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13
#2012.
협의하다 (2)
“……네?”
“그렇게 됐다.”
“네?”
“더 설명하기 번거로우니까 일단 가자.”
“…….”
이현수의 두 눈에 의문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저, 그러니까…….”
“가자고.”
위긴스가 짜증 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물론 이현수는 위긴스의 짜증을 백분 이해했다. 그 같아도 이런 상황에 바깥으로 나와 이현수를 데려가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면 당연히 짜증이 날 것이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위긴스도 이현수를 이해해 줘야 하는 것 아닐까?
“……저희 조금 전에 엄청 비장하게 이별했거든요?”
“인생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서 즐거운 법이지.”
“…….”
“잔말 말고 따라와.”
위긴스가 이현수의 어깨를 움켜잡으려는 순간, 옆에서 ‘도대체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라는 얼굴을 하고 있던 차이커창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저,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자네도?”
“예. 이현수가 간다면 제가 못 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흐음.”
위긴스가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우리가 누굴 데려가는 데 저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잡게나.”
“예.”
이현수와 차이커창을 대동한 위긴스가 텔레포트를 시전해 기지 안으로 돌아왔다.
“…….”
이현수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총회의 이사들과 그 옆에서 대충 군용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대고 있는 강진호의 모습이었다.
이게 뭔…….
이럴 때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그…… 회주님?”
이현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강진호에게 다가갔다. 이현수를 본 강진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턱짓했다.
“왔어?”
“……아니,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판 뜨잔다. 일대일로.”
“…….”
“왜?”
“아, 아니…….”
이현수가 멍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맹세컨대 이현수가 이토록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는 것은 태어난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물론. 그래, 물론.
전투의 방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들이 합의한 것은 ‘싸워서 이기는 이들이 모든 권한을 가진다’, 그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모두가 단체로 달라붙어 싸우다가 결판을 내든, 그게 아니면 한 명 한 명이 따로 붙어 결판을 내든, 그것도 아니면 강진호와 흑왕이 일기토로 결판을 내든 그건 협의하기 나름이다.
아, 물론 그건 그런데…….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아무리 그래도 적이라도 부를 만한 이들이 마지막 승부를 위해 조우했는데 그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평화롭게 대화하면서 어떻게 싸울지를 의논하셨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
“태연하게 말을 거는데 뭘 어쩌겠어.”
세상에.
이현수가 덜덜 떨리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저 건너편에 있는 흑왕을 바라보았다.
‘진짜 흑왕은 흑왕이구나.’
세상에, 강진호를 제 페이스로 끌어들이다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중에 이 양반의 페이스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 사람은 그가 알기로 최연하 단 한 사람밖에는 없는데.
“아, 아니, 그게…….”
이현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니까…… 아홉 명이 서로 붙어서 다섯 번 먼저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룰이라는 거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납득을 한다고요?”
“그래.”
“…….”
딴지를 걸 만한 요소가 너무도 많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딴지를 걸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그런 이현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강진호가 선수를 쳤다.
“예전에는 흔한 일이었어.”
“이게요?”
“그렇다니까.”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분명 흔한 일이었다.
두 문파가 전쟁을 벌이는 것도, 그리고 그 전쟁 끝에 공멸하는 것도.
생존을 위해 벌이는 나라 간의 전쟁과는 다르게 문파 간의 전쟁은 생존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그 말인즉, 공멸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론이라는 의미다.
원하는 건 누가 더 강한가를 가리는 것.
그렇다면 굳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다. 가장 강한 이들이 서로가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그만이다.
이현수가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진짜 이해를 못하겠네.”
“낡은 방식이지, 더없이 낡은.”
강진호가 입가를 뒤틀었다.
그래, 이건 낡아빠진 방식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강진호와 흑왕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방식이었다. 그들 둘은 현재를 살아가되, 과거에 매여 있는 이들이니까.
“거참.”
이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하지만 우스운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방식이 이해가 간다는 점이었다.
‘이건 증명하는 자리이자 설득하는 자리다.’
확실히 이 깊은 지하에서 그들끼리 승부를 가리고, 그 결과를 통보한다고 해서 납득할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강진호와 흑왕이 가진 명성 때문에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하더라도 내심으로는 반발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는 방식이지만…….
‘이끌어 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보여줄 수밖에 없다.
강진호가 누구인지, 그리고 흑왕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어떤 이인지 말이다.
“……차라리 위로 올라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음?”
“위에는 무인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증언을 해줄 것 아닙니까? 굳이 방송으로 전 세계가 지켜보게 만드실 이유는 없잖습니까?”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하나 확실한 건…….”
“…….”
“저놈은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놈이 아니라는 거야.”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저놈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무인계가 이곳까지 밀려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무기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야.”
“……그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숨어들었기 때문이지.”
“…….”
“도망치고, 숨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야. 존재하지 않는 이와 대화할 방법은 없어.”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릴 이곳으로 이끈 것은 결국 무인의 방식이야. 굳이 싸우지 않아도, 이기지 않아도 대화와 협상으로 상황을 풀어볼 생각을 누구도 할 수 없었지.”
“그건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아무도 무인계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생겨난다, 그 대표라는 게.”
“…….”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 이해는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법이지. 그리고 이왕 드러낼 거면 어정쩡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게 만들어야지.”
이현수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어렸다.
“……오히려 더 경원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지금껏 숨은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방식이 틀렸다는 건 이미 증명됐잖아.”
이 말에는 이현수도 반박할 수 없었다.
“믿는 수밖에 없어.”
강진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과거 그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세상은 그에게 너무 각박하고 차가웠다. 그가 죽을 때 곁을 지켜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그가 강해졌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힘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그럴 리가.’
설사 강진호가 무학을 익히지 않고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그의 삶은 과거의 삶과 달라졌을 것이다.
만났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혔으니까.
“바꾸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돼. 그건 어쩌면 무책임한 신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언제나 제정신이 아닌 바보 놈들이지.”
“……회주님.”
강진호가 눈을 떴다.
“나는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 거다.”
“…….”
“그 결과가 반드시 좋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방식은 이것뿐이야. 그리고 내가 믿는 진리 역시 이것뿐이다.”
원장 수녀님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이제는 그 말이 그저 남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강하니까 타인을 돕고 살라는 말이 아니었어.’
원장 수녀님은 알고 계셨다. 강진호의 가슴속에 세워둔 단단한 벽을.
그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강진호를 걱정했다.
외톨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상처받을까 다칠까 떨지 말고,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라는 조언.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지금 강진호는 세상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를 세상이 받아들일지는 그 다음 문제다.
“……그 좋은 기회를 저놈들이 싹 먹어 치우면요?”
“별수 없지.”
강진호가 씨익 웃는다.
“그냥 지는 것보다는 그렇게 지는 게 좀 더 낫지 않을까?”
“……답도 없네, 진짜.”
“뭘 어쩌겠어. 그래서? 말릴 텐가?”
“어휴.”
이현수가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허탈함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못 당하겠네.’
과거에도 강진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현수는 인간으로서의 강함으로 강진호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강진호는 그때와도 다르다.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모조리 감당하면서도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자신을 믿는 이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무인들과 심지어 적들마저도 더 나은 곳으로 이끌려 하고 있다.
새삼 궁금해진다.
같은 시간을 살아왔다. 그런데 강진호가 본 세상과 그가 본 세상은 뭐가 그리 다르기에 강진호 혼자 이리 훌쩍 가버린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맡기니 뭐니 소리나 하지 마시지.”
“아까 너 울더라?”
“누가 웁니까,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우냐?”
“아니, 이 양반이!”
이현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에이, 진짜 안 왔어야 하는 건데!”
이현수가 떨떠름한 시선으로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근데 쟤들은 뭐 하는 겁니까?”
“……카메라 세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더라. 중계하라고 중국 쪽에 협상도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
이현수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돌아버리겠네.’
바깥세상과 무인계, 그리고 과거와 현대가 이 자리에서 뒤죽박죽 뒤섞이는 기분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위화감에 속이 울렁거린다.
‘내가 살다 살다 십이비도가 카메라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새삼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신 나간 리더 덕분에 개고생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자, 저 십이비도 놈들과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질 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왜 부른 겁니까? 콜라 심부름 하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제가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아, 별거 아냐.”
“예?”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한다.
“저놈들이 아홉 명이고, 우리가 여덟인데…… 승부를 내려면 홀수여야 한다고 한 명 더 데려오라더라고.”
“…….”
“딱히 생각나는 사람도 없고, 어차피 누굴 데려와도 전력은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 불렀어.”
“…….”
이현수가 멍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응.”
강진호가 해맑게 웃었다.
“너 출전한다.”
“…….”
이현수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꺾어졌다.
“제가요?”
“응.”
“저길요?”
“그래.”
“제가요?”
“그렇다니까.”
“왜요?”
“…….”
“왜요!”
“…….”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이가…….
무인계 최약체의 패기에 밀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