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45
#2044.
격렬하다 (4)
“상처는?”
“치명상입니다. 치명상이긴 한데…….”
위긴스가 심각한 얼굴로 홍왕의 상세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가.”
바로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최악은 면했다고 봐야겠죠.”
장민도 침중한 얼굴이고, 부상으로 여력이 없는 방진훈조차 영 찝찝한 얼굴로 홍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니 다행이지만…….
“홍왕이 질 줄이야…….”
방진훈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홍왕만은 반드시 승리해 줄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그 홍왕이 패배하는 사태가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건 그동안 총회 쪽에 따르던 행운이 더는 그들을 향해 웃어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승삼패라…….”
장민의 입에서도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나쁜 성적은 아니다. 확실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쉽지 않군.’
아홉 번의 승부 중 다섯 번이 치러졌다. 그중 세 번을 졌다. 그 말인즉, 강진호와 흑왕의 승부까지 끌고 가기 위해서는 이사들이 세 번의 승부 중 두 번을 이겨야 한다는 의미다.
‘저 십이비도를 상대로 두 번이라…….’
이건 너무도 무거운 짐이다.
“음.”
바토르가 크게 침음을 흘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홍왕의 가슴에 길고 붉은 선이 그어져 있다.
‘모르겠군.’
그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분명 신창의 창은 홍왕의 가슴을 갈랐다. 단 1센티만 더 깊이 베였다면 절명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다.
하지만…….
바토르가 의식을 잃은 홍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먹 한 번을 떨칠 힘은 있었을 텐데.’
그 순간, 홍왕은 선택했을 것이다.
모든 힘을 소진한 신창에게 일격을 날려 승리를 따내는 대신 자신의 목숨마저 포기하는 길과 그대로 얌전히 패배해 목숨을 구하는 길.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말 그대로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가 아는 과거의 홍왕이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뻗었을 것이고, 자신의 목숨과 승리를 교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홍왕은 다른 길을 택했다.
패배의 굴욕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이어 나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겁을 먹었나, 홍왕?’
어찌 보면 비겁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승부에서 목숨을 아꼈다는 말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적어도 바토르만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의 홍왕은 자신이 진 짐의 무게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홍왕에게 중원 최고의 무인으로서 다른 이들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홍왕에게 있어서 이 의무란 강자이기에 따라오는 것이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관철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된 거겠지.
자신마저 죽었을 때, 중원이 맞이하게 될 운명을 말이다.
나약함?
웃기는 소리다.
패배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패배를 반복해도 패할 때마다 심장을 면도날로 난자하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른다. 바토르조차 그러한데 홍왕처럼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이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홍왕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 기꺼이 그 고통을 감수하는 길을 택했다. 그런 그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강진호는 중원에 딱히 관심을 둘 사람이 아니다. 총회라면 몰라도 중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그들이 승리한다 해도 홍왕이 없는 중국은 다시 지옥 같은 내전에 휩싸일 것이다. 아니, 내전 이전에 홍왕이 없는 그들이 바깥세상의 압력에 대항할 수 있을지부터 미지수다.
삼왕의 존재감은 그토록 대단했으니까.
그걸 알기에 홍왕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패배를 택했다.
“……빌어먹을.”
바토르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나는 저런 건 못해.’
그에게 몽골의 미래를 위해 패배를 감수하라 하면 정말 홍왕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쉽사리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홍왕의 그릇이 바토르의 그릇에 비해 크다는 의미겠지.
과거의 바토르라면 이런 홍왕의 선택을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든 강함을 증명하는 쪽이 옳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리고 이 승부를 지켜보면서 결국 바토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강함이라는 것은 그저 육체에 머무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
패배하지 않는 육체.
그 육체를 움직이는 효율적인 이성.
그것만이 강함의 척도라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은 이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절대자가 모인 이곳에서는 그가 아는 상식이 붕괴한다. 결코 이길 수 없을 나약한 자가 승리하고, 결코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이가 미래를 위해 패배를 받아들인다.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적이라 할 수 있는 이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내놓고, 결코 섞일 수 없는 이들이 그 마지막을 인정한다.
그래.
이곳은 그가 알던 것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다.
바토르가 입술을 실룩였다.
뭔가 배 속에서 돌덩어리가 굴러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이 승부는 개인의 감정이 엮여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바토르.”
바토르의 고개가 뒤쪽으로 돌아간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강진호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겁이라도 먹었나?”
“…….”
바토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말조심해라, 주인. 나는 바토르다.”
“아니까 묻는 거다.”
“흥.”
평소라면 좀 더 으르렁대며 달려들었을 바토르가 지금은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안에 지금 풀 수 없는 의혹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이 전장은 육체의 강함만으로 이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음속에 손톱만 한 의혹이라도 있다면 결코 승리를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는다.
“주인, 나는…….”
뭔가 말을 하려던 바토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강진호가 슬쩍 쓰러져 있는 홍왕에게 시선을 주고는 바토르를 다시 바라보았다.
“너는 홍왕이 아니다.”
“…….”
바토르가 입술을 질끈 깨문다.
알고 있다.
그는 홍왕을 뛰어넘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해 왔지만, 단 한 번도 홍왕을 넘지 못했으니까.
바토르의 내면을 뒤흔든 건, 패배한 홍왕을 보고도 이전보다 더한 격차를 느껴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와 홍왕 사이에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쳐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진호가 바토르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굳이 홍왕이 될 필요도 없지.”
“뭐?”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답은 없다.”
“…….”
“그저 방식이 다른 것뿐이야. 홍왕의 강함과 너의 강함이 같을 이유는 없지.”
바토르가 뚫어져라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과정이 결과를 만드는 게 아니야.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하는 거지. 네 방식을 관철해서 네가 이기면…….”
강진호가 씹어뱉듯 말한다.
“네가 옳은 거다.”
“…….”
말없이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던 바토르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못 미더워 보였던 모양이군.”
찰칵.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인다.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멍청한 생각이 아니라!”
“그것부터 문제야.”
“……뭐?”
강진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을 필요는 없어. 네가 해온 건 네 몸에 이미 쌓여 있으니까.”
“…….”
“여긴 고민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야. 가서 증명해. 그거면 충분하니까.”
바토르의 눈가가 실룩였다.
“빌어먹을, 말은 잘하는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바토르가 몸을 빙글 돌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그 커다란 뒷모습을 보며 강진호가 낮게 웃을 때, 이현수가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회주님.”
“왜?”
“괜찮을까요?”
“뭐가?”
“바토르 님 말입니다. 이길 수 있을까요?”
“모르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강진호가 대답하자, 이현수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에서 누가 나올지도 안 정해졌는데, 무슨 수로 승패를 논하라는 거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현수가 살짝 머뭇거렸다. 강진호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자 강진호가 슬쩍 이현수를 보며 말했다.
“못 미더운 모양이로군.”
“아니, 그…….”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이현수가 결국 포기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왜?”
“이유라면…….”
뭐라 대답해야 할까.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니까. 그가 바토르에게 가진 감정은 불신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바토르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뭐랄까, 저는 바토르 님이 현실을 논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현실이라…….”
“이사님들 중에서 회주님이 이기겠다고 하는 사람은 바토르 님밖에 없으니까요. 아니, 꼭 그게 회주님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냉정하게 계산을 할 때 바토르 님은…….”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바토르 님이 이길 거라는 생각이 잘 안 듭니다. 무학을 잘 모르는 제가 주제넘게 할 말은 아니지만.”
초인들의 대결이다. 그 승패를 이현수가 논한다는 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적어도 이현수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이현수와는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주제넘지는 않아.”
“예?”
이현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강진호가 피식 웃어버렸다.
“본인도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까.”
“……본인요?”
“바토르가 이긴다는 걸 가장 못 믿는 이는 오히려 바토르란 거지.”
“…….”
“심지어 자신만을 위해 떼를 쓴 신창이 홍왕을 상대로 이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홍왕에게 벽을 느낄 만큼.”
“어…….”
“멍청하지.”
이현수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토르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거대한 등.
말도 안 되는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저 사람이 자신의 승리를 믿지 못한다고?
“하지만 바토르 님은…….”
이현수가 뭔가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도 느끼는 게 있던 것이다.
“후우.”
강진호가 느릿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느냐고 물었나?”
“……예.”
“다시 대답하지. 나도 몰라.”
강진호가 굳이 같은 대답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그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저 믿을 뿐이야, 이길 거라고.”
“…….”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태산처럼 굳건하게 선 그의 건너편으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