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090
#2089.
대화하다 (4)
이현수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던 어마어마한 속도의 공방전, 그 공방전의 결과가 지금 그의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강진호의 등을 뚫고 흑왕의 검이 삐죽이 솟아나 있는 것이다.
“회, 회주…….”
덜덜 떨리는 그의 입술을 비집고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회주니이이이이이이임!”
이현수가 바닥을 움켜잡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니,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어깨를 장민이 꽉 움켜잡았다.
“놔!”
이현수도 알고 있다.
그는 저곳으로 달려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맹수 싸움에 끼어든 개미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잖은가.
이현수가 막 발악을 하려는 찰나, 장민이 그의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이!”
이현수가 핏발이 선 눈으로 장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이현수의 몸에서 맥이 빠져나갔다.
귀신같은 얼굴을 한 장민이 그곳에 있었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이는 게 가능하다면, 지금 흑왕은 천참만륙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기다려라.”
뒤틀린 장민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너무 작아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확연하게 이현수에게 전해졌다.
“아직…… 아직 아니다.”
“…….”
입술을 질끈 깨문 이현수가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회주님…….’
차마 그 모습을 더 볼 수 없던 이현수가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지옥 같은 고통.
전신이 용암 한중간에 던져진 것처럼 지독한 작열통이 몸을 휩쓸었다.
“끅…….”
강진호의 몸이 덜덜 경련을 일으킨다.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마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그 마기에 대항하려다 보니 근육이 제멋대로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강진호가 손에 잡힌 마기의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카아아아앙!
흑왕이 뒤쪽으로 튕겨 나가며 그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이 뽑혀 나온다.
수압 높은 호스의 중간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가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
휘청이는 몸을 다잡은 강진호가 고개를 내려 제 가슴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피했나…….’
가슴 한중간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조금만 아래를 찔렸으면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즉사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지독한 부상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아직은 싸울 수 있다.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뒤쪽으로 튕겨난 흑왕이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본다. 흑왕이 제 입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며 새하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말했잖습니까, 교주.”
그 하얀 웃음이 강진호의 두 눈에 박혀든다.
“약해졌다고.”
잘려 나간 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흑왕의 얼굴 반쪽을 덮으며 흘러내린다. 흑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손이 가닿은 곳은 상처를 입은 얼굴이 아니라 제 목이었다.
“예전의 당신이었다면, 목이 날아간 건 내 쪽이었겠지.”
“…….”
“과거의 당신은…….”
흑왕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과거의 어딘가를 더듬어 찾는 듯.
“잔혹하고…… 또 무자비했지. 같은 길을 걷는다 생각하던 이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 만큼.”
흑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 사라진 감정의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와 분노였다.
“그런데…… 지금의 당신은 나약해 빠졌군.”
살기 어린 눈으로 강진호를 쏘아보던 흑왕이 씹어뱉듯 말했다.
“어디에 갔지, 내가 알던 당신은?”
“…….”
“얼빠진 모습을 보인다 해도 싸우다 보면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줄 거라 믿었지. 당신은 적천마존이니까. 바로 그 적천마존이니까……. 하지만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로군.”
제 얼굴에 흘러내린 피를 신경질적으로 훔쳐낸 흑왕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서글프군. 내가 기다려 온 게 겨우 이런 거였다니. 적어도 남은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당신에게는 불순물이 너무 많아. 도무지 적천마존이라 불러줄 수 없을 정도로.”
그 말을 들은 강진호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큭큭대는 강진호의 웃음소리를 들은 흑왕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가 우습지?”
강진호의 입술을 비집고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가슴의 상처만 아니었다면, 광소를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우스울 수밖에.”
자신을 바라보는 강진호의 눈빛에 흑왕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건 위기에 몰린 이의 눈이 아니다.
“나는 그 적천마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까지 발버둥을 쳐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흑왕의 귀를 파고들었다.
“스스로를 잃어가는 듯한 공포와…… 나약해져 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억지로 짓누르며,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내디뎌 겨우 여기까지 왔지.”
“무슨 소리를 지껄…….”
“그런데!”
강진호의 눈이 흑왕의 모습을 가득 담았다.
“누군가는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한 과거를…… 넘어서고 싶어 한 그 기억을, 누군가는 지독스럽게 뒤쫓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서글프고, 또 우스워.”
흑왕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말이 폐부를 찔러 온다는 듯이 말이다.
“잘난 듯이 지껄이지 마, 교주. 너는 버린 게 아니라 잃은 거다.”
“아니.”
강진호가 흑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내가 버린 거다.”
그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짙은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정확하게는 버린 게 아니라 다시 되찾은 거다. 내가 잃어버린 것을, 절대 잃지 말아야 했던 것을.”
“…….”
“나는 멍청한 놈이라서 잃어보지 않으면 모르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움켜잡은 것뿐이야.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해서.”
“……낯 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해 대는군.”
흑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새삼스레 알겠어. 당신은 정말……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군.”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
“너도, 그리고 나도. 영원히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과거에 머무를 수 있는 이는 죽은 자뿐이야.”
강진호의 두 눈, 더없이 깊게 가라앉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눈이 흑왕을 겨눈다. 흑왕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너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어. 아니, 스스로 그곳에 얽매여 있지.”
흑왕의 눈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가 뿜어낸 과격한 살기가 강진호를 찔러온다.
“이미 말했을 텐데, 되돌릴 기회를 얻은 당신은 내게 그따위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확실히 흑왕의 말은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 세상으로 돌아온 시기가 가족들이 이미 사고를 당한 뒤였다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낮은 목소리로 강진호가 말을 이었다.
“지껄일 자격은 없을지도 모르지.”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흑왕을 바라보았다.
조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 눈빛은 그가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지껄이지 않을 수도 없어. 병신처럼 굴어 대는 너를 지켜보는 것도 개 같은 기분이거든.”
증오할 수가 없다.
도무지 적의를 품을 수가 없다.
저건 그에게 청마인 동시에 과거의 그이니까. 그 어느 것도 바랄 수 없기에 그저 바라지도 않던 무력에 매달려야 했던 적천마존이니까.
그는 허무를 품었지만, 흑왕은 목표를 만들었다. 둘의 차이는 그저 그것뿐이다.
그런데 그가 무슨 수로 흑왕을 증오하겠는가.
적을, 적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를 이런 감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강진호에게도 처음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증오를 품을 수가 없다.
그저 애달플 뿐.
“과거에 머물 수 있는 자는 죽은 자뿐이라…….”
강진호가 한 말을 되새기듯 중얼거린 흑왕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큭큭큭.”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도 서글프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지도 몰라.”
흑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더는 강진호의 말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
“의미 없는 소리는 여기까지만 하지요, 교주.”
“…….”
“강자의 말이 옳다. 그게 당신의 논리 아니었습니까?”
다시 검은 마기의 검을 만들어낸 흑왕이 싸늘한 눈으로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과거의 당신이었다면, 나를 밟아 짓눌러 막아냈겠지. 하지만 지금은 구차하게 지껄여 대고 있을 뿐이야. 교주, 힘이 부족하다는 건 그렇게 서글픈 거요.”
“…….”
“잃은 걸 다시 되찾았다고?”
흑왕의 얼굴에 새파란 살기가 어린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그 때문에 다시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없어도 되는 걸 되찾고, 정말 잃지 말아야 했던 것을 버린 덕에.”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약하다라…….’
어쩌면 그 말은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의 강함과 무위의 강함은 다르니까. 강진호는 과거보다 강해졌지만, 분명 과거보다 약해졌다.
이제 강진호는 무슨 수를 써도 과거처럼 비정해질 수 없다.
그건 무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흑왕 같은 강자를 상대해야 할 때는 너무도 크고 거대한 약점이다.
하지만…….
“얻은 게 있어서 강해졌다는 소리는 안 해.”
그건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강진호의 손끝에 마기가 어린다. 불꽃같은 검을 만들어낸 강진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흑왕을 마주 보았다.
“누구에게나 질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
“…….”
“그리고 청마.”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야수처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기억해야지. 나라고 해서 처음부터 강했던 건 아니었다는 걸.”
그 말을 들은 흑왕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네가 강하고, 내가 약하다라…….”
강진호가 짙은 미소를 그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상황은 최악이다.
부상은 생각보다 깊다. 초인을 넘어선 강진호이기에, 평범하게 말하고 싸울 수 있을 뿐, 웬만한 이라면 이 상처만으로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도무지 적의를 끌어낼 수가 없다. 상대에 대한 증오를 양분 삼아 싸워오던 강진호에게 이건 보이는 것 이상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에 자리한 모든 것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으니까.
그래.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하는 데 이보다 나쁜 상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 없이 넘어오고, 수도 없이 이겨왔다.”
이보다 더한 상황도 그는 언제나 뛰어넘어 왔다.
“말했지.”
“…….”
“너만은 알았어야 한다고, 나를 건드리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주…….”
“다시 말해주지.”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만은 기억했어야 해, 나와 싸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쿠르르르릉.
하늘 너머로 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저 검을 뿐인 하늘을 더 짙은 검은색으로 뒤덮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