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46
#2045.
격렬하다 (5)
바토르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편다.
한 번 그럴 때마다 뿌듯하기 짝이 없는 힘이 차오른다. 언제나 힘과 강함에 집착해 온 그로서도 더없이 만족할 만한 힘이었다.
초인의 영역으로 접어들면서 그가 맹신해 오던 육체는 과거에 비해 작아졌지만, 그 안에 들어찬 힘과 육체의 단단함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아졌다.
하지만…….
‘그건 저자 역시 마찬가지겠지.’
바토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를 보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거대한 칼날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다. 딱히 내력을 끌어 올려 위협하는 게 아닌데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진다.
십이비도라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괴물들이었다.
하기야.
과거, 한때나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을 모조리 긁어모아왔으니 당연히 강하겠지.
하지만 예전이었다면 더없는 호승심을 느꼈을 바토르는 지금 이 순간 호승심보다는 암담함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거지?’
평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가 무학에 들인 노력은 총회는 물론이고, 세상 그 누구도 평가절하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강함에는 자부심을 가지지 못해도 스스로 해온 노력에는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사람이 바로 바토르였다. 하지만 그런 바토르이기에 지금 그가 느끼는 암담함과 절망감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홍왕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홍왕은 무인의 정점이자 언젠가 뛰어넘어야 할 목표였다. 너무도 드높아서 바라보다 목이 부러질 정도였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자신을 채찍질해 왔다.
노력하고, 그것만으로 부족하면 희생하고, 희생으로도 부족하면 타협하면서.
하지만…….
‘그런 홍왕도 패했다.’
과거, 그가 우러러보던 홍왕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진 홍왕조차 패했다. 그리고 그런 홍왕을 쓰러뜨린 이는 십이비도중 가장 강한 이도 아니었다.
그 절망과도 같은 벽, 그 벽을 또 아득하게 뛰어넘어 흑왕과 강진호가 존재한다.
“큭큭.”
바토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높은 산은 사람의 도전욕을 자극시키기 마련이지만, 너무도 높은 산은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법이다. 더구나 그 산이 계속 높아진다면?
처음의 의지를 끝없이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이건 누구도 지켜봐 주지 않는 등정이다.
산소조차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드높은 고산을 홀로 끝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 고행이라기보다는 학대에 가까운 등정. 그 등정을 끝도 없이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벅.
앞에 선 이가 칼날 같은 눈빛으로 바토르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서로 얽혀들었다.
“아쉽군.”
먼저 입을 연 것은 바토르가 아니었다.
“이런 둔해 빠진 놈이 내 상대라니.”
“…….”
바토르의 눈가가 일그러진다.
지금까지의 십이비도들은 그토록 강했음에도 나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자에게서 자신에 대한 존중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부동심조차 갖추지 못한 얼간이라……. 그나마 베는 맛은 있어 보이는 게 위안이로군.”
스르르릉.
사내가 도집에서 천천히 도를 뽑아 든다.
일반적인 도보다 두 치는 더 길고, 두 배는 더 두꺼운 대도(大刀). 섬뜩하게 벼려진 대도의 끝이 바토르를 겨누었다.
“나는 파황도귀(破荒刀鬼)라고 한다. 보통은 도귀라 불리지.”
“도귀라…….”
바토르의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이자를 설명하는 데 이 이상 어울리는 이름이 있겠는가.
그의 손에 들린 도만이 아니라, 그의 육신 모두가 날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느낌만으로 보면 이 빌어먹을 놈은 삼시세끼 밥이 아니라 날카로운 날을 씹어 먹으며 살아왔을 것 같지 않은가.
겨누어진 칼이 지금이라도 당장 그의 목을 갈라 버릴 것만 같았다.
“바토르. 나는 푸른 늑대의 후예, 바토르다.”
“흐음.”
도귀의 눈이 바토르의 육체에 가닿는다. 의복으로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 육체의 강건함은 숨길 수 없었다.
“제 몸뚱아리에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로군.”
“네가 네 칼에 가진 자신보다는.”
“그럼 그게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려주면 되겠군. 대가는 네 목숨이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바토르가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도귀를 노려본다. 하지만 도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살짝 자세를 낮추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 바토르가 자세를 잡는다.
아니.
사실은 조금은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상대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저렇게 극단적으로 알기 쉬운 이는 찾아보기 어려울 테니까. 그가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아직 혼란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벌고 싶어서였겠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적은 그의 만전을 기다려 줄 이유가 없는 법.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잡념을 떨치며 바토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파아아앙!
대기가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붉은 도기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바토르를 향해 날아든다.
카가각!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날아든 도기가 바토르의 가슴에 적중했다. 쇠와 쇠를 긁어 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기가 바토르의 가슴에 선명한 붉은 선을 그어낸다.
“…….”
바토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한다. 그의 육체, 그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는 그의 육체가 붉게 달아올라 있다.
지금의 육체에 상흔이 남았다는 건, 그가 초인이 되기 전의 육체라면 저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갈라졌을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토르를 놀라게 한 것은 그 도기에 실려 있는 위력이 아니라 어마어마하다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속도였다.
‘반응도 하지 못했다.’
바토르를 잘 모르는 이라면 그의 외양만을 보고 둔중하다고 착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토르를 아는 이라면 그가 결코 속도라는 영역에서 뒤처지는 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바토르가 날아오는 검기에 손조차 뻗어내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기습과 같은 공격이라고는 하지만, 설사 기습이 아니었다고 해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베이지 않는다라…….”
도귀가 입가를 비틀었다.
“내 도를 맞고도 멀쩡한 놈을 보는 건 처음이로군. 그 몸 하나는 내 생에 본 어떤 이보다 단단하다. 그건 인정하지.”
“이놈이…….”
“하지만 그래봤자다.”
도귀의 도에서 불타는 듯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떠한 방패도 결국은 뚫리는 법이지. 내 도를 막아내기에 그 육체는 충분히 단단하지 못한 것 같군.”
바토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은 살았구나.”
도귀가 그 말을 듣고는 악귀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보면 알겠지.”
그와 동시에 도귀의 도가 맹렬하게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일도, 일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 도의 끝에서 타오르는 듯한 참격이 뿜어진다.
일순 날아든 수십 개의 도기(刀氣)가 남김없이 바토르의 몸을 파고들었다.
카각! 카가각!
쇠로 쇠를 내려치고 긁어 대는 듯한 소음. 바토르의 몸에 닿은 도기들이 그의 육체를 긁어 댄다.
파앗! 파앗!
“큭!”
바토르가 그 기운에 담긴 역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몸 곳곳에 마치 채찍으로 후려갈긴 듯한 시뻘건 핏줄기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십이비도는 도귀의 공격을 맞고도 그저 상처만 입는 바토르의 육체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총회 측은 너무도 쉽게 바토르의 육체에 상흔을 남기는 저 참격의 날카로움에 혀를 내둘렀다.
모순(矛盾).
여기에 모순이 있다. 무엇이든 갈라내는 도와 무엇이든 막아낼 수 있는 육체.
완벽하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온 두 무학이 전력을 다해 부딪치기 시작한다.
“큭!”
바토르가 바닥을 내밟았다.
‘뭔 기운이!’
한 번, 한 번 얻어맞을 때마다 몸이 갈라지는 것만 같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베어내는 것에 극단적으로 치중된 무학이라 격중당해도 충격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건 바토르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건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육체가 베여 패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지금껏 바토르가 해온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일이니까.
콰드드득!
그 순간, 날아든 도기가 바토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촤아아악!
그의 몸을 뚫지 못하고 거걱대던 도기가 일순 그의 피부를 갈라냈다. 베인 옆구리에서 핏방울이 방울방울져 흘러내린다.
“흐음.”
도귀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군. 외공을 전문적으로 익힌 소림의 무승도 내 도를 맨몸으로 받아내지는 못했는데. 외공으로는 고금제일의 영역에 올랐다는 건가?”
바토르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저 여유를 잃지 않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벽을 넘으며 더없이 차분해진 이성을 뛰어넘어 머리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꽤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바토르의 두 눈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그의 거대한 육체가 지옥의 악귀처럼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재수 없는 주둥아리에서 비명 소리가 나오게 해주지.”
쾅!
바토르가 바닥을 박차며 도귀를 향해 날아들었다.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만큼 가공할 속도. 결국 속도란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 거대한 육체로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헛?”
헛바람을 집어삼킨 도귀가 반사적으로 도를 내리긋는다. 그의 도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불타오르며 바토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각!
하지만 이전보다 배는 더 큰 기운이 덮쳐 들었건만, 그 참격은 바토르의 육체를 갈라내지 못했다. 붉게 물든 육체와 부딪친 기운이 산산조각 나 비산한다.
‘뭐?’
도귀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노오오오옴!”
거리를 격하고 단숨에 날아든 바토르의 거대한 팔이 도귀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콰아아아아아앙!
도귀가 몸을 빼내기 무섭게 바닥을 내리찍은 주먹이 단단하기 짝이 없는 강화 콘크리트를 두부처럼 으스러뜨린다.
당연히 피할 줄 알았다는 듯 도귀를 뒤쫓아 달린 바토르가 다시 주먹을 내려친다.
콰앙!
콰아아앙!
연이어 내려쳐진 주먹에 얻어맞은 바닥이 마치 유리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조각조각 갈라져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놈!”
파아아아앗!
뒤로 물러나던 도귀의 도가 빛살을 내뿜는다. 강렬한 도기가 바토르의 몸을 후려친다. 하지만 바토르는 방어를 도외시한 채 도귀에게 달려들어 팔을 휘둘러 댔다.
도귀가 반사적으로 도를 들어 올리고, 바토르의 팔이 그런 도귀를 칼째 후려쳐 날린다.
콰아앙!
도귀의 몸이 미사일처럼 튕겨 나간다.
쿠우우웅!
바닥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사람을 쳐 날려 벽에 박아 넣어 버린 바토르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천천히 제 팔을 들어 올렸다.
주르륵.
길게 갈라진 팔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흥.”
바토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도귀가 박혀든 검은 구멍을 노려보았다.
“이…….”
그곳에서 흉신악살 같은 얼굴을 한 도귀가 가공할 기세를 흘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놈……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쥐새끼 같은 놈!”
두 사람의 살의가 공동을 검게 물들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