니면 만용?”
“둘 다 아니오.”
공령이 강진호를 똑바로 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저 사람에겐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지.”
강진호가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야.”
그도 그렇기에 이곳에 섰다.
강진호가 그의 앞을 막아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
백연홍과 공령, 그리고 얼핏 기운으로만 느낀 신창까지.
“그 중은?”
“……덧없다더군.”
“똑똑한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었군.”
공령이 욱해 반발하려는 순간, 강진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쪽을 포함해서 말이야.”
“…….”
신창이 전보다 배는 날카로워진 얼굴로 홍왕을 노려보았다.
“역시 왔군.”
“흐음.”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홍왕. 이번에는 확실하게 끝내주지.”
“음.”
홍왕이 눈을 조금 찌푸렸다.
“나는 이미 끝난 승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보다 더 강한 이는 없는가?”
신창이 이를 갈아붙였다.
일전의 승부는 분명 그의 패배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실력으로 낸 승부는 아니었다. 그 패배를 설욕하지 못한다면,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다.
“백연홍.”
바토르의 입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연홍이 그들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다.
“놀고 있지만은 않은 모양이군. 꽤 강해졌는데?”
“…….”
“하지만 그래봐야 하찮다. 비켜라. 내가 원하는 건 마존의 목이다.”
“건방진 놈이!”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장민이었다.
“그 주둥아리를 찢어 개먹이로 주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
백연홍은 장민의 노여움에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강진호만을 두 눈에 담을 뿐이다.
백연홍과 신창, 공령까지는 안면이 있지만, 남은 이들은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역시 다른 이들에 못지않았다.
‘당연하겠지.’
저 청마가 고르고 골라 뽑은 이들이다. 하나하나 어설픈 이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강진호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이 스산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니, 아니. 그건 반칙이지.”
복도의 끝에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진호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의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휘적휘적 걸어온다.
“청마.”
“오랜만입니다, 교주님. 아니…… 전화는 꽤 자주한 사이이니 오랜만이라는 말도 이상하네.”
청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휘적휘적 걸어온 청마가 손을 뻗어 백연홍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옥문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 어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저 양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를 모두 찢어 죽여 버렸을 거다.”
그 말에 십이비도들의 눈이 가라앉는다.
“너희를 죽이느라 힘을 빼더라도 저쪽에서 살아남을 인원을 감안하면 이득이라는 계산이었겠지. 하…… 이건 정말 슬픈 일이야. 원래 저 양반이 이렇게 각박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오줌 쌀 시간도 안 주는군.”
청마, 아니, 흑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별수 없겠지. 낭만이 없는 시대에 떨어졌으니까.”
그 말에 십이비도와 총회의 이사들이 동시에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강진호는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태연한 반응을 본 이들은 지금 흑왕이 한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 지껄였나?”
“…….”
흑왕이 강진호를 돌아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뭐 그렇게 급하게 구십니까? 우리가 이 정도 대화도 못할 사이도 아니고.”
강진호의 차가운 눈이 흑왕을 응시한다.
그러자 흑왕이 천천히 걸어 강진호의 바로 앞에 섰다.
지척에 선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무인에게는 물론, 평범한 이들에게도 가깝기 짝이 없는 거리였다.
“…….”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마왕과 흑왕.
그리고 적마와 청마.
그 두 사람이 가까이서 대치하는 것만으로 총회의 이사들도, 십이비도들도 모두 숨을 쉬기 힘든 압박에 전율했다. 심지어 저 홍왕마저도 입을 꾹 닫고 주먹을 움켜쥘 뿐이었다.
딱히 대단한 기세를 발산하는 것도 아니다. 무력으로 사위를 짓누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과 사람.
그들이 지닌 존재감이 이 대단한 이들조차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든다.
“흐음.”
짧게 콧소리를 낸 흑왕이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이 양반이 니코틴이 부족하신 모양이네. 내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습죠.”
“…….”
“자자, 피우시는 걸로 준비했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이런 건 전문이었잖습니까.”
강진호가 빤히 청마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강진호의 입에 담배를 물려준 청마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만들어낸다. 강진호가 문 담배 끝이 타닥거리며 타들어간다.
손가락을 휘휘 흔들어 불을 끈 청마가 빙그레 웃었다.
“압니다, 알아. 지금은 각박한 시대죠.”
“…….”
“하지만 교주님도 때로는 과거가 그리울 것 아닙니까? 그때, 그 야만의 시대. 하지만 그 야만만큼이나 낭만이 살아 있던 그 시대가 말입니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흘려낸 강진호가 가라앉은 눈으로 흑왕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러니!”
흑왕이 빙그레 웃었다.
“판을 벌일 거면 제대로 벌리자는 겁니다. 자, 따라오십시오.”
“…….”
“이쪽으로.”
청마가 몸을 홱 돌려 복도를 걸어간다.
그러자 다른 십이비도들도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흑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로드.”
위긴스가 살짝 껄끄러운 듯 말하자,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 함정이나 팔 놈은 아니야.”
“…….”
“가보지. 대체 뭘 준비해 놨는지.”
강진호가 천천히 걸어 그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곳은 입구가 하나뿐인 지하. 저들에게도 탈출할 길 따위는 없다.
아니.
탈출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다. 맞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제 스스로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저들 역시 굶주렸을 테니까.
선두에 서서 걷는 강진호를 본 청마가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그렇게 다른 십이비도들을 먼저 보낸 청마가 강진호의 바로 옆으로 와 보조를 맞춰 걷기 시작했다.
“좋군요. 예전에는 이리 걷는 일이 많았는데. 원래 제 자리는 여기서 한 발 뒤쪽이었죠. 교주님께서 제게 옆에 설 권한을 주셨잖습니까?”
“그때 네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직 제게도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자격이야 있지.”
강진호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저 이제는 같이 걸을 수 없을 뿐이지. 그렇지 않나?”
“…….”
강진호의 말에 청마가 강진호와 닮은 얼굴로 웃는다.
“뭘 하고 싶은 거지?”
“딱히 대단한 건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에는 그에 걸맞은 마무리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청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종착역이죠, 더 나아갈 수 없는. 제가 벌인 일도, 교주님의 의지도, 우리가 이어온 긴 인연도 결국 여기에서 끝이 날 겁니다.”
“…….”
강진호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 역시 흑왕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무대가 필요한 법이죠.”
복도의 끝에 도달해 모퉁이를 돈 강진호의 두 눈에 지금까지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커다란 창.
벽면 한쪽을 모두 차지한 커다란 창. 그 창 너머로 지하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커다란 공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깁니다.”
흑왕이 빙긋 웃는다.
“원래는 미사일을 보관하는 격납고 중 하나입니다만, 지금은 쓰지 않는 곳이죠. 어떻습니까? 딱 적절하지 않습니까?”
“……뭐가 적절하다는 거냐?”
“이런, 아직 이해를 못하셨군. 저걸 보면 이해하실 텐데?”
“…….”
흑왕의 말에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격납고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강진호의 눈에도 흑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가 보인다.
카메라.
커다란 공간의 끝에 십여 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카메라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공터의 중앙.
“너…….”
흑왕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교주님께서 말씀하셨죠, 자격을 증명하라고.”
“…….”
“하지만 그것도 생각해 보면 웃기는 소리죠. 우리끼리 이 지하에 처박혀 투닥댄 후, 내가 이겼다고 외친다고 그 자격이 증명될 리가 없죠.”
강진호의 눈이 일그러졌다.
“할 거면 제대로, 제대로 판을 벌려보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지막에 서는 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이건 낭만이죠. 과거에만 존재하고,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낡아빠진 낭만!”
흑왕이 이를 드러낸다.
“비무라는 이름의 낭만.”
“…….”
“가장 간명하고, 직관적이죠. 누가 더 강한지를 겨루는 데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방식 따위는 마음대로 정하십시오. 그게 뭐든 따라드릴 테니.”
강진호의 입에서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광대 짓을 하자?”
“세상에 보여줄 겁니다.”
“…….”
“그들이 상대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누구와 공존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저 어둠 속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님을!”
흑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우리가 무엇을 이룩했는지.”
“…….”
“어떠십니까?”
타다닥.
담뱃불 끝이 붉게 타들어간다.
천천히 연기를 내뿜은 강진호가 입가를 거칠게 뒤틀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봐.”
“…….”
“세상이 보는 앞에서 뒈지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도 없지.”
“큭큭큭큭큭!”
청마의 두 눈이 광기로 차오른다.
“그럼 시작합시다. 다시없을 축제를,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모든 것을 걸고 전력으로 싸울 수 있는 마지막 전쟁을!”
더는 미소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비틀린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의 눈빛이 거칠게 얽혀든다.
마치 과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