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75
#2074.
도달하다 (4)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사이 감정을 정리한 게 아니다. 감정은 여전히 뒤흔들리고 있지만, 정리할 시간이 없다. 위긴스에게는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으니까.
“내가…….”
강진호가 살짝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연다.
“내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나면…… 원탁이든 총회든 마음대로 휘두르며 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확실히…….”
위긴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한 것 같군요.”
“그런…….”
강진호의 시선이 점점 더 흩어지는 위긴스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위긴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강진호가 하는 말이 마치 투정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투정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정말 투정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사람에 굶주린 이니까.
사람이 죽는 것을 슬퍼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강진호 같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한다는 것은 위긴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에게 있어서의 강진호의 크기만큼이나, 강진호에게서의 위긴스도 그만큼이나 컸다는 의미일 테니까.
저 강진호의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남은 미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저 표정이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위긴스가 강진호를 달래듯 말했다.
“뭐, 어쩌겠습니까.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그러게 말입니다.”
위긴스가 자기가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이 쿡쿡댔다.
“어쩌면 그건 자기혐오였을지도 모릅니다. 결국은 이성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사람이고, 저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제 스스로 알고 있던 거겠죠.”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의 패배가 총회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싸우다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섰다면, 어쩌면 위긴스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강진호가 더는 전면에 나서지 않을 세상.
흑왕계도 더 이상은 힘을 쓰지 못하고, 홍왕마저도 침묵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위긴스는 총회와 원탁, 그 양쪽의 권력을 모두 움켜쥐고 세상을 지배할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바깥세상과의 조율이라는 중차대한 역할 역시 그의 의무가 되었겠지만, 위긴스라면 그 역할 역시 잘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과도하게 무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강진호가 다시 전면에 나서 그를 제어하려 들 일은 없었을 것.
어쩌면 수십 년에 달하는 막강한 권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긴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위긴스는 그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집어던졌다. 쓸데없는 승부에 제 모든 것을 걸어 싸우는 이들을 경멸하고 비웃으면서, 정작 그 자신은 그들이 건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대한 것을 한 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어찌 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나.
‘이래서 사람이란 재미있는 거지.’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최선의 행위만을 행한다면, 세상은 하나의 변수도 존재하지 않는 삭막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 미련하기 짝이 없는 충동들이 이 세상에 색을 입힌다.
어찌 이리 사랑스러울까.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에 직면하고 보니, 그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가 실감이 난다. 산산이 부서진 무채색의 콘크리트 벽들마저도 그의 눈에는 그저 아름답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름다움을 두고 가야 할 시간이다.
위긴스가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팔’이라 불러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팔은 이미 존재가 흐려졌고, 그의 어깨까지 이지러지기 시작한다.
“로드.”
강진호가 대답 없이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꾹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보는 순간, 위긴스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난다.
원망하는 듯한 얼굴, 화가 난 듯한 얼굴.
이 사람에게서 이런 얼굴을 끌어낼 수 있었으니, 딱히 후회가 남을 이유가 없다.
“로드의 탓이 아닙니다. 이건 언젠가 제가 맞이해야 할 운명이었겠죠.”
“…….”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단 한순간이지만, 저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곳을 이 눈으로 목도하고, 이 손으로 움켜잡았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로드도 제 상대가 아니었을지 모르지요.”
위긴스가 낮게 웃었다.
강진호가 굳이 반박하지 않는 것은 마지막에 닿은 그에 대한 배려겠지.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위긴스.”
“로드를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로드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숨을 쉰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로드에게 고개를 숙인 건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할 말이 많던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로드에게는 딱히 제 조언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당부만은 하려 합니다.”
“……말해봐.”
말없이 강진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는 무인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
그 말이 뜻밖이라는 듯이 강진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무인이라는 존재들은 수많은 것을 생각하며 살다가도 극한에 이르는 순간에는 오직 자신의 충동만을 중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로드는 반대이지요. 제멋대로 사는 듯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
위긴스는 강진호가 가장 무인다운 무인이라 여겼다. 그리고 자신은 어쩌면 무인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완전히 거꾸로였던 거지.’
강진호는 무인이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로드 같은 사람이 이런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불행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로드…….”
위긴스가 단호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삶을 찾으십시오.”
“…….”
“또 한 번의 삶을 살았다는 건 더 이상 특별한 게 아닙니다. 강하다는 것도 이제 특별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저들, 흑왕계를 보십시오. 지금을 살고 있지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
“과거는 아무것도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잡아야 하는 것은 당신의 미래입니다. 그러니…….”
위긴스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이제는 그 어깨에 올려진 짐을 내려놓고 그저 행복하시기를.”
“…….”
강진호의 입술이 살짝 떨린다.
강진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은 차마 위긴스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다.
위긴스가 그런 강진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강진호라는 사람을 만든 것은 이런 점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 동안 수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직까지 이런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이 강진호에게 끌리는 것이겠지.
“방 이사는 총회를 이끌기에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혹여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한들, 이현수가 채울 수 있을 겁니다.”
“…….”
“다만…… 로드, 하나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말해봐.”
위긴스가 살짝 고민하는 듯 머뭇거린다. 하지만 이내 내려놓은 듯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원탁을…… 부디 온정 어린 눈으로 봐주시기를.”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와 위긴스를 모두 잃은 원탁은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결국은 와해되어 버릴 확률이 높았다.
“이미 미련은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그들을 지켜 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알아.”
“…….”
강진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항상 이곳을 그리워했다. 항상 그가 있던 곳을 그리워했다. 그 기억이 딱히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만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위긴스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내가 있는 이상 누구도 원탁을 없애지는 못할 테니까. 그들이 너를 기억할 거고, 네가 남긴 것을 이어갈 거야.”
위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어쩌면 이 말이 그가 가장 원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모순 가득한 인간이군.’
원탁을 파괴하고 부순 건 다름 아닌 위긴스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위긴스의 가슴에 남은 단 하나의 미련 역시 원탁이었다.
그는 원탁을 증오했고, 또한 사랑했다. 그곳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고, 또한 재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기를 바랐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
하지만…….
‘결국 사람이란 그런 존재겠지.’
저마다의 모순을 품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람이란 더없이 빛나는 존재인 것이다.
스르르륵.
그의 가슴까지가 점점 흩어진다.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위긴스가 강진호와 함께 그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춘 위긴스가 하나 남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 딸에게 안부를.”
“남길 말은?”
“괜찮습니다. 그 아이에게 전해야 할 것은 삶으로 전했으니까요.”
“……그래.”
“시간이 조금 정도는 더 있어야 좋겠지만, 마지막은 조금 아쉬운 게 낫겠지요. 여운이 있는 영화야말로 진정으로 명작이 되는 법이니까.”
위긴스가 모두를 돌아보며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사, 사부님…….”
“다 큰 놈이 눈물은.”
이현수에게 한 번 웃어준 위긴스의 몸이 점점 더 흐려진다.
흩어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본 위긴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모두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모두들…….”
“위긴…….”
“즐거웠습니다.”
느릿한 바람을 맞아 흩어지는 모래처럼…….
위긴스의 몸이 점점 더 흐려졌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모습이 사라지기 전, 위긴스가 지은 미소는 정말 근사했다.
모두의 기억에서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만큼.
“…….”
흔적조차 남지 않은 소멸.
조금 전까지 위긴스가 존재하던 공간을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이현수도, 방진훈도, 장민도, 바토르도, 혈왕과 이명환, 홍왕까지도.
그리고…….
찰칵.
강진호가 담배 한 대를 빼 물고는 그 끝에 불을 붙인다.
늘 보던 광경.
하지만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이 광경은 분명 평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강진호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점점 흩어진다.
“끝까지…….”
평소보다 조금 작게 흘러나온 강진호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폼 잡아대기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그 마지막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을 것이다.
원탁의 나이트이자 마스터.
그리고 총회의 이사.
한 사람의 스승이자 한 사람의 아버지
그리고…….
누군가의 친구.
짙은 담배 연기를 흘려낸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영원히 새겨두려는 듯이.
“……편히 잠들기를.”
그가 피워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멀리멀리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