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32
#2031.
대립하다 (1)
검게 탄 입술이 벌어지며 핏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혈마는 그런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두……려움.”
혀끝까지 타들어 간 몸으로 말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인지,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권성은 혈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려움?”
혈마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안에 무슨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냐?”
권성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그는 나약함을 부수고, 강인함을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선(善)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의 안에 두려움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권성을 보며 혈마가 낮게 웃었다.
“보지 않……았나?”
“…….”
권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말이 틀리지 않다. 그는 이미 그의 안에 존재하는 어두움을 직면했다.
소림의 승려와 무당의 도인들이 혈교의 천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무학이 사기를 정화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안에 미혹과 번뇌가 존재하지 않고 굳건한 신념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권성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코에서 진득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이내 그 피는 검게 물들어갔다.
“……내 두려움이 무엇이었던가?”
혈마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것만은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듯이.
“……두려움.”
“…….”
“네 안에 두려움……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권성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듯 그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네 안에…….”
혈마가 그런 권성을 보며 입가를 뒤틀었다.
“아직 나약함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
“퉤.”
혈마가 바닥에 피를 뱉어낸다.
그러고는 이죽이듯 말했다.
“완……벽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
권성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다가 다시 꾹 닫는다.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권성이 고개를 들어 혈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를 극복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던 거겠지.”
“…….”
혈마는 알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들은 저런 인간을 수도 없이 상대해 왔으니까. 그렇기에 알 수 있다.
협객은 좋은 것이다. 선의를 행하는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권성의 영역까지 가버린다면?
스스로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협과 선만을 모든 것으로 여긴다면?
그건 정신병이나 다름없다.
이건 강진호의 입버릇과도 닿아 있다. 초인의 영역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머리 한구석에 나사가 풀린 이들이다.
평생 동안 완벽한 이타심으로 타인을 돕고,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정진해 나간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기보다는 미치광이의 행위에 가깝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들끓는 이가 동일한 인간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각박하다는 의미니까. 철저하게 타인을 사랑하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하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 말도 안 되는 행위의 근간이 되는 어둠이.
지치지 않는 동력을 내게 만드는 공포가.
겉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게, 심층의 가장 깊은 곳에 지독스럽게 눌러놓은, 그렇기에 오히려 드러난 악의보다 몇 십 ㅠ배는 더 진득한 어둠이.
그가 쓴 환술은 바로 그런 협객들의 심리를 파고들기 위해서 혈교가 만들어낸 비수였다.
자신의 악함을 부정하지 않는 악인들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스스로 선하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에게는 장난만도 못한.
오로지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자신 안의 어두움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환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혈교가 이 비장의 환술을 완성했을 때는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협객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권성의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점점 더 짙어진다.
그 순간, 권성은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했다.
“……혈독(血毒)인가.”
혈교 특유의 독.
시전자의 혈액에 흐르는 맹독.
아마 혈마가 혈액을 매개로 환술을 사용할 때, 기화된 혈액을 타고 그의 호흡기로 침투했을 것이다.
평소의 권성이라면 감히 혈독 따위가 침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사용자의 내력과 무위의 수준에 따라 그 독기가 증가하는 끔찍한 마물이라고 해도 그의 육체는 사특한 독을 완전히 중화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을 파고든 혈독은 중화되기는커녕 점점 더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말의 의미는 곧…….
권성이 말없이 혈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지.”
“…….”
“왜 이렇게까지 한 건가?”
권성의 눈이 전신이 숯처럼 타버린 혈마의 육신을 쫓는다. 설사 살아난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제 아무리 무인의 회복력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가 아무리 환술에 걸렸다고 해도.
그의 몸에 혈독이 파고들었다 해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트라우마를 자극당한 권성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력을 퍼부어 혈독이 발작할 수 있는 상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고 해도.
그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고 해도 혈마가 죽음과 그 죽음 이상의 고통을 각오하고 제 몸을 뇌력에 던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권성은 도무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질문에 혈마는 오히려 짙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웃……긴 새끼네.”
“…….”
“내가…… 남을 위해 이 짓을 했다면 숭고하다고 박……수를 쳐 댔겠지.”
권성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을 위해 죽음과 고통을 불사하는 것은 분명 숭고한 행위니까.
“같은 짓을…… 나를 위해서 하는 게 뭐가 문제야?”
“…….”
“그게…… 사람이란 거다, 정신병자 놈아.”
권성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뜬 순간, 그의 주먹에서 날아간 권력이 혈마를 강타했다.
쿠웅!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권력에 격중당한 혈마가 바닥에 쓰러졌다.
“확실히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기절한 혈마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승부는 내가 가져간다.”
쓰러진 혈마를 빤히 바라보던 권성이 고개를 들어 아직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데려가서 치료하시오.”
파앗!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혈마의 바로 앞에 누군가 내려섰다.
방진훈.
그가 더없이 굳은 얼굴로 조심스레 팔을 뻗어 쓰러진 혈마를 안아 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는 놈에게 꼭 공격을 해야 했나, 이 새끼야?”
“그래야 했지.”
권성이 가만히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억울할 테니까.”
“…….”
권성을 죽일 듯 노려보던 방진훈이 몸을 홱 돌렸다. 지금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가 혈마를 안고 제 진영으로 달려가자,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권성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알 수 없는 것이 삶이구나.”
천천히 걸어간 그가 흑왕의 앞에 섰다.
“임무를 완수하고 왔습니다, 흑왕이시여.”
흑왕이 가만히 권성을 바라본다. 그의 코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가 그의 앞섶을 모조리 적셔 대고 있었다. 피에 젖은 옷이 흰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가는 것을 본 흑왕이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상은?”
“……너무 억울해서 이기기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럼 죽이면 됐을 텐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진짜 제 패배가 될 테니까요.”
흑왕이 고소를 머금었다.
마지막까지 올곧다. 자신의 안에 있는 어둠을 직면했음에도 권성은 제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벽창호.
하지만 그렇기에 권성이리라.
권성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저 말이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제 스스로 목숨을 끊던 그 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어쩌면 제가 그토록 약자를 돕는 협의에 집착한 이유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어가던 그 순간 누구 하나 나를 돕지 않았다는 원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구하고 있던 것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던 거죠.”
권성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피어났다.
“우습군요. 스스로도 지독하다고 생각한 이타심이 알고 보니 지독한 이기심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후회하나?”
“후회라……. 그런 건 아니지만…….”
검은 피로 완전히 젖어버린 얼굴로 권성이 씁쓸하게 말한다.
“혹여 제게 또 한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정말 숨기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보고 싶기는 합니다. 사실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래.”
흑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나는 말해두지.”
“…….”
“너는 훌륭했다. 누구도 네 삶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설사 나라고 해도.”
권성이 말없이 흑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승부로 네 삶은 완성되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어라.”
“그거…….”
권성의 얼굴에 멋진 미소가 피어났다.
“참 감사한…….”
그가 천천히 허물어진다.
심장이 꿰뚫리고도 승리를 쟁취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선고받고도 마지막까지 삶의 자세를 관철했다.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은 위선은 위선이 될 수 없듯, 그 안에 무엇이 있든 끝까지 선(善)을 관철한 이는 그저 선인(善人)일 뿐이다.
털썩.
무릎을 꿇은 권성이 옆으로 쓰러지려 하자, 흑왕이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
“부디…… 이루시기……를…….”
권성의 두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다.
가만히 권성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흑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러지.”
백연홍이 다가와 권성의 시신을 받아 들었다. 귀편을 쓰레기처럼 다룰 때와는 전혀 다른, 무척이나 정중한 자세로.
“쉬게 해줘라.”
“예.”
백연홍이 권성의 시신을 안아 들고 뒤쪽으로 향하자, 흑왕이 씁쓸한 표정으로 건너편을 바라본다.
승리했으되 죽은 자.
죽지 않았으되 패한 자.
진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인가.
“절망을 알기에 약한 게 아니야.”
흑왕이 작게 중얼거린다.
“절망을 알기에 강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절망을 알기에…….
모두 이곳에서 그를 돕고 섰다.
지금을 살아가는 무인들에게는 그들이 겪은, 그 지독한 절망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슴속에 공포와 트라우마를 숨겨 놓고 부정했기에 죽었다고?
웃기는 소리.
그게 어떻게 패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영영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고도 스스로를 채찍질해 초인의 영역까지 이른 이를 상찬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좋아.”
흑왕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두 번 이겼다. 승기는 가져왔어. 이제 쐐기를 박아라.”
“당연히 그리될 것입니다, 흑왕이시여.”
남은 십이비도들의 눈에서 차가운 결의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