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67
#2066.
수긍하다 (1)
태초에 존재한 것은 그저 혼돈이었다.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一元]로 존재했다.
하지만 또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無極].
태초에 하나이니 일원(一元)이되, 그 하나가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니 그저 무극(無極)일 뿐이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빛이되 어둠이며, 살아 있으되 죽어 있다.
모든 것을 갖춘 완전함이란 결국 그저 무(無)에 불과한 것. 천지만물은 결국 나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그러니 무극은 결코 시작일 수 없다.
시작은 태극.
완전함[圓]의 사이를 그어낸 하나의 선(線)이라.
그 선이 존재하는 순간, 하나인 것이 둘로 나뉘고, 마침내 ‘무언가’가 된다.
빛과 어둠이 나뉘어 의미를 가진다.
음과 양이 나뉘어 세상 만물을 만들어낸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생겨나고, 오행의 이치가 생명을 존재케 한다.
그렇기에 태극은 모든 것의 시작.
또한 나뉘어 맞물려 도는 모든 현상의 진의(眞意).
세상 모든 것은 태극으로 시작하여 음양의 이치를 따라 흐르고, 마침내는 끝에 이른다.
하지만 끝이란 시작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 끝은 시작을 만들어내고, 시작은 다시 끝을 만들어내니, 태극은 태극에서 시작하여 다시 태극에서 끝을 맺는다.
결국 모든 것이 태극이라.
검음은 흼을 쫓고, 흼은 검음을 쫓아 영원히 순환하고 또 순환하니…….
백연홍의 검이 하늘로 향한다.
뇌격이 쏟아진다.
세상을 불태우고 찢어낼 것만 같은 그 가공할 뇌전의 앞을 가로막기에 한낱 쇠붙이에 불과한 검은 너무도 나약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그 검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담담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뇌격에 맞섰다.
‘태극.’
그래, 태극이다.
수많은 세월, 그의 선인들이 이 검으로 그려내고자 한 것. 검을 넘어 마침내 닿고자 한 것.
그건 그저 태극이리라.
이상하지 않다.
그의 검이 태극에서 시작한 것도.
그리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태극을 잊은 것도.
그리고…….
이제야 그 태극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도, 그 무엇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의 모든 흐름은 제각각 다르되, 무엇 하나 태극에 어긋남이 없으니까.
‘태극에 이르려 한다?’
아니. 그게 아니다.
그건 물이 물이고자 하는 노력, 나무가 나무이고자 하는 노력.
태극에는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깨닫는 것이면 충분하다.
기억하라.
세상 만물이 태극의 원리 안에 존재한다면…….
‘이 한낱 검끝에도.’
백연홍의 검이 천천히 원을 그려낸다.
시간과 시간을 잇는 경계를 그어내고, 공간과 공간을 잇는 경계를 잘라내는 완벽한 원을.
“태극은 머물러 있으리라.”
콰르르르르르르릉!
수십 줄기의 벼락이 일시에 백연홍을 향해 쏟아진다.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일 만큼 강렬한 섬광의 폭발.
하지만 백연홍의 검끝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흐르는 물처럼 그저 흘러갔다.
콰르르르릉!
하나의 뇌전이 검이 그려낸 원을 타고 옆으로 비껴 나간다.
콰르르르르릉!
또 하나의 뇌전이 본디 뇌전이 그려야 할 격한 선을 그리며 바닥에 내리꽂힌다.
중앙으로 떨어진 뇌전은 백연홍의 검과 어우러지며 허공이라는 화폭에 선명한 그림을 그려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수십 줄기의 뇌전이 어느 하나 벗어남 없이 모조리 바닥으로 강렬하게 내리꽂힌다.
하지만…….
그 수십의 뇌전 중 어느 하나조차 백연홍의 몸에 닿지 못했다.
잘라낸 것이 아니다. 밀쳐 낸 것도 아니다.
수십 줄기의 뇌전 중 어느 하나 부자연스러운 변화를 보인 것은 없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부터 백연홍이 있는 곳을 향하지 않았다는 듯, 그가 있는 곳을 자연스레 비껴 바닥으로 떨어진다.
스륵.
이윽고 백연홍의 검이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졌을 때.
세상을 부술 듯 쏟아지던 벼락의 비는 이미 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파직! 파지지지직!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강렬한 스파크만이, 그 뇌전이 결코 환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위긴스가 할 말을 잃고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검은 바닥. 어마어마한 뇌전의 힘을 버텨내지 못해 검게 타들어간 콘크리트 바닥 위에 백연홍이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뇌력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해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그만이 홀로 동떨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그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의 마법은 완벽했다. 캐스팅을 끝마쳐 뇌전이 떨어진 이상, 설사 강진호라 해도 아무런 피해 없이 이 공격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할 만큼.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모든 벼락을 제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그가 아는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이…….”
위긴스가 다시 발작적으로 룬검을 내려쳤다.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뇌운이 다시 세 줄기의 벼락을 만들어내 백연홍을 향해 쏘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 위긴스는 분명히 보았다.
뇌전이 떨어지는 그 극한에 가까운 짧은 순간.
여유롭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휘둘러진 백연홍의 검끝을 따라, 뇌전이 그 방향을 틀어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말이다.
콰르르르르르릉!
이어 터져 나온 우레 소리가 위긴스의 귀를 강하게 후려쳤다.
스슥.
천천히 검을 갈무리한 백연홍이 시선을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한낱 인간이라 했나?”
위긴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더는 조롱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분명 백연홍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위긴스가 보여준 검격은 분명 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이 맞지.”
하지만 뒤이어 나온 백연홍의 말은 위긴스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래, 그렇지. 나는 그저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잊었던 모양이네.”
백연홍이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잊지 않아야 했던 것을.”
“…….”
그 순간, 백연홍이 검을 잡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파지지지직!
그의 팔에서 커다란 스파크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이내 새하얀 증기를 뿜어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팔이 다시금 검게 물들어간다. 마치 숯처럼 새까맣게.
“……알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었지. 그래, 그랬지.”
검을 잡은 팔이 거의 타버렸음에도 백연홍의 얼굴에는 고통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초연한 듯 담담한 얼굴로 위긴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
위긴스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부족해.’
저 팔은 여전히 검을 잡고 있다. 그렇다는 건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뜻. 그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공격으로 얻어낸 성과로는 너무도 부족했다.
그가 백연홍에게 입힌 부상보다, 그 스스로 소모한 것이 더 크니까.
투두둑.
백연홍의 손에서 숯이 되어버린 피부가 떨어져 내린다. 딱히 감흥 없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백연홍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담담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온다.
“나는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지. 부족하고, 모자라고, 모난.”
“…….”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지.”
“뭘?”
위긴스가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리고 백연홍은 친절히 그 말이 대답을 해 주었다.
“인간인 이상 자네의 공격을 벗어날 수 없겠지. 자네들의 세상은 인간을 궁구하고 탐구하니까.”
그들의 철학은 인간을 논한다. 인간을 파악하고, 인간을 사색한다.
인간을 더 잘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
“하지만…….”
백연홍이 고개를 저었다.
“나의 선인들은 아니었지.”
“…….”
“나의 선인들은 그저 극복하길 원했을 뿐이네.”
모자란 것이 있다 해서 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업보가 있다 해서 해탈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현상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추구해 결국 어디에 이르느냐다.
“그게 그대와 나의 다른 점이겠지.”
위긴스가 백연홍을 빤히 바라보았다.
“쿡.”
그러고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려냈다.
그 웃음을 본 백연홍이 가만히 물었다.
“무엇이 우스운가?”
“아니. 그저…….”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미친놈이 따로 없이 날뛰던 이가 갑자기 대단한 이라도 된 양 말해 대는 것이 조금 역겨워서 실례를 했습니다.”
“…….”
“미안하지만, 그쪽의 뜬구름 잡는 철학 타령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확실한 건 그저 그쪽이 전보다 확연히 강해졌다는 것과 그 팔에 입은 부상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사실뿐.”
백연홍이 투명한 눈빛으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위긴스 역시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런 백연홍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진리를 논하고 싶다면, 한 가지 진리를 알려 드리죠.”
“경청하지.”
“살아 있는 건 결국은 죽습니다.”
“…….”
“그건 살아 있는 건 무엇이든 죽일 수 있다는 말도 되겠죠. 그게 신선이든 부처든, 혹은 신이라고 해도.”
“…….”
“당신이 무엇을 깨달았든 그건 상관 없습니다. 설령 동양의 전설대로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신선이든 악마든 육체를 가진 이라면…….”
파직!
부서진 전지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위긴스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음 수로 반드시 죽일 수 있을 테니까.”
“…….”
백연홍이 말없이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과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지금 그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 역시 그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서로가 증명해야겠군.”
“물론.”
위긴스와 백연홍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백연홍은 묘한 모순을 느꼈다.
저들은 사람을 궁구하지만, 저들의 무학은 자연을 닮아 있다.
그들은 자연을 궁구하지만, 그들의 무학은 사람의 손끝을 통하지 않고는 시작하지 못한다.
다른 듯 닮아 있다. 마치 음과 양처럼.
백연홍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미동도 없이 지켜보고 있는 흑왕의 모습이 들어온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그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흑왕이여.’
어쩌면…….
무인들의 미래를 열어준다는 것도, 이끌어 나간다는 것도…….
그저 그들의 오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걸어야 할 길에서 벗어난 백연홍도 결국은 자신의 길을 되찾았듯, 굽이치고 굽이치면서도 물은 결국 바다를 향해 흐르는 법.
그것이 순리일진대.
억지로 물길을 뒤틀고 둑을 쌓아 막는다고 한들 영원히 흐르는 물을 잡아둘 수는 없는 법이다.
‘우습군.’
그래도 도인이라는 자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다니…….
백연홍의 시선이 위긴스를 넘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한 번쯤은…….’
백연홍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대화를 나눠볼 걸 그랬군.”
검을 잡은 백연홍이 천천히 위긴스를 향해 걸어 나갔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를 그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