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29
#2028.
증명하다 (3)
권성은 반듯한 자였다.
사람을 설명하기에는 무척이나 조악한 말이지만, 그 말이 아니고서는 권성이라는 사람을 표현하기 어렵다.
일인전승(한 사람에게만 무학을 잇게 만드는 문파)인 천뢰문(天牢門)의 전승자인 그는 나이 스물에 강호에 출도해 수많은 협명을 쌓아올렸다.
그의 권은 언제나 약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인들을 징치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수도 없는 악인들을 무릎 꿇리고.
수도 없는 마인들을 그 손으로 부수었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약한 자들을 위해 싸우기를 수십 년. 어느새 그의 이름 앞에는 복마권성(伏魔拳聖)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어 있었다.
협의를 표방한 자는 수도 없다.
협객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들 역시 강호사에 드물지 않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협의를 이행하고, 마지막까지 낮은 곳에 임한 이는 결코 흔치 않다.
그렇기에 권성(拳聖)이라 불린 것이다.
쿵!
권성이 진각을 내밟았다.
삶의 궤적처럼 그의 무학 역시 반듯하기 그지없었다.
요령 없이 우직하게 쌓아올린 무가 그의 육신에 강림한다. 내디딘 발의 힘을 남김없이 실어낸 권력이 혈마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홍왕이나 바토르처럼 과하지 않은, 하지만 파권 같은 실전주의에 비한다면 웅혼한!
모자라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은, 말 그대로 중도를 지킨 권력이 혈마를 향해 쇄도했다.
“흥!”
혈마의 육신이 혈기를 끌어 올린다. 그의 얼굴에서 푸른 핏줄이 돋아나고 두 눈이 붉게 물든다.
동시의 입에서는 시뻘건 연기가 구름처럼 흘러나왔다.
이래서이다.
인간이란 시각에 휘둘리는 존재. 혈교 특유의 무학을 끌어 올렸을 때 직면해야 하는 외양은 그들의 기나긴 박해에 분명 연관이 있으리라. 누가 보더라도 괴물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형상이니까.
하지만…….
우스운 것은 혈교의 누구도 그들의 무학이 이런 형태로 발현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무학의 형태라는 건 사람의 뜻대로 좌우되지 않는 것, 저 강진호가 사람을 위압하기 위해서 악마의 형상을 취하는 게 아니듯이 혈마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스스로의 무학을 발현하는 가장 온당한 모습일 뿐.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혈기가 붉은 막이 되어 넘실댄다.
붉게 물든 강?
아니면 살아 움직이는 피?
빗대어 설명할 만한 광경이 없다. 그건 적어도 바람이 불고, 물이 아래로 흐르고, 태양이 떠오르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광경이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피가 제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농후하고, 끈적하고, 또 짙다.
넘실거리는 피가 날아드는 권력을 집어삼킨다.
콰드득!
두터운 천이 찔러오는 봉을 휘감듯, 붉은 피가 밀려오는 권력을 휘감아댄다.
그러자 웅혼하던 권력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마치 붉은 피가 권력을 먹어 치운 것처럼.
“흠!”
권성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변함이 없군.’
저 무학이 눈에 익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혈교를 상대해 본 적이 여러 번이라고는 하나, 저 무학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무학이 아니라 기괴함이다. 분명 중원이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한 무학. 그 원리가 다를 것이 있겠냐마는, 혈교의 무학은 보는 순간 사람의 속을 긁어 대는 괴이함이 있었다.
“사특한!”
권성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피의 물결을 보며 사자후를 뿜어냈다.
천뢰문의 무학은 뇌기를 품은 무학.
기본적으로 뇌기(牢氣)와 화기(火氣)는 사기(邪氣)의 천적이나 다름없다. 복마권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파사(破邪)의 기운을 가득 담은, 우레와 같은 권력이 뻗어오는 핏빛 물결을 후려 갈겼다.
“큭!”
혈마의 눈이 더욱 붉어진다.
전신이 저릿저릿한 이 감각이 뇌기 때문인지, 아니면 파사의 기운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저자의 무학은 그의 상극이나 다름없다는 사실뿐이다.
‘웃기지도 않군.’
맞설 이유가 없다.
복마와 파사를 기치로 삼는 이들과 맞선다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의 선조들이 맞은 결말 역시 항상 같았다.
하지만 인간은 실패 속에서 답을 찾아내는 법.
혈교가 찾아낸 답은 분명 존재했다.
다만 그 답은 저들의 무학에 대한 파훼가 아니라 그저 맞서지 않는 것. 그들의 은밀함을 이용하여 도주하는 것이라는 게 문제일 뿐.
평소였다면 혈마는 손이 맞닿는 순간에 몸을 날렸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 한 몸 정도는 빼낼 수 있다. 그게 혈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혈마는 바닥을 단단히 디딘 채 버티고 섰다.
‘어울리지 않는 짓이지.’
왜?
알면서 그는 왜 이러고 있는가. 어째서?
“당신은 이 시대에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과거, 그가 강진호에게 물은 말이다.
“지금은 이런 시대입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국가를 상대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과학을 상대하기에 무학이라는 건 너무도 미력하죠. 그런데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대에 무학을 익히고 국가와 대항하려 하는 겁니까?”
흑왕의 물음은 고리타분하다. 그건 이미 강진호와 혈마가 나눈 대화이니까. 그걸 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질문에 대한 강진호의 대답은 아직 그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혀 있다.
“착각하지 마. 나는 그런 데 관심 없어. 시대는 알아서 흐르겠지. 나는 시대를 짊어지는 사람도 아니고, 무인들의 미래를 만들어 주는 사람도 아니야. 내 원칙은 간단하지. 날 건드리는 놈은 죽인다.”
“큭큭큭큭.”
혈마의 입술을 비집고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거짓말쟁이 같으니.’
그렇게 지껄여 댄 이는 결국 혈마들을 이끌고 이 자리에 섰다. 스스로 시대를 짊어지지도, 무인들의 미래를 열어주려 하지도 않겠다 선언하던, 자기밖에 모르는 악마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다.
우습기 짝이 없다. 저게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짓거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혈마는 강진호를 비웃을 수 없었다.
저 강진호가 지키려고 하는 이들에는 분명 혈교도들도 속해 있으니까.
“그러니 충성이니 어쩌니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라. 나는 너희에게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다. 애초에 혈교든 마교든 마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가 내 것이다.”
강진호는 모를 것이다.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 혈마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말이다.
그 후로 강진호는 단 한 번도 혈교도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도 없다. 심지어 그들을 짊어진 혈마를 목숨을 걸어야 할 임무에 밀어 넣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박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쓸모없다 욕하고 침을 뱉지 않는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
하지만 그 당연한 일에 혈교도들은 수백 년 동안 목말라 했다.
세상 누군가에게는 자유가 숨 쉬듯 당연한 것이지만, 그 순간에도 다른 누군가는 자유를 손끝으로 느껴보기 위해 목숨을 건다.
콰드득!
주먹을 움켜잡은 혈마가 두 눈으로 붉은 혈광을 줄기줄기 내뿜었다.
‘도망치라고?’
어디로?
대체 어디로?
혈마가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한 번 집의 따뜻함을 느껴 버린 짐승은 다시는 들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가슴속에 온기의 흔적을 남겨 버린 이는 제 의지로 들판으로 나아가더라도 결국은 도태될 뿐이다.
하지만 그게 뭐가 잘못됐는가?
들판의 낭만을 논하는 이들은 들판의 차가움을 느껴보지 못한 이들이다. 들판을 노니는 야성을 논하는 이는 들판의 잔인함이 무언지 모르는 이들이다.
혈마는 안다.
이곳에서 달아난다면 그가 직면해야 할 곳은 어차피 저 차가운 들판일 뿐.
다시 들판으로 나아간다면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다시는 이 안온함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이없지.”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궁극의 도주.
세상으로 부터의 회피나 다름없다.
“도망치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니!”
그가 뿜어낸 혈기가 격랑처럼 휘몰아친다.
치솟아 오른 붉은 혈기의 파도를 향해 복마권성이 뿜어낸 권력이 폭풍을 가르는 벼락처럼 날아와 꽂혔다.
콰르르르르릉!
귀를 찢는 우렛소리와 함께 작렬하는 뇌력이 혈기를 찢어발기며 혈마의 몸에 틀어박혔다.
퍼어어어엉!
가죽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혈마의 어깨가 말 그대로 터져 나간다. 마치 육체가 액체로 만들어져 있기라도 한 듯이 뇌력에 격중된 어깨가 한 줌 핏물로 화해 솟구쳤다.
하지만 혈마는 그 정도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권성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놈!”
권성이 다시 진각을 밟으며 권력을 뿜어낸다.
전신을 희게 물들이며 작렬한 백색의 내전이 그의 주먹에 모여들더니 단숨에 뻗어 나간다.
벼락을 상징하는 건 그 위력과 속도.
제아무리 대단한 사술이라고 한들, 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날아드는 권력을 어찌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콰르르르릉!
대기를 가르며 날아든 권력이 혈마가 흘려낸 혈기를 다시 한번 찢어내고 그의 다리에 틀어박혔다.
퍼어어어엉!
부서진다? 찢어진다? 아니면 으스러진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다.
권력에 격중된 혈마의 무릎 아래가 단숨에 폭발하듯 터져 버리며 한 줌 핏물로 화한다.
혈마의 몸이 꼬꾸라질 듯 휘청이며 앞으로 크게 기울어진다.
누가 봐도 권성이 완벽한 승기를 잡은 상황. 권성의 전신에서 백색의 뇌기가 충천하며 격납고의 천장까지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하아아아아아아압!”
콰아아앙!
권성이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난데없이 커다란 사자후를 터뜨리더니 바닥을 짓밟았다.
“빤한 수작이 내게 통할 줄 알았더냐!”
그가 혈마를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휘청이는 혈마가 있는 곳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일렁이는 피의 장막 뒤였다.
그리고…….
“흐음.”
부상을 입은 혈마의 몸이 가루처럼 으스러진다. 그 기경할 괴사에도 권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일렁이는 피의 장막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는 있다는 건가.”
그 순간, 요동치던 피의 물결이 바닥으로 깔리더니, 그 속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은 혈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권성이 더없이 웅혼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교의 사술은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사술은 그저 사술일 뿐.”
“…….”
“어리석은 놈. 네게 승산은 없다. 사술은 나를 범할 수 없다. 그리고 잊은 건 아니겠지. 십이비도 중에 혈왕이 있었음을.”
혈마의 눈썹이 살짝 꿈틀댄다.
“가장 강대했던 혈교의 교주를 보아온 나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을 들은 혈마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혈왕은 죽었나?”
“안타깝게도.”
“그것참 아쉬운 일이군.”
“……뭐라 했느냐?”
혈마가 혀로 입술을 천천히 핥는다.
“혈왕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직접 찢어 죽여줬을 텐데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
“사술이 통하지 않는다고?”
혈마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허공에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해 대던 놈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군. 너는 네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될 것이다.”
혈마의 양손에서 붉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