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69
#2068.
수긍하다 (3)
빨려 들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검.
마치 백색의 종이 위를 누비는 붓과도 같은 검이 그려내는, 그 유려하기 짝이 없는 선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괴이하다.
분명 저 검은 그 무엇보다 위험할 터.
무명 검수의 손에 들린 검조차 휘둘러지는 것만으로 더없이 위험할 텐데, 백연홍의 손에 들린 검의 위험성을 입으로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그 검을 바라보는 이 중 누구도 그 검을 위험하다 느끼지 못했다.
그저 유려하다.
어미가 제 아이를 쓰다듬는 손길처럼.
그저 따뜻하기만 하다.
‘풀 냄새…….’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방금 분명 풀 냄새를 맡은 것만 같다. 이 깊고 깊은 지하, 콘크리트 덩어리로 둘러싸인 곳 어디에도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건만.
이슬에 젖은 풀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한다.
‘검이란 이런 건가?’
그에게 저 검에 담긴 경지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눈앞의 검이 지금까지 그가 보아 온 검과는 분명 무언가 다르다는 것.
수많은 격전을 보았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무학의 극에 도달한 이들이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의지마저 뽑아내 최고의 승부를 펼치는 광경을 몇 번이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저 검은 다르다.
한때는 비웃던 말.
검으로 수양을 쌓아 도에 이른다는 말.
사람을 죽이는 검을 휘둘러 도를 쌓는다는 그 상종 못할 논리를 얼마나 비웃었던가. 하지만 이 광경을 본 순간, 이현수는 더 이상 그 말을 비웃을 수 없게 되었다.
사아악.
발끝이 딱딱한 콘크리트를 가볍게 스친다.
마치 손끝이 비단을 누비는 듯한 소리와 함께.
원(圓).
발이 그리는 궤적은 원을 닮아 있다. 어깨가 그리는 궤적 역시 둥글고, 검이 그려내는 원은 부드럽게 사위를 감싼다.
둥글게, 또 둥글게.
원이란 모나지 않음.
그 어떤 것도 상처 입히지 않고, 어떤 것도 밀어내지 않는, 모든 것을 감싸는 완전(完全)의 형상.
백연홍이 취한 듯 검을 휘둘렀다.
스슥.
공간을 격해 나타난 위긴스의 옆구리를 검의 끝이 스쳐 지나간다.
파앗!
단순히 긁듯 스친 것뿐이건만, 위긴스의 옆구리가 쩌억 갈라지며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뭐냐?’
위긴스가 다시 공간을 격해 이동하며 제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붙였다. 흰빛이 쏟아지며 벌어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한다.
치료와 이동을 병행하는 것은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지금 그는 마력 전지를 통해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수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걱!
어깨가 다시 베여 나간다.
상처를 수복하는 속도가 상처가 생겨나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그 역시 인간이 펼쳐 낼 수 있는 마법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황이건만, 저 검은 그런 그조차 평범한 인간으로 추락시키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완벽히 피해냈다고 생각한 순간, 검이 그의 몸을 베어낸다. 시각, 청각, 촉각, 그 어떤 감각도 완벽을 외치는 순간, 저 검은 그가 가진 감각을 완벽하게 벗어나 버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다.
그의 모든 무학은 상대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 지금껏 그가 백연홍을 상대로 선전해 올 수 있는 이유도 지난 전투를 통해 백연홍을 손에 잡힐 듯 파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잘한 오차를 전투 중에 끊임없이 수정하며 수천 가지의 경우의 수 중 가장 확률 높은 길을 연이어 탐색해 낸다.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넣는 방법이지만, 이 길이 아니고서야 저 백연홍을 상대할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백연홍은 그의 모든 노력을 단숨에 무위로 되돌렸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
어떻게 동일한 사람이 단 한순간 만에 저리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경이롭다.
저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눠 오고 있다는 사실은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저 검에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상식과 논리가 무너진다.
백연홍이 펼쳐 내는 검은 위긴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부숴놓았다. 그들이 수천 년간 쌓아 올린 법칙이 붕괴하고, 그가 수년 동안 갈구해 온 진리를 허무로 되돌린다.
동양? 서양?
아니, 이건 그런 경계조차 무색하게 만든다.
보라.
저 느릿한 검이 음속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그를 뒤쫓아온다. 아니,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그가 존재할 곳에 먼저 존재하고 있다.
‘큭.’
이대로 계속 당한다면 결과는 빤한 법.
상대에 대한 감탄은 승부가 끝나고 나서도 늦지 않다.
위긴스가 이동과 동시에 실드를 펼쳐 냈다. 상대의 검이 반드시 그를 베어낸다면, 거꾸로 말해 그도 상대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세상이 암전하고 다시 밝아지는 순간, 그의 앞에 생겨난 우윳빛 막을 향해 검이 날아들었다.
당연히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듯이.
‘막아!’
위긴스의 손끝이 움직이기도 전에 그 의지만으로 수십 겹의 실드가 펼쳐진다. 우선 저 검을 멈추게 해야…….
하지만 그 순간, 위긴스는 보았다.
그가 펼쳐 낸 실드가…….
그 어떤 물리력에도 저항하고, 그 어떤 침입초자 허용하지 않는, 부서질 수는 있어도 물러나지는 않는 그의 실드에 백연홍의 검이 닿는 광경을.
스르르륵.
베어낸다?
부순다?
아니, 아니다.
백연홍의 검이 닿는 순간, 그가 펼쳐 낸 실드들이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좌우로 휘어진다. 마치 백연홍의 검이 휘둘러질 길을 터주는 것처럼.
‘뭐?’
흐르는 듯한 검격.
결코 더 빨라지지도 않고, 느려지지도 않는,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휘둘러진 검격이 그의 실드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그의 가슴에 와닿는다.
위긴스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건 그저 환상, 아니, 꿈결 같았다.
스으으.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검이 위긴스의 가슴을 가볍게 스치며 내리그어진다.
위긴스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제 가슴으로 향했다.
‘이건…….’
스슥.
그의 가슴을 덮고 있던 의복이 원래 그러하던 것처럼 갈라진다.
그와 동시에…….
파아아아앗!
그 안으로 드러난 가슴이 더없이 깊이 갈라지며 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다.
위긴스가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부니이이임!”
이현수의 목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눈에 보아도 뿜어져 나오는 피의 양이 심상치 않다. 웬만한 상처로는 저런 피를 뿜어낼 수 없을 터.
그가 뿜어낸 붉은 피와 함께 위긴스가 바닥에 처박힌다.
쿠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위긴스의 몸이 한 번 위로 튕겨 오른다.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이가 허공에서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몸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건, 저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는 의미일 터.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가 채 발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
고개를 돌린 이현수의 눈에 강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은 채 바닥에 떨어진 위긴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다.
꾸욱.
강진호의 손이 이현수의 어깨를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는다.
그 심각한 표정을 바라보던 이현수가 격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쿨럭!”
위긴스의 입에서 붉은 피가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폐를 당했나?’
벌어진 상처를 움켜잡은 그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손쓸 도리도 없이 절명했을 부상이다.
다행히 심장은 베이지 않은 모양이다. 심장까지 당했다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회복이 불가능했을 테니까.
하지만 회복이 가능하다는 말이 지금 상황을 절망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마법사이지 신이 아니다.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상처를 단숨에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쿨럭!”
바닥을 짚은 손을 타고 붉은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순간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인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쿨럭!”
하지만 육체의 상처 따위는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인식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공격이 그에게 격중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대체 이 검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말인가.
이 검이 빛보다 더 빨라 대응할 여지도 없이 그를 베어낸다면 그저 수긍할 것이다. 이 검이 너무도 강해서 그의 방어를 모조리 부수고 그의 육체마저 부순다면 그 역시 수긍할 것이다.
혹은 그 검에 어린 기교가 너무도 출중해서 그를 속여낸다고 해도 통쾌하게 웃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검은 아니다.
이 검은 빠르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다. 그의 눈으로 빤히 볼 수 있고, 그의 감각으로 분명 잡아낼 수 있다.
하지만 막을 수가 없다.
알고도 막지 못하는 검에 대체 어떻게 대응하라는 말인가.
“쿨럭!”
입으로 터져 나오는 피를 한 손으로 눌러 대며 위긴스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무릎은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다시금 바닥에 닿고 말았다.
“으…….”
절망하듯 바닥을 짚은 위긴스의 귓가에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트러졌군.”
“…….”
위긴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릿한 그의 시야에 몇 미터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백연홍의 모습이 보였다.
“분노와 혼란은 마음을 좀먹는 법이지.”
“…….”
백연홍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기고 지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지 않은가?”
“흐…….”
위긴스의 입에서 물기 젖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주 대단하시군.’
반발심이 들 만도 하다.
도사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악의를 드러내던 저 백연홍이 지껄여 댈 말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의 나란 결국 과거의 연장. 그가 무엇을 깨달았든 감히 누군가를 훈계할 자격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비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백연홍이 보여준 검이 그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우우웅.
위긴스의 손이 제 가슴을 움켜잡는다. 과하게 뿜어져 나온 흰빛이 벌어진 상처를 어찌어찌 붙게 만들었다.
상처를 아물게 한 것이 아니다. 더 벌어지지 않게 막고, 출혈을 잡아놓은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번은 더 움직일 수 있어.’
그거면 충분하다.
“쿨럭.”
작게 기침을 한 위긴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든 룬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휘청이는 몸을 억지로 다잡으며 백연홍을 바라보았다.
“……그게 당신……이 추구하던 경지인가?”
“아마도.”
백연홍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지 않은가. 바라되 바라지 않았는데, 놓은 순간 닿는다는 게.”
“쿡쿡.”
위긴스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이건 순수한 감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소?”
“음?”
위긴스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어렸다.
“이런 상식을 초월한 힘을 갖출 수 있는데, 그대들은 어째서 세상의 뒤로 숨어들었을까? 왜 살아남기 위해서 이토록 발악을 해야 했을까?”
“…….”
“잊은 모양이신데…….”
우우우우웅.
위긴스의 룬검이 눈이 멀 것 같은 흰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알려 드리지!”
그때, 백연홍의 귓가로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위긴스으으으으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 전투에 들어 처음으로 백연홍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이 어렸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찢어지는 비명 소리의 주인이 바로 마존이였기 때문이다.
위긴스가 만들어낸 빛이 그의 눈을 멀게 할 것처럼 강렬하게 그를 뒤덮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