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01
#2100.
움켜잡다 (5)
세상이 빗소리로 차올랐다.
음울하게 물든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를 쏟아냈다.
강진호의 시선이 청마의 가슴을 꿰뚫고 들어간 자신의 손으로 향한다. 손목까지 박혀든 손을 말없이 한참이나 응시하던 강진호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가슴으로 향했다.
가슴 중앙, 심장이 위치한 그곳을 청마의 손이 꿰뚫고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고통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고통이란 아직 살아 있는 이의 특권이니까. 어쩌면 그의 몸은 더 이상 고통을 느낄 기력마저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강진호가 더는 들리지 않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은 더없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육체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점점 색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 어둠에 뒤덮인 세상.
하지만 그 속에도 수많은 색이 존재했다.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다고 생각한 그의 지난 삶 역시 돌이켜 보면 그저 잿빛만은 아니었듯이.
빗물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린다.
차가운 빗물의 감각이 조금씩 멀어져 간다. 강진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맞닿았다.
반쯤 감겨 있는 시선.
무심한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검디검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더없이 익숙하기에 더없이 낯설기만 한 그 눈동자가 말이다.
쏴아아아아.
고요하다.
빗소리로 가득한 세상은 소음으로 틈 없이 차 있지만, 역설적으로 너무도 고요했다.
비는 모든 것을 묻어버리려 하는 것처럼 쏟아져 내렸다.
“쿡.”
그리고 그 정적 아닌 정적을 깨고…….
흑왕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강진호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묵힌 감정이 터져 나와서?
글쎄, 모르겠다. 그냥 그저 웃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결코 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기나긴 여정의 종착. 끝나지 않으리라 믿은 길의 마지막은 조금은 허무하고 조금은 우스웠다.
두 사람이 어깨를 떨며 웃어 댔다.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지만, 이미 바래 버린 몸은 웃음조차 제대로 짓지 못한다. 그저 우는 듯 웃는 듯 들썩이고, 떨고, 그저 흔들릴 뿐이었다.
바닥을 채운 빗물 사이로 두 사람이 술에 취한 듯 비틀대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서도 두 사람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흔들리는 시선.
그 서글픔 속에서 강진호는 보았다. 청마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흐르는 빗물과 섞여들어 점점 번져 나가는 모습을.
무채색의 세상에 붉은 빛깔이 퍼져 나간다.
마치 청마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화인처럼 남기기라도 하려는 듯, 짙고 또 짙은 세상에 오직 그 붉은 빛깔만이 아프도록 선명하다.
하지만 강진호는 알고 있다.
무심하게 내리는 비는 결국 저 피마저 씻어버릴 것이다. 그 피의 빛깔도, 옅게 전해져 오는 피 내음도, 그 피에 담겨 있는 청마의 체온마저도 남김없이 지워 버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겠지.
없던 것처럼.
그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원하던 하늘도, 그가 원치 않던 하늘도 이곳에는 없다.
“쿨럭!”
기침이 터져 나온다. 목구멍 속에서 옅은 비린내가 밀려 올라왔다. 감각을 거의 잃어버린 그의 몸도 배 속에서 느껴지는 그 역함을 참아내지 못한 듯 들썩였다.
“……재밌는 표정이네, 교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힘겹게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누운 청마가 강진호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낯설다.
저 목소리는 강진호에게 더없이 익숙하지만, 또한 더없이 낯설었다.
바래 버린 듯한 목소리. 무엇이 바래 버렸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목소리에는 본래 담겨 있던 색이 옅어져 있었다. 시릴 정도로 파랗고 선명하던 목소리는 번져 나간 것처럼 흐릿하다.
“낯설게 말이야.”
청마가 낮게 웃는다.
아니, 어쩌면…….
저 목소리가 청마의 원래 목소리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저 바랜 듯한 색이 청마의 본래 색일지도 모른다.
강진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강하지 못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 세상을 향해 벽을 세웠다. 그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그 누구도 나약해 빠진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서야 청마가 세운 벽이 허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던 강진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청마…….”
청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어질 강진호의 말을 그저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의미가…… 있었을까?”
뜬구름을 잡는 듯한 말.
그저 흘러나와 퍼져 나갈 뿐인 목소리.
하지만 청마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글쎄.”
그 짧은 대답에는 여러 가지의 편린이 묻어 있었다.
어쩌면 작은 자조, 어쩌면 작은 후회.
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날로 강진호의 손끝을 베어낸 것은 숨길 수 없는 허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래, 그렇다고 생각했지.”
“…….”
“하지만…… 이젠 잘 모르겠군. 아니, 어쩌면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어.”
청마가 희게 웃었다.
그 웃음에 작게나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 악의 없는 아이 같은 웃음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 것 같았다.
청마.
삶을 하나의 긴 여정이라 칭할 수 있다면, 청마는 그에게 있어 가장 오래 된 동반자이자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서로 닿으려 하던 곳은 달랐지만, 적어도 그들의 걸음은 언제나 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남아 있을까?
그들이 그 긴 시간을 걸으며 보아온 것들이, 함께 느끼고 웃던 것들이 여전히 그들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쿨럭.”
청마가 잔기침을 쏟아낸다.
들썩이듯 기침을 내뱉은 청마가 뇌까리듯 말했다.
“알겠군, 교주…….”
“…….”
“정말 다음은 없구나.”
세 번의 삶.
그들에게 그 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남은 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종착뿐이었다. 그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이나 그들의 삶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의미겠지.
“아쉬운가?”
“글쎄…… 그것도 모르겠어, 교주.”
청마의 두 눈이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응시했다.
“나는 이미 그때 죽었어.”
“…….”
“첫 번째 삶에서 스스로 죽어버린 그 순간에 나라는 인간은 죽은 거야. 내게 주어진 다른 삶들은 그저…… 그래, 그때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라고 누군가 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
“청마…….”
“내가 정말 절망했던 순간은…… 목숨을 끊던 그때가 아니었어. 잠시 꿈을 꾸고 다시 비루한 현실로 집어 던져졌을 때였지. 겨우 새장에서 풀려나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그물에 걸려 새장 안에 다시 갇힌 것 같았어.”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그에게 있어서 현대의 삶은 구원이었다. 하지만 청마에게 있어서 현대의 삶은 그저 지옥일 뿐이었을 것이다.
외면할 수 없는 사명이 그의 사지를 묶어 댔을 테니까.
세상이라는 절대적인 흐름 속에서…… 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청마는 이제까지 싸워왔다. 피를 흘리고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아.”
“…….”
“알아, 외면하면 된다는 걸. 그런데 외면할 수가 없었어, 교주.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안 되는 걸 되게 할 수 없던 것뿐이지.”
청마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린다. 쏟아지는 빗물이 힘겹다는 듯, 더는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다는 듯.
강진호가 힘없이 웃어 댔다.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청마가 작게 물어온다.
“……뭐가 그리 웃기지?”
“그냥.”
서로 닮아 바래 버린 듯한 강진호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너도 참 요령 없는 인간이다 싶어서.”
“피차일반이겠지.”
청마가 작게 웃었다.
“의미라…….”
청마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게 아니겠지.”
“…….”
“교주.”
옅은 빛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는 무엇도 숨기지도 가장하지도 않는, 청마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의미가 있었을까?”
“…….”
“내가 한 모든 게, 내가 하려 했던 게, 내 삶이…… 의미가 있었을까?”
치밀어 오른다.
밀려온 것이 목을 터뜨려 버릴 것만 같다. 속에서 끓어오른 무언가가 그를 통째로 태워 버릴 것만 같다.
담담하려 애써도 더는 담담함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틀어막아 억눌러도 목을 비집고 자꾸만 새어 나온다.
“……있지.”
“…….”
“그래, 있을 거야.”
어쩌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청마의 존재가 그가 원하지 않던 세상을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진호는 청마의 삶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삶이 남기려 한 것이, 저 흘려낸 피처럼 세상에 씻겨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기억한다.
그만은 기억한다.
이곳에 한 사람이 있었음을.
세상을 어둠에 잠기게 만들려 한 악인이 아니라, 세상에 삼켜지던 무인을 구하려 하던 영웅도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이 존재했음을 그만은 잊지 않는다.
청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물든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지금까지 강진호가 본 어떤 미소보다…… 더 근사한 미소가.
“……다행이네.”
식어버린 청마의 입술 끝이 잠시 떨렸다.
딱히 대가 같은 건 바란 적 없다.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남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를 움직여 온 것은 그저 스스로 떨쳐 낼 수 없는 의무감이었으니까.
그걸로 족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한 뒤, 더는 남은 것 없이 재가 되는 결말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군.’
삶의 끝 같은 것은 이미 두 번이나 겪었다.
한 번은 그저 서글펐고, 한 번은 그저 고통스러웠다. 그 두 번에 비한다면 이번의 종착은 꽤 근사하지 않은가.
‘차가워.’
모르겠다.
쏟아지는 비가 차가운 건지, 그게 아니면 그의 몸이 차가운 건지. 아니, 어쩌면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던 청마가 고개를 돌렸다.
“…….”
흐릿할 대로 흐릿해진 그의 눈에 누군가의 손이 보였다.
상처투성이의 손.
그 거칠디거친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있었다.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던 청마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이 순간이 되어서도 청마는 강진호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닿을 수 없으니까.
사람은 영원히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아…….’
청마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어깨를 움켜잡은 강진호의 손. 그 손에 어린 한 줄기의 체온만은…….
‘따뜻하군.’
아릿할 정도로 선명하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