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49
#2048.
맹렬하다 (3)
입에서 단내가 난다.
휘두르는 팔이 더없이 무겁다.
언제든 그에게 지치지 않는 활력을 가져다주던 그의 육체가 물 먹인 솜처럼 무겁기만 하다.
그극.
관절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다. 마치 윤활유가 말라 버린 채 방치된 오래된 기계처럼 몸을 움직일 때마다 덜컥대고 마찰하는 느낌이 난다.
‘피를 너무 흘렸나…….’
아직 눈은 흐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가 머릿속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느낌이다.
심지어 그 느린 처리마저 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한 타이밍 늦게 몸이 움직인다.
아마 이것 역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때문이겠지. 무학이 아무리 상식을 벗어나는 힘을 가졌다고는 해도 뇌를 돌리는 데는 피가 필요하니까.
그의 육체.
그의 모든 자신감의 근원이자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체가 붕괴하고 있다. 그의 강건함이 점점 더 무너지고 있었다.
카가가각!
또 한 번의 검격이 그의 허벅지를 가르고 지나간다.
일격에 무너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검격들은 한 번, 한 번 착실하게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커다란 제방이 작은 구멍 하나부터 무너지듯이, 튼튼하게 쌓아 올린 탑이 실선 같은 균열이 모여 붕괴를 일으키듯 말이다.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육체에 거미줄처럼 가로그어진 상처들이 전해 오는 고통도, 몸 안으로 파고든 기운들이 기혈을 불태우는 고통들도 모조리 버텨낼 수 없다.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조금씩 무너지는 그의 육체였다. 더는 완전할 수 없는, 더는 철탑 같을 수 없는 육체.
아니, 아니겠지.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의 정신. 육체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과 굳건한 신앙일 터.
‘대단하군.’
온몸의 모세혈관이 모조리 터져 붉다 못해 검게 물든 도귀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그에게 도격을 날려 대고 있다.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그와 힘으로 맞설 수 있는 이를 정면에서 상대해 본 적은 있지만, 그의 힘으로 맞상대 할 수 없는 이가 감히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들어 칼을 그어 대는 경험을 해볼 날이 올 줄이야.
저 위험천만한 곡예.
신경을 바늘로 긁어 대는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도를 휘두른다.
자신의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설사 단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참상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바토르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의 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 도귀 역시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임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큭.”
웃음이 난다.
이토록 몸에 남은 수분 한 방울까지 모조리 짜내는 싸움을 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나는 말뿐이었지.’
노력해 왔다. 언제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바토르는 알고 있었다. 세상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강진호와 싸우고 패배한 이후.
그는 끊임없이 도전했다. 더 강한 상대와 싸우기 위해.
하지만 반면 그는 조금도 도전하지 않았다. 지금껏 그가 싸운 상대는 언제나 패배한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상대들이었으니까.
강진호, 그리고 홍왕.
그들과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한 것은 그저 노력뿐이었다.
맹세할 수 있다.
그는 단 한순간도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그의 모든 것을 짜내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패배해도 되는 노력 따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보상받지 못해도 상관없는 연습 같은 게 가치가 있을 리가 있나.
기어코 바토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패배한들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말은, 끊임없이 패배한다 해도 상관없다는 말임을. 그건 포기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건 저열하기 짝이 없는 자기만족. 스스로를 속이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의 눈앞에 있다.
완전한 승리,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은 전사가.
사람의 표정에 맹렬하다는 말을 붙이는 게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도귀의 얼굴은 그 말이 아니고서야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넣은 이가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도를 휘둘러 댄다.
‘즐거워 보이는군.’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그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르겠다.
종이 한 장의 싸움. 말 그대로 백척간두에 목숨을 걸고 서서 칼춤을 추고 있는 이가 즐거워 보인다니.
하지만…….
다른 이는 몰라도 적어도 도귀만큼은 그런 그의 말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즐겁겠지.’
평생 동안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달려왔다. 그들이 얻은 힘이라면 언제든 재력과 권력을 손에 넣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쾌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음에도, 고행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수련에 온몸을 던지고 오직 한 가지만을 바라왔다.
그렇게 손에 넣은 힘.
그렇게 손에 넣은 능력.
그 모든 것을 모조리 사용해 싸울 수 있는 상대를 만났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애초에 우린 그런 족속이니까.’
이 순간이 아니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없다. 전투가 아니면, 그 전투를 통해 스스로의 강함과 스스로의 신념을 확인하지 못한다면, 그의 세상은 무채색의 모노톤으로 빛이 바랠 뿐이다.
카가가가각!
그리고…….
바토르의 대흉근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가슴을 가르고 지나간 도격에 살이 쩍 벌어지고 뼈가 끊어지는 순간, 뭐라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전신에 휘몰아친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그가 살아 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이자, 그의 육체가 여전히 그를 지켜내고 있다는 확인이었다.
“오오오오오오!”
바토르가 진각을 내밟으며 팔을 휘두른다. 그 팔이 만들어내는 가공할 압력이 도귀의 피부를 짓눌러 터뜨린다.
스치지도 않았는데 도귀의 어깨 어림 살이 터지며 피가 솟구친다.
이미 한계다.
그도, 도귀도.
그러니!
바토르의 두 눈이 시뻘건 광망을 토해낸다.
‘이제 결판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를 끌어당겨 회수한 도귀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너무도 완벽하게. 그리고 그 모습을 두 눈에 담는 순간 바토르의 세상에 일순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건…….’
그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광경이었다.
물처럼 유연하게, 하지만 폭풍처럼 강렬하게.
느릿하게 회전한 도귀의 발끝이 바닥을 움켜쥐듯 파고드는 모습이 똑똑히 들어온다. 그 발끝에서 시작된 힘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 무릎에서 튕겨지고, 이내 가공할 탄력으로 허리를 스프링처럼 휘감는다.
한 올, 또 한 올.
전신의 모든 힘이, 전신의 모든 내력이 가슴을 타고 팔로 전해지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마치 바토르가 저 도귀의 육체를 관조하듯 말이다.
그 순간, 바토르는 이해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아마 도귀는 제 일생을 통틀어 다시없을 일격을 날리고 있다. 아마 그 스스로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알지 못하겠지만, 도귀를 상대하는 바토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 하나를 의미한다.
모든 힘을 끌어모은 도귀의 칼이 환상 같은 호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점점 더 느려지는 세상은 그 칼을 마치 멈춘 듯 보이게 만들고,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그 칼의 끝이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있게 했다.
‘목.’
저 검에 실린 예기는 전에 없이 날카롭다.
바토르라는 거대한 숫돌에 끊임없이 갈아대 날을 세운 칼은 이제 드디어 바토르를 베어낼 수 있는 날카로움을 손에 넣었다.
어쩌면…… 저 칼이야말로 바토르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칼’이라 불릴 수 있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칼이라는 말이 무언가를 자르기 위해 존재하는 날붙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바토르에게는 오직 저 도귀에 손에 들려 있을 때의 저 칼만이 칼이라 불릴 수 있다.
저 칼, 지금 이 순간, 도귀의 손에 들린 저 칼은 그의 목을 베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바토르는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에 직면했다.
두려움.
그래. 그건 두려움이었다.
거대한 칼이 목을 향해 전력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았을 때, 평범한 사람이 당연하게 느끼는 두려움. 하지만 그건 바토르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감정이었다.
두려워해본 적이 없으니까.
일격에 자신의 목을 날릴 수 있는 무언가라는 건 바토르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칼이 자신의 목을 베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단 한 번도 없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렵다.
저 날이 그의 목으로 날아드는 것이 무섭다. 저 칼이 그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려 버리고, 그의 육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버릴까 봐 너무도 무섭다.
죽음도 분명 두렵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가 믿는 모든 것의 부정이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던 바토르의 발이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저 도는 그의 목을 가르고 잘라낼 것이다. 그의 육체를 산산이 파괴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느려진 세상에서 저 도가 그의 목에 닿기까지, 그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가능한 움직임은 겨우 한 뼘 정도뿐.
하지만 바토르는 알고 있다.
물러선다면?
단 한 걸음만 물러선다면?
그렇다며 저 도는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남은 모든 힘을 짜내 도격을 날린 도귀에게는 더 이상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쉬운 승리가 그에게 주어진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그래. 회피란 결코 비겁이 아니다. 상대의 공격을 정면을 맞받는 것이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는 이미 내면의 자신, 과거의 자신과 직면하지 않았던가. 그가 원한 것은 승리이고, 또 무학의 경지를 이룩하는 것이지, 이 빌어먹을 몸뚱아리가 세상 가장 단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단 한 발.
한 발만 뒤로 물러나면 된다. 단 한 발만! 그것만으로 그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승리의 영광, 그에게 주어진 의무, 스스로에 대한 증명, 그리고 또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까지.
홍왕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던가. 지금 그에게 완전한 승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자신이 결코 물러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남은 힘을 모조리 짜내 마지막 일격에 밀어 넣은 저 머저리 덕분에!
전투란 결국 서로를 속이고 속이는 것.
이 한 걸음의 물러남은 그야말로 정당하다. 아니, 무인에게는 더없이 완벽한 자세다. 스스로 무인이라 자인하는 자는 적의 공격을 피해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 그저 한 걸음.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단 한 걸음이다. 한 걸음, 그저 한 걸음.
그저 물러나기만 하면…….
바토르의 입이 그 순간 살짝 벌어진다. 피에 젖은 그의 이가 드러나며 바토르가 비틀린 웃음을 그 얼굴에 담았다.
‘나는…….’
그래. 나는 바토르.
‘얼간이다, 이 개자식들아!’
바토르가 자신의 목을 베어오는 도를 향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줄기 빛살로 화한 도귀의 최후의 일격이 자신을 향해 다가선 바토르의 목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