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15
#2014.
협의하다 (4)
[주말 날씨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말인 내일 전국에 봄비가 한가득 내리겠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서해안을 시작으로 내린 비는 오후에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며, 주말 내내 큰비가 내릴 예정…….]지직, 지지지직.
“응?”
TV를 보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거 왜 이러지?”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일어나 TV 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화면이 전환되더니 처음 보는 광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응?”
TV를 보던 이가 눈을 찌푸렸다.
일반적인 프로그램을 보다가 뉴스로 전환되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리 날씨라고는 해도 뉴스가 다른 화면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방송 사고인가…….”
의아한 느낌에 채널을 돌려보던 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야, 이거?”
한 채널이 아니었다.
모든 채널은 아니지만, 여러 화면에서 같은 화면이 나오고 있다. 채널을 다섯 번 바꾸면 두 번은 조금 전 본 화면이 보인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한 이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턱을 괴기 시작했다.
“또 뭔가 하는 건가?”
* * *
“방송은?”
“송출하고 있습니다. 케이블 쪽은 바로 송출을 시작했고, 정규방송은 안내 화면이 나간 뒤에 연결될 겁니다. 현재 20여 개의 채널을 확보했고, 추가적으로 더 늘리고 있습니다.”
“……반응은 어떤가?”
“SNS부터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딱히 대단한 장면이 나온 게 아니라 반응이 격하지는 않습니다만…….”
말끝이 흐려진다.
하지만 고한봉은 굳이 듣지 않아도 그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이 진심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제는 특수 효과니 어쩌니 하는 말도 더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무인.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
‘차라리 위화감의 측면이라면 외계인이 나을 판이지.’
그들은 애초에 원리가 다른 존재들이니까. 서울 하늘 한복판에 갑자기 UFO가 출현하고, 촉수가 달린 외계인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사람들의 놀람은 외계인이 ‘날아다닌다’가 아니라 외계인이 ‘존재한다’에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무인은 아니다.
평범한 이들의 무인에 대한 반응은 태생적으로 그 존재 자체보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더 큰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같은 사람이니까.
무인의 존재를 인식한 이들은 이미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금 이 방송은 그런 궁금증을 가진 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끌어당길 게 분명하다.
“정부에 대한 성토는 없나?”
“세계적으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웬만큼은 인식한 모양입니다. 사실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에…….”
고한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자신이 싫지만, 정치에 몸을 담아버린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알겠네. 혹여 문제가 생기거든 즉각 보고 부탁하네.”
“예, 총리님.”
보고자가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고한봉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핵미사일 기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방송으로 송출하라는 요구가 날아온 것은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고한봉에게는 그 제안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가부를 결정하는 건 그가 아니니까.
모니터에서 나오는 영상이 고한봉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커다란 공간. 지하임이 분명하지만 오히려 웬만한 광장보다 더 넓어 보일 만큼의 커다란 공간에 일련의 무리들이 마주 서 있다.
너무 멀리서 잡아 그 얼굴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한봉은 한쪽에 선 이들이 누구인지 너무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회주님…….”
적어도 강진호만은 못 알아볼 도리가 없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진호의 의견은 최대한 들어주고 싶다.
애초에 좋은 감정으로 처음 만난 이는 아니다. 그가 존경하던 김명국을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뜨린 이가 바로 강진호니까.
하지만 고한봉은 강진호를 만나며 그가 겪는 고충을 나름 이해하게 되었다. 무인계와 협의를 함에 있어서 그 이상의 상대를 찾기 어렵다는 말도 한 점 숨김없는 그의 본심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진심으로 강진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회주님의 삶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미 그는 전 세계의 자신의 모습을 공개했다. 저 난공불락의 성에 틀어박혀 있는 이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겠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과한 리스크를 짊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회주님.’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무인이라 소개하는 것과 모두의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여파가 다를 수밖에 없다.
고한봉 역시 녹화된 조악한 화면으로 강진호가 싸우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먹었던가.
어쩌면…….
이 선택으로 무인인 강진호만 남고, 인간 강진호의 삶은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고한봉은 알고 있다.
강진호는 무인으로서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삶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미련 없이 후자를 선택할 이였다. 가진 무공을 모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왜 저 사람이 저곳에 서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후우.”
고한봉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고한봉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저 응원할 뿐이다.
강진호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를.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기를.
그저.
* * *
두 집단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마주 선 이들 중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이는 없다.
그리고 이 승부에 얼마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없다.
작게는 자신들의 삶.
크게는 무인계의 미래.
그리고 더 크게 나아가서는 어쩌면 세상의 운명까지.
이 깊은 지하.
세상과 단절된 이 지하 깊은 곳에서 그 수많은 것들이 걸린 승부가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마주 선 이들의 표정은 그런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인다.
승부에 대한 중압감?
세상의 운명이 이곳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어쩌면 목숨조차 남기지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감?
아니.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마주 선 이들의 표정은 그런 것에 얽매이는 이는 결코 이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 서기까지 각자의 생각은 모두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마주하는 순간, 그들은 그저 무인, 가장 원초적인 무인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눈에 담긴 것은 그저 호승심.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전력을 담아 마음껏 주먹을 뻗을 수 있는 이.
그리고 그 거침없이 뻗어낸 주먹을 받아내 줄 수 있는 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흔하고 빤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것이 되기도 하는 법. 더 오를 곳이 없는 곳에 올라 버린 이들에게는 자신의 전력을 다해 부딪칠 수 있는 상대가 너무도 간절한 법이다.
전력을 다해 죽고 죽일 수 있는 상대.
그 상대를 앞에다 둔 무인들의 머릿속에서 다른 이유 따위는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살기.
마주 이를 드러낸 두 집단이 서로를 향해 웃어 젖혔다.
백연홍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꽤나 오랜만이군.”
“아아, 고풍스럽지.”
“……정말 고풍스러워.”
십이비도들은 꽤나 감회가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과거, 중원에서 수많은 비무를 겪어본 그들은 이런 체계에 꽤 익숙하다.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다시는 겪어볼 일이 없다고 생각한 일. 그 과거의 편린을 마주한 이들이 이를 드러냈다.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군.”
바토르가 그 광경을 보며 이죽였다.
“과연 그 아가리가 뭉개지고 나서도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한걸?”
“하하핫!”
백연홍이 두 눈에서 살기를 뿜어낸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서로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평범한 이가 이 근처에 있었다면 그 살기만으로도 심장이 멎기에 충분할 만큼의 지독한 살기.
“뭐, 그렇게 흥분할 것 없잖아?”
그 고조되어 가던 분위기를 깬 것은 흑왕의 느긋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이제 달아날 방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흑왕이 턱짓으로 그들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기뻐하라고. 역사를 통틀어봐도 너희보다 많은 관객 앞에서 싸울 수 있던 이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래도 관객이 많아야 흥이 나는 법 아니겠어?”
흑왕의 시선이 강진호에게 가닿았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그…….”
“예?”
“주둥아리나 조금 처닫았으면 좋겠군.”
“…….”
“다 지껄였으면 시작해. 변죽 울리는 데는 질렸으니까.”
“못 당하겠다니까.”
흑왕이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 목, 잘 간수하고 계십시오. 곧 가져갈 테니까.”
“해봐, 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웃는다.
그러고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돌려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은 강진호가 담배를 빼 물었다.
찰칵.
담배에 불을 붙인 강진호가 천천히 연기를 내뿜는다.
하고 싶은 말은 꽤 있다.
해주고 싶은 말도 꽤 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이제는 더는 말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남은 것은 그저 누가 더 강한가일 뿐.
“로드.”
위긴스가 나직하게 묻는다.
“선봉으로는 누구를 내보낼 생각이십니까?”
“쯧.”
강진호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강진호와 시선이 마주친 이현수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이 나오십니까?”
“농담한 적 없어.”
“그게 더 나빠!”
“……쯧.”
여전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이현수의 대타를 바라보았다.
“망할 놈이.”
위긴스가 흔치 않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저 망할 놈이 죽어도 못 나간다고 바닥을 굴러댄 덕에 그가 한국까지 다녀오는 수고를 해야 했다.
바로 저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할 수 있겠어?”
“……이길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맞설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건 이상한 질문이시네요.”
사내.
강진호와 시선을 마주한 이가 강진호와 닮은 표정으로 웃는다.
“그게 되는 이들만 남겨둬 놓고는 이제 와 그리 물으시다니요.”
“…….”
“이기고 돌아온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라 해도 맞서 싸우는 건 별것도 아닌 일이죠.”
그 대답이 마음이 든다는 듯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가봐.”
“예.”
사내.
이명환이 중앙을 향해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방진훈이 눈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이기는 건 불가능할 텐데, 굳이 저놈까지 데려올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이현수를 내보내는 게…….”
“여기서까지 원한 푸시깁니까, 진짜?”
이현수가 학을 뗐지만, 강진호는 그런 이현수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의미는 있지.”
“…….”
강진호의 시선이 이명환의 등을 쫓는다.
“이어가야 할 이가 이곳에서 함께한다는 건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지. 우리는 이어가기 위해 여기에 모인 이들이니까.”
그렇기에 질 수 없다.
그렇기에 지지 않는다.
이명환의 건너편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강진호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온다.
‘시작이군.’
강진호가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