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41
#2040.
계승하다 (5)
차이커창이 손이 부러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홍왕이시여.’
그의 두 눈에 천천히 자세를 잡는 홍왕의 모습이 들어온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속이 뒤집힌다.
아직 이 승부의 막바지에 이른 것도 아닌데, 홍왕이 벌써 나왔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 상대가 흑왕이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심지어 저곳에 그 거대하고 드넓은 중원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홍왕이 보좌하는 이 하나 없이 서 있다는 사실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화가 난다.
‘빌어먹을.’
알고 있다.
이건 결코 홍왕의 위상이 낮아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것을. 때때로 무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저 신창이 일전에 홍왕께 패했다는 사실은 차이커창 역시 알고 있다. 지금이 아니라 더 이른 순번에 그가 도전을 했다 해도 홍왕은 결코 그 싸움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왕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차이커창이 순순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어쩌면 총회에 밀려 버린 홍왕계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홍왕계가 총회보다 부족한가?
아니. 절대 그렇지는 않다.
홍왕계와 총회의 전력을 비교한다면, 여전히 홍왕계가 압도적인 우위를 잡고 있다.
총회가 관계를 맺고 있는 원탁과 미국 등이 대놓고 총회의 편에 선다면 결과가 어찌 될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면피일 뿐이야.’
전력이라는 건 그저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무인계의 전쟁은 현대전이라기보다는 고대전에 가깝다. 홍왕계가 아무리 더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홍왕이 쓰러지는 순간, 남아 있는 무인의 수가 몇인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모조리 사분오열되어 버릴 테니까.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 지금 홍왕계는 총회를 상대로 홍왕을 지켜낼 힘이 없다.
설사 저 마왕과 홍왕의 실력이 대등할 거라 가정해도 홍왕계의 장로들은 총회의 이사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총회의 수뇌부들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홍왕을 잡기 위해 단체로 움직인다면, 차이커창이 선택할 수 있는 수는 단 하나뿐이다. 홍왕이 저들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도주시키는 것.
하지만 홍왕이 그런 선택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계산은 오래전에 끝났다. 남은 것은 그 계산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 뿐.
그리고 아마 홍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리 차이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총회의 이사들이 모조리 초인의 영역에 접어들어 버린 순간, 홍왕계와 총회의 승부는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홍왕계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홍왕이 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반드시 다른 삼왕들을 이겨내고 세상의 왕이 될 것이라 믿어온 홍왕이다. 천하제일의 무인임을 증명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홍왕이다.
하지만 지금의 홍왕은 그저 무인계를 대표하는 무인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내장을 바늘로 긁어 대는 것만 같다.
목구멍에서 역류한 불쾌감이 전신을 검게 물들이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차이커창이 그 울분을 소리 내 토로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속이 아무리 썩어 문드러진다고 한들 홍왕이 겪고 있을 심적 고통에는 비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왕이시여.’
차이커창이 입술을 꽉 깨물고 홍왕을 바라보았다.
그렇다 한들…….
그래. 그렇다 한들 그는 홍왕이다.
‘믿고 있습니다.’
중원의 수많은 무인들이 이 순간, 바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차이커창이 바라는 것은 그저 하나.
그가 마음속의 번뇌를 털어내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홍왕이니까.
* * *
홍왕이 가만히 숨을 골랐다.
긴장?
딱히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몸은 완벽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의 마음은 그리 평온하지 못하다.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왔던 것인가?’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느꼈다. 스스로 수많은 것을 짊어지고, 한순간도 나태하지 않고 노력해 왔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이제 곧 머지않아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강진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의 등장은 홍왕의 세상을 완전히 부숴놓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홍왕의 눈에 보이는 것은 드높은 천장이다.
오르고 올라도 차마 닿을 것 같지 않은 천장. 꽤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 천장은 그의 생각보다 배는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십이비도가 가르쳐 주었다.
그가 꾼 꿈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가 치열하게 싸워온 세상이 사실은 저 흑왕의 손아귀 안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결국 처음부터 그에게 세상에 군림하는 결말은 없던 것이다.
그 사실은 홍왕에게 더없이 짙은 허무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홍왕이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서 실망이라도 했는가?’
아니.
오히려 조금 기쁠지도 모른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그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만큼 작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중원의 왕이라…….’
홍왕이 낮게 웃었다.
세상의 중심을 중원이라 한정하고, 그곳을 지배할 수 있다면 세상을 지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길 때부터 어쩌면 이런 결말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흑왕이나 강진호의 존재가 없다 해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스스로의 틀을 깰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벽을 넘어 절대의 영역에 이르고도 앞으로 더 나아갈 길이 이토록이나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는데.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기에…….
홍왕이 차갑고도 오만한 눈으로 신창을 바라보았다.
이자와의 승부가 그리 즐겁지 않다.
‘내 앞에 선 것은 대단한 용기일지도 모르지.’
더 강한 자에게 도전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이가 패배를 설욕하게 나선 것은 분명 칭찬해 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오라.”
홍왕이 살짝 손을 접었다 편다.
그 자신만만한 동작을 보며 신창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탓!
바닥을 내밟은 그의 창이 빛살이 되어 홍왕을 향해 날아든다.
그저 빠르기만 한 일격.
폭발적인 와류를 담아낸 것도 아니고, 가공할 내력을 밀어 넣은 것도 아니다.
그저 기본에 충실한 상단 찌르기.
하지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찌르기에 불과하다 해도 누구의 손에서 펼쳐지는가에 따라 천하의 절초로 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신창이 증명하고 있었다.
파아아앗!
홍왕이 고개를 뒤틀어 날아드는 창을 피해낸다.
그 순간, 살짝 뒤로 당겨진 창이 홍왕의 머리와 가슴, 배를 연이어 찔러 들어간다.
홍왕이 내력을 머금은 장(掌)을 내밀어 그의 창을 막아낸다.
터져 나오는 세 번의 폭음.
하지만 튕겨지듯 뒤로 밀려난 창은 마치 짜여진 안무를 추듯, 자연스레 회전하며 다시 십여 개의 창영을 만들어내며 홍왕을 압박해 들어갔다.
‘흠?’
홍왕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이건?’
다르다.
홍왕이 바닥을 박차며 뒤쪽으로 살짝 물러났다. 웬만해서는 그 몸을 뒤로 물리는 법이 없는 홍왕이지만, 지금은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홍왕이 몸을 빼내는 순간, 신창이 정확하게 홍왕이 물러난 만큼 거리를 좁히며 수십 개의 창영을 만들어내 홍왕의 전신을 찔러 들어온다.
우세를 잡았다 하여 달려들지 않는다. 이 창이 노리는 것은 홍왕의 목숨이 아니다. 그저 그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조금이라도 승기를 잡기 휘한 찌르기!
확연하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일. 신창과 싸운 기억은 홍왕의 머릿속에 확연하게 남아 있다. 그렇기에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지금 신창이 구사하는 창술은 일전에 그가 상대한 것과 분명 그 궤를 달리한다.
이전의 승부에서 신창은 속도와 힘으로 그를 짓누르려 들었다.
하지만 지금 저 창술에는 이전과 같은 속도도, 그리고 이전과 같은 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단단하게?’
완벽하게 기본에 충실한 창술.
짧고 간결한 공격을 연이어 펼쳐 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틈을 본다 한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압박하여 틈을 점점 벌려 나간다.
마치 교본에라도 실릴 것 같은 창술의 원형이 지금 신창의 창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흠!”
쿵!
홍왕이 진각을 밟고는 주먹을 내뻗는다.
그의 양손이 질풍처럼 내뻗어지며 허공의 수십 개의 황금빛 권강을 만들어낸다.
날아드는 창영과 홍왕이 만들어낸 권영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들었다.
콰가가가가각!
호흡을 멈춘 두 사람이 바닥에 단단히 발을 고정하고는 쉴 새 없는 연격을 날려 댄다.
창과 주먹이 허공에서 찰나의 순간 동안에도 수십 번씩 서로 격돌한다.
그리 대단한 공격도 아니다.
그저 빠르게 창을 찔러내고, 빠르게 주먹을 휘두를 뿐.
하지만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의 충돌이 만들어낸 여파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주먹과 창의 충돌이 만들어낸 여파가 폭풍처럼 커다란 동공 안에 휘몰아친다.
쩌적, 쩌저적.
연이은 충돌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바닥이 쩌적 갈라지며 으스러지기 시작한다.
그건 말 그대로 무(武)의 원형.
좀 더 빠르게 주먹을 휘둘러 상대의 몸을 가격한다.
좀 더 많이 창을 휘둘러 상대의 육체를 찔러낸다.
무리(武理)라고 할 것도 없는 원초적 의지.
권과 창.
각자의 영역에서 더 오를 곳을 찾기 힘든 경지에 오른 이들이 그들이 쌓아 올린 것을 시연하듯 창을 찌르고,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
밀려나간 대기가 칼날이 되어 공동 안을 휩쓴다. 한순간에 수십번 맞부딪히는 충돌이 이어지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혼란에 가득찬 세상 속에서…….
신창과 홍왕은 그 모든 것이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다는 듯 오직 서로만을 두 눈에 담고 공격을 이어갔다.
쾅!
강렬한 주먹과 맞아 뒤로 튕겨 나온 창이 갈대처럼 낭창하게 휘어지더니, 전보다 더한 기세를 담고 쏘아진다.
촤아아아악!
마치 수백 마리의 뱀이 구불거리며 일제히 독니를 드러내고 날아오르는 것과 같은 광경.
하나 그 가공할 찌르기를 맞이하는 홍왕 역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웅!
단숨에 뻗어진 수백의 장영이 허공에 거대한 벽을 만들어낸다.
세상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처럼 너무도 단단한 벽.
콰각! 콰가가각! 콰각!
신창의 창이 그 벽에 부딪쳐 뒤로 튕겨난다.
으득.
쉴 새 없이 창을 뻗어내던 신창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다.
“하아아아아압!”
신창이 거대한 기합성을 발하며 창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파아아아아앗!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수백의 창영이 순간 벽의 한 지점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강!
너무도 빠르게 이어지는 충돌음은 마치 한 번의 커다란 굉음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충돌의 끝에,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홍왕의 벽에 실낱같은 틈이 만들어졌다.
그 순간, 신창의 두 눈에 새파란 광망이 일었다.
파아아아앗!
그의 창이 먹이를 노리던 독차처럼 벽 사이로 만들어진 미세한 틈을 영활하게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