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81
#2080.
이어지다 (5)
흑왕이 멍하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아니, 그 질문이 대체 무엇을 묻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
뭔가 대답을 하려는 듯 살짝 벌어진 입이 이내 다시 굳게 닫히고 말았다.
흐릿한 감정의 편린이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그저 의문뿐이었다.
“행복?”
“…….”
혀끝이 아리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말을 강제로 혀끝에서 떼어내는 것만 같다.
“무슨 의미입니까?”
강진호가 천천히 내뿜은 담배 연기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말 그대로야.”
“…….”
흑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부터 엉뚱한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릴 줄 안다고 여겼는데, 그것도 내 착각이었던 겁니까?”
흑왕이 미소를 짓는다. 당황스럽고 한심스럽다는 감정을 한껏 담은 미소. 하지만 그 미소는 지금껏 흑왕이 지은 것과는 다르게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웃음을 받으면서도 강진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대답해 봐.”
“교주…….”
“대답해.”
“…….”
흑왕이 입을 닫았다.
동시의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가 표출하고 있는 감정이 명백히 분노는 아니었다.
그건 당혹. 그래, 당혹일지도 모른다.
흑왕의 두 눈에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진호의 시선이 담겼다. 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는 두 눈이 그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
잠시 머뭇거린 흑왕이 다시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이토록이나 동요한 적이 있던가. 더 이상한 것은 흑왕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이상하게도 열리지 않는 입을 강제로 비틀어 열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게…… 대체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관계 같은 건 없어.”
“…….”
“그저 궁금한 것뿐이야. 대답해 봐, 흑왕. 말 돌리지 말고. 이 세상으로 돌아온 이후 너는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한 적이 있었나?”
흑왕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알 것 같군.”
타닥.
강진호의 담배 끝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다는 반응을 본 흑왕이 입술을 깨물었다.
행복?
그 따위 것이 그의 인생이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은 이해 못해.”
“…….”
“누가 알겠어, 부모가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아야만 하는 어린 그의 심정을. 그리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 달아나고 또 달아나야 한, 숨어들고 또 좌절해야 한 내 심정을.”
“…….”
“내가 말했지? 당신은 운이 좋았다고. 당신은 당신이 겪은 지옥을 되돌릴 기회를 얻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내가 그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순간으로 돌아왔다면, 나도 그 낯 간지러운 단어를 입에 올릴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흑왕이 입술을 짓씹었다.
“내게 그런 기회 같은 건 없었어.”
강진호와 흑왕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든다.
“행복?”
그 웃음은 과히 비틀려 있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절로 몸을 떨 만큼.
“내 삶에 그런 건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건 이상이지. 그런 말랑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
흑왕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린다.
“그러니 바꾸겠다는 것뿐이야. 다른 이들은 내가 겪은 지옥을 겪지 않도록.”
“그럼…….”
강진호가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가볍게 집어 던졌다.
“마교는 왜 구하지 않았지?”
“…….”
흑왕의 눈이 가라앉는다.
“네 말대로 달아나고 숨어들고 좌절해야 했던 이들이지. 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들의 삶 정도는 진즉에 바꿔놓을 수 있었겠지. 그렇지 않나?”
“…….”
“그런데 왜 그들을 방치했지? 왜 그들의 삶은 돌보지 않았나? 적어도 교가 너에게 적대적이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텐데?”
“의미가 없으니까.”
“어째서?”
흑왕이 씹어뱉듯 말했다.
“마교를 구한다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같은 걸 반복할 뿐이니까. 내가 구하려 한 건 교 같은 게 아니야. 무인들의 미래다. 그런 작은 것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어.”
강진호가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입안에서만 감돌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이내 흑왕의 귓가에도 똑똑히 들릴 만큼 선명해졌다.
“……왜 웃지?”
“쿡쿡쿡쿡.”
“왜 웃냐고 물었어.”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 논리가 옳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
“어쩌면 내가 너를 방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어. 어쩌면 네가 옳고, 내가 그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거슬린다.
그 목소리가.
“하지만…… 허무하군.”
“…….”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묻겠는데…….”
그 목소리가 칼날처럼 흑왕을 파고들었다.
“네 계획이라는 건 대체 누굴 위한 거지?”
“…….”
흑왕이 이를 드러냈다.
“이해력이 떨어진 모양이시군, 교주. 말하지 않았는가. 이건 모든 무인…….”
“모든 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강진호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모든 무인이라는 건 하나하나의 무인을 모아둔 것에 지나지 않아. 그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지.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행복한 국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
“네가 말하는 무인의 미래라는 건…….”
강진호가 쐐기를 박아대듯 말했다.
“그저 네 삶의 이유를 만들기 위한, 그럴싸한 자기변명일 뿐이야.”
“…….”
흑왕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천하의 흑왕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강진호의 말에 쉽사리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게…….”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흑왕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
“그렇다고 치죠. 스스로를 선으로 가장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지만, 내가 한 모든 것이 위선이라 칩시다.”
흑왕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래서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내가 행한 위선으로 다른 이들이 얻을 것이 있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닙니까? 철저한 위선자는 어설픈 선인보다 나은 법이죠. 당신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얻을 게 있다고?”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웃기지 마, 머저리 같은 놈아.”
갑자기 일변한 그 기세에 흑왕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하는 짓거리는 과거에 무인들이 한 것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아. 형태만 바꿔놓았을 뿐, 결국 회피에 불과해.”
“회피?”
“바깥세상을 더는 감당할 수 없던 무인들은 결국은 사람들의 이면으로 숨어들었지. 그전까지는 평범한 이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왕처럼 살아온 주제에 더는 이길 수 없을 때가 되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습을 감췄어.”
“…….”
“그런데…… 이젠 그것까지 한계에 몰리니까 기껏 한다는 짓이 벽을 치고 우리끼리 모여 살겠다고?”
“…….”
강진호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게 우리가 원래 하던 짓과 뭐가 다르지? 칼을 겨누고 무인과 평범한 이들의 경계를 나누던 이들이 이제는 미사일을 겨눠 그 경계를 나누겠다고 지껄여 대는 것뿐이잖아.”
“…….”
“그건 발전이 아니야. 멍청하던 과거로의 회귀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도태에 불과해. 언제고 어디서고, 고립을 추구하던 이들이 성공한 역사는 단 한 번도 없었어.”
흑왕이 입을 꾹 다물고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그 강대한 힘을 가진 마교조차도 외부와 자신들을 격리했기에 결국에는 실패하고 몰락했다. 그런데…… 그때의 마교에 비해서도 열세에 처한 우리가 저들을 상대로 벽을 치겠다고?”
찰칵.
강진호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흑왕에게는 그 모습이 더없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손가락을 튕겨 불을 붙이는 편리한 방법을 사용하던 강진호가 굳이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불편한 과정을 굳이 감수하며 말이다.
“그건 진보가 아니야. 퇴보지.”
“…….”
“그래. 처음에는 안온할 수 있겠지. 목구멍에 들이밀어진 총구를 뽑아내는 기분일 테니까. 하지만 거긴 달콤한 꿀이 발라진 커다란 덫에 불과해. 그 안온함이 곧 그 안에 든 이들의 목을 조이기 시작할 거야. 과거의 우리가 겪은 그대로.”
“당신은…….”
“잘 들어, 청마.”
강진호가 이를 으득 갈며 말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 같은 것은 없어.”
흑왕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네가 만들려고 하는 곳은 위협이 거세된 가짜 낙원일 뿐이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눈을 감는다고 해서 내게 겨누어진 총부리가 사라지지는 않아.”
“…….”
“그 안온함이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무너뜨릴 거다. 정말 네가 미래를 원한다면, 그런 식으로 달아나서는 안 돼. 맞서야지.”
“빤한 소리를!”
흑왕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러다 패하면?”
그러고는 다시 이를 드러냈다.
“그러다 패하고 무너지면? 그러다 피를 흘리고 죽으면? 그러다 무인이 사라지면?”
“…….”
“그걸 당신이 책임질 수 있습니까?”
흑왕에게서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밀려온다.
“일반론 따위는 누구나 늘어놓을 수 있지. 하지만 실패의 대가는 누가 감당하지? 무책임하게 지껄인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감정이 격하게 터져 나온다.
흑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 만큼 격한 감정. 하지만 그 감정을 정면에서 받은 강진호는 오히려 웃어버렸다.
“잊어버렸군, 청마.”
그 웃음은 익숙했다.
수도 없이 보아온 미소니까.
강진호의 얼굴에 떠오르기에는 낯설지만, 적어도 흑왕의 눈에는 지금 이자의 모습보다 훨씬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무인이란 원래 그런 승부의 세계에 사는 놈들인 거야.”
“…….”
“패배가 두려워서 내디뎌야 할 발을 내딛지 못하는 건 더는 무인이 아니지. 수도 없이 말했지만, 너는 여전히 모르는군.”
흑왕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
이자와 그의 관계는 언제나 이랬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깝지만, 결코 합쳐지지는 않는다. 세상 끝까지 향해 뻗어 있는, 평행한 레일처럼 그들은 언제나 맞닿지 못한다.
“결국은…… 좁혀지지 못하는군.”
강진호가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알고 있었잖아?”
“네. 알고 있었죠. 하지만…….”
흑왕이 빙긋 웃었다.
“미련을 한 번 가져 봤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 왔으니 그 정도 사치 정도는 부려도 될 테니까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릅니다, 교주.”
흑왕이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언젠가는 당신과 승부를 내야 했을 테니까. 서로 무를 겨룬다는 미적지근한 이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걸고.”
“…….”
흑왕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만을 지금까지 기다려 온 건지도 모릅니다.”
강진호가 뒤틀린 미소를 지어냈다.
“마찬가지야.”
그들에게 있어서.
아니, 무인에게 있어서.
좁혀지지 않는 이견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기세가 공동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너무도 음울하고, 조금은 서글픈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