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52
#2051.
버텨내다 (1)
흑왕이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도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귀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흑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그에게는 흑왕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표정을 짓는 것조차 버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쏟아낸 뒤였으니까.
말없이 도귀를 바라보던 흑왕이 무언가를 물어보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딱히 탓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승부 자체를 쉽게 보고 실수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지만, 도귀는 이 승부에 더없이 진지하게 임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누구보다 가장 진지하게.
하지만…….
‘조금 더 영악했다면 쉽게 이겼을지도 모를 승부를 내던진 것 역시 사실이지.’
거리를 두고 장기전으로 끌고 갔더라면 승리한 자는 도귀였을 것이다. 반드시 상대를 베어내 승리하겠다는 고집을 부린 것은 과연 죄인가, 죄가 아닌가.
차마 그 고민의 답을 내놓지 못한 흑왕의 귓가에 백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놈이니 적당히 뒤로 치워 버리시지요.”
“…….”
흑왕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제 삼 대 삼 아닙니까. 저와 저 실잡이 놈이 연속으로 이기기만 하면 다 끝납니다. 제 몸 하나 지탱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대고 있는 놈을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흑왕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답지 않은 말이로군. 패자에게 건네는 관용이라는 건가?”
“그럴 리가요.”
백연홍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도귀를 바라보았다.
“패자에게는 어떠한 동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길 방법이 있는데도 패배를 자처한 놈은 더없는 멍청이죠.”
“그런데?”
“하지만…….”
백연홍이 뭔가 정리가 잘 안 된다는 얼굴을 하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다 똑똑한 놈만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
“때로는 저런 놈도 필요한 법이지요. 멍청하지만…… 멍청하지만은 않은.”
사실 백연홍 스스로도 그가 왜 도귀를 옹호해 주고 있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찾기는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도귀의 승부를 보고 그의 피가 끓어올랐다는 것이다.
“하나는 이해했습니다.”
“그게 뭐지?”
“저도 흑왕도 결국은 무인이라는 거지요.”
“…….”
그 말을 들은 흑왕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연홍이 고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아무리 대의를 좇는 이라고 한들, 결국 그 본질은 무인입니다. 그런데 무인이 모든 것을 걸고 벌인 승부를 결과만으로 단죄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
“저희가 군인이었다면 그 목을 내놓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무인입니다.”
흑왕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인이라…….”
딱히 공감이 가지 않는 소리다.
개인의 성향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진짜 대의 앞에서는 개인이란 너무도 작은 것일 뿐이다.
자아 따위야 목적을 이루고 나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감안해 주다 보면 결국은 목적이 흐려지는 법이지.’
흑왕이 결심을 굳힌 바로 그때였다.
털썩.
“…….”
버티고 또 버티던 도귀가 결국은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앞으로 엎어진 도귀의 모습을 바라보던 흑왕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라면 목을 잘라도 편히 갈 것 같습니다만…….”
흑왕이 짜증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벌이라는 건 받는 이가 인식을 해야 의미가 있는 법이다.”
제가 벌을 받는지도 모르고 죽게 만드는 건 흑왕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완전히 탈진해 버린 도귀를 깨울 방법은 지금의 흑왕에게조차 없었다. 어설프게 의식을 차리게 만들려는 순간, 바로 죽어버릴 테니까.
“……끌고 가 치료해 줘라. 죄는 깨어난 뒤에 묻겠다.”
“여하튼 모진 분은 못 되신다니까.”
낄낄대는 백연홍의 웃음소리가 거슬린다. 하지만 흑왕은 그 웃음소리를 무시하고는 가라앉은 눈으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예상외로군.’
그가 이 승부를 통해 달성하려 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점적인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이 승부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똑똑히 알리는 것.
때로는 호의와 규범이 평화를 유지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흑왕이 생각하는 평화를 위한 가장 완벽한 동력은 바로 공포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이 승부를 지켜보는 것이 무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만, 그건 흑왕에게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 평범한 시민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않는 이였으니까. 이 승부는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세상의 진정한 주인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건 분명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흑왕의 처음 계획보다 더욱 완벽하게. 일방적인 승부는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예상을 벗어나 대등하게 이루어진 승부는 저들에게 무인이 어떤 존재인지 완벽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글자로 작성된 보고서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광경의 차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확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결과가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이 승부에서 이기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의 목적은 이 승부 이후에 주어질 무인계의 대표성을 활용하여 무인들을 완벽하게 이끄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다른 무인들조차 감히 그들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를.
“공령.”
“예, 흑왕.”
“장난은 이제 됐어.”
“…….”
“패배는 더는 용납하지 않는다.”
공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몸을 돌린 공령이 담백하게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상태는?”
“위중합니다.”
“…….”
그리 이상하지 않은 말이었다.
아니, 차라리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목이 반쯤 잘려 나간 사람이 위중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말이지. 사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아니, 웬만한 초인이라고 해도 저만한 상처를 입었으면 죽는 게 예의다.
그럼에도 이 말이 더없이 어색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 위중한 상태에 처한 이가 다름 아닌 바토르이기 때문이다.
“일단 더 악화되지는 않고 있지만…… 평소라면 벌써 회복이 시작되고도 남았을 사람인데, 차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립니까?”
“…….”
“이, 이사님!”
위긴스가 대답을 망설이자, 방진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최악의 상황이야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기력을 많이 소진했어. 말 그대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끌어낸 모양이군.”
“…….”
그 말이 이 격전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하기야.
지켜보는 이들이 먼저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전투였다. 그런데 직접 그 승부를 겪은 이들의 대미지야 오죽하겠는가.
“둔해 빠진 놈이.”
장민이 그런 바토르를 보며 혀를 찼다.
“내버려 둬. 힘을 뺐다고 죽을 정도로 섬세한 놈이 아니니까.”
“자, 장로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안 죽을 테니까.”
장민이 심드렁한 얼굴로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를 꽤 보았지만, 살아남는 놈들은 공통점이 있더군.”
“공통점이요?”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할 것.”
“…….”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죽일 수 있는 상대를 살려주면서까지 다음을 기약했는데 죽을 리가 없지. 염왕의 머리를 후려쳐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날 놈이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장민이 쓰러진 바토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만 앞서지 마지막에 약한 놈이라 생각했거늘, 오늘 바토르는 분명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아마 의식을 되찾기만 하면 과거보다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만…….
“마존이시여.”
장민이 몸을 돌려 강진호를 바라본 뒤, 그 자리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마의 종주시여, 미천한 자가 감히 마존의 칼이 되기를 기원하나이다. 저에게 명하시옵소서. 감히 마존께 대항하여 그 이를 드러낸 자들에게 합당하고도 온전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나이다.”
강진호가 말없이 빤히 장민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장민을 바라본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민.”
“예, 마존이시여.”
“교에 대한 건 잊어.”
“…….”
“평생을 교를 위해 살았잖아. 이제는 그만 놓을 때도 됐어.”
“속하가 어찌…….”
“한 번쯤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장민이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멍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던 장민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어렸다.
“마존께서 명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명령이 아니야. 권유지.”
“그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못 말린다는 듯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기고 돌아와.”
“명을 받듭니다.”
장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중앙을 향해 걸어 나간다.
마교의 대장로.
그리고 강진호의 가장 신실한 종복.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더없이 믿음직스러운 동시에 때때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존재. 너무도 다른 시간을 살아왔기에 친근함과 동시에 낯섦을 느끼게 만드는 이.
그런 장민을 수식하는 어떤 표현에도 장민이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로님에게서 마교와 회주님을 뺀다면 대체 뭐가 남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뭔가…….
‘나는 저렇게 살 자신이 없네.’
이현수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강진호와 총회를 자신의 안위 이상으로 위하게 되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언젠가 그와 총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과거처럼 당연하게 스스로를 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 있을까?’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도…….
지금 그가 총회를 위하는 마음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을까?
강진호가 그 모습을 감추고, 총회에서 함께 숨 쉬고, 땀 흘리고, 기뻐하고, 슬퍼하던 이들이 모두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때도 총회를 지금과 같이 여기고 살 수 있을까?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그럴 자신이 없다. 아니, 그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하나, 장민만이 그런 삶을 살아왔다. 대체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이현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번은 보고 싶군.’
저 노인답지 않은 이가 스스로를 얽매고 있는 굴레를 모조리 벗어던졌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저벅저벅.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단 한 번도 밀어낸 적 없는 이가 마침내 그 발을 멈추고 교의 적을 바라본다.
“나는…….”
공령이 입을 열려 하는 순간, 지옥에서 흘러나온 듯한 장민의 목소리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네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배교자의 개여.”
“…….”
“네놈을 천참만륙 내 감히 마존께 이를 드러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장민의 전신에서 폭풍 같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