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14
#2013.
협의하다 (3)
“준비는 거의 끝났습니다.”
“그래?”
리우양의 보고에 흑왕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말귀는 알아듣는 모양이네.”
“……저희 측에서는 거의 한 게 없었습니다. 저쪽에서 다 알아서 한 거지.”
“역시 수완이 좋다니까.”
“꽉 막힌 벽창호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 꽉 막힌 성격으로 아랫사람은 기가 막히게 부려먹거든.”
흑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 빌어먹을. PTSD 도지네.”
“…….”
모르겠다.
리우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의 그릇으로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런 거랑 별 상관 없는 게 아닌가?’
그냥 동네 바보 같은데…….
리우양이 고개를 돌려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강진호의 주변에 있는 이들도 다들 그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로 고생이네.’
모르겠다.
하필이면 이런 인간들이 흑왕과 마존이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아니면 정상에 서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이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리우양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난리가 나겠지.’
그의 눈에 외부에서 데리고 온 방송 관련자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세팅은 이미 거의 끝났다. 남은 것은 외부에서 송출에 대한 협의를 끝내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카메라에 달라붙어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은 채 그들과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모르겠군.’
저 모습을 보니 과연 이 모든 일이 효과가 있을지 의심이 된다.
흑왕과 강진호가 합의를 한 이유는 대충 이해한다. 그 역시 뼈저리게 느끼던 것.
사람은 미지를 두려워한다.
귀신, 우주, 심해.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게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공포심을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물론 말은 틀리지 않다. 호랑이를 말로만 들은 이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만,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본 이들은 호랑이를 귀엽게 여기기도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우리 안에 들어가 호랑이를 마주해도 정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그 격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 습성 때문도, 생김새 때문도 아니다. 언제든 그의 목에 이빨을 틀어박고 단번에 목줄을 뜯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얼마나 쉽게 사람을 사냥할 수 있는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된다고 그 공포심이 사라질까?
어렵다.
이건 너무도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리우양이 흑왕이 하고 있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결국 뭐라도 해보지 않으면 이 끝은 정해져 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발악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되는 안 되든 무엇이라도 해보겠다고 하는데, 그걸 말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때, 건너편에서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
상대를 살핀 리우양이 그들을 맞아 앞으로 나갔다.
“이현수입니다.”
“차이커창이다.”
“……리우양입니다.”
세 사람, 특히나 이현수와 리우양의 눈빛에 서로에 대한 미묘한 동질감이 어렸다.
“……안면이 있죠?”
“예. 그때, 제가 총회를 한 번 방문했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뭐 그런 걸 가지고. 저희는 일상인데.”
이현수가 주먹을 입에 대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잊은 것은 아니다. 지금 마주한 이는 분명 적. 그것도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해 온 그 어떤 이들보다 더 강력한 적이다.
하지만…….
“외부 조율은 거의 끝나간다고 합니다.”
“……굉장히 빠르네요? 이제 말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에 그쪽이랑 통화하는 걸 송출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이미 한 번 한 일이라 딱히 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시스템은 이미 만들어져 있고, 재활용하는 건데요, 뭘.”
“아니, 그게 어려운 거죠. 그리고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엄청 골치 아픈 일이었을 텐데.”
“하하,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거죠.”
“…….”
리우양이 한없이 안타깝다는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일을 벌이는 사람이 따로 있고, 수습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여하튼 그…… 고생이 많으십니다.”
“괜찮습니다. 고생은 그쪽이 많아 보이시는데.”
“별말씀을요. 카메라 세팅도 이미 끝났으니, 천천히 준비해 주십시오.”
“근데 저 카메라는 언제 준비한 겁니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던 겁니까?”
“아뇨. 어제요.”
“…….”
“정확하게 말하면, 반나절쯤 전에?”
“…….”
이현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리우양을 바라보았다.
“……흔한 일인가요?”
“일상이죠.”
“힘드실 텐데.”
“이제는 만성이 돼서.”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에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차이커창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다가 커피라도 마시러 갈 기세로군. 헛짓거리하지 말고, 빨리 끝내라.”
리우양과 이현수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차이커창을 노려보았다.
“……뭐?”
“부럽다.”
“좋으시겠습니다.”
“뭐, 뭐가?”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홍왕 정도면 상식인이지.”
“손도 많이 안 가고.”
“…….”
차이커창이 발끈해 뭐라 말하려 하자, 이현수가 깔끔하게 선수를 쳤다.
“여하튼 30분 내로 준비가 끝날 겁니다.”
“30분이라…….”
리우양의 시선이 격납고의 중앙으로 향한다.
‘30분 뒤면 전 세계에 이곳의 광경이 보여진다는 거로군.’
이미 한 번 해본 일이기는 하지만, 느낌이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준비가 되는 대로 시작하시죠.”
“룰은?”
“라스트 맨 스탠딩.”
“……연승으로?”
이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재미가 없지. 일대일로 승부를 가리고, 더 싸울 수 있는 이는 뒤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흐음…… 뭐,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기는 건 우리일 테니까.”
리우양의 말에 이현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지금껏 총회를 상대한 이들치고 그 말을 하지 않은 이들은 없었습니다.”
“…….”
“시작은 언제나 그랬죠. 우리는 언제나 열세인 상황에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언제나 우리였죠.”
리우양이 말없이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면 알게 되더군요. 저 사람들은 아마 태생부터 강자였을 겁니다. 강자였던 이가 과거로 돌아가 강자로 살다가 다시 강자가 된 이들이죠.”
리우양이 눈을 찌푸렸다. 이현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들은 한 번도 자신보다 강한 이와 싸워본 적이 없을 겁니다. 아니, 대등한 이와도 싸워본 적이 없겠죠. 언제나 자신들이 가장 강하다는 생각을 안고 살았겠지.”
“…….”
“우린 그걸 모두 깨부수고 여기에 선 겁니다. 네. 그래서 라스트 맨 스탠딩.”
이현수가 가볍게 윙크를 한다.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우리입니다.”
“…….”
“그럼.”
이현수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제 진영으로 돌아가는 이현수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리우양이 말없이 몸을 돌려 흑왕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어때?”
뜬금없는 물음.
하지만 리우양은 흑왕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일전에 봤을 때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그런데?”
“……강진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저런 이를 아래에 두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겠죠.”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흑왕이 마치 제가 칭찬을 들은 것처럼 웃어 젖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리우양이 작게 입을 열었다.
“……흑왕이시여.”
“응?”
“불경스럽지만 하나만 여쭈겠습니다. 이 질문으로 제 목이 달아난다 해도 이것만은 묻고 싶습니다.”
“심각하게 나오는군. 뭔데? 해봐.”
보통 이럴 때는 목이 달아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흑왕은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완벽하게 열려 있지만, 또한 완벽하게 닫혀 있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 해도 선을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가 흑왕이다.
그렇기에…….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왕께서는 정말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십니까?”
“…….”
흑왕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무슨 의미지?”
“……이 무대를 보고 이해했습니다. 흑왕께서는 이미 이루고자 하는 것을 대부분 이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승부에서 이기든 지든 흑왕께서 원하는 새로운 세계는 열릴 겁니다.”
“그래서?”
“혹여 흑왕께서는 이곳에서 패배해 자신의 계획을 완성할 생각이 아니십니까? 흑왕께서는 훗날의 통치자로 마존을…….”
“하…… 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핫!”
흑왕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그 격한 반응을 본 리우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너무 황당해서 죽일 마음도 들지 않는군.”
“……그 말씀은?”
“내가 지금 강진호를 상찬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적이 강해야 이기는 쪽도 빛나는 법이지. 완벽한 주연을 만드는 것은 최고의 빌런이거든.”
“…….”
“리우양.”
“예, 흑왕.”
“나는 저 사람을 너무도 좋아한다.”
“…….”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아.”
흑왕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미 오래전에 완성되었어야 할 계획을 모두 무너뜨린 건 저 사람의 단순한 변덕이었다고 말이야.”
“……예.”
“나는 저 사람을 너무도 좋아하지. 내 생애를 통틀어 최고의 친구다. 하지만 나는 저 인간을 너무도 증오한다. 내 생애를 통틀어 최악의 악당이지.”
리우양이 입을 닫았다.
“나는 내 계획을 남에게 대충 넘기고 입을 닦아버리는, 그런 인간은 아니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손을 떠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강진호가 내 편을 들었다면 최고의 장기말이 되었겠지. 하지만…… 얻을 수 없다면 부숴 버리는 게 나아. 차 하나 떼 준다고 해서 장기를 두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흑왕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는 하나뿐이다. 그 숨통을 내 손으로 끊어주되, 남은 이들의 안전 정도는 보장해 주는 것.”
흑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라도 있으면 세상의 왕으로 만들어줬을 텐데…… 아쉽지. 그런 쪽으로는 영 쑥맥이라니까. 얼굴이 아깝지.”
“……그건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나는 비혼주의자라고. 저 인간은 여자 친구도 있잖아.”
흑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라 저 양반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우리의 관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해.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것 말고는 남은 게 없다. 그러니…….”
흑왕의 눈이 차갑게 리우양을 쏘아보았다.
“더는 나를 모욕하지 마라. 나는 이 세상의 완성을 위해 세 번의 삶을 바친 이다. 내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어. 나는 승리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리우양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흑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린 집념이 그를 떨게 만든다.
흑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건너편을 쏘아본다. 그런 흑왕의 기분을 아는지 강진호 역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입가에 서로 닮은 미소가 피어난다.
살심이 가득 담긴 미소가 말이다.
그리고 그때.
이현수가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다.
“자, 시작하자고. 누가 옳은지 칼로 증명하는 무인의 전쟁을.”
흑왕과 강진호를 필두로…….
두 진영이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