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04
#2103.
돌아오다 (3)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던 강진호를 부른 것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이었다.
그의 어깨를 잡고 있는 최연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진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제…….”
“…….”
아직 그의 안에는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들과 여운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하리라.
삶은 다시 시작되겠지만, 그는 어쩌면 더 많은 것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하겠지만…… 명확한 끝을 맺지 못한다면 나아가는 발걸음에도 힘이 실리지 않을 것이다.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이제 괜찮아요.”
“…….”
비에 젖은 최연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강진호가 맞잡은 그녀의 손에 겨우 다시 솟기 시작한 기운을 밀어 넣는다.
“……뭐가요?”
파랗게 질린 최연하의 입술이 퉁명스레 열렸다.
“뭐가 괜찮은데?”
“…….”
“얼굴은 엉망이 되어 가지고……. 얼굴 말고는 볼 것도 없는 사람인데.”
강진호가 최연하에게 가만히 웃어주었다.
“돌아온다더니…… 내가 오게 만들지를 않나.”
“그래도 왔잖아요.”
“……진짜.”
최연하가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난다.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엉망이 된 몰골을 해서도 저렇게 웃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괜찮아요?”
“네.”
“……정말?”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살짝 머뭇거리던 강진호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뗸다.
“다 끝났어요.”
쉽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후련함보다는 알 수 없는 여운이 더 짙게 느껴지는 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강진호는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어떤 이야기도 끝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끝을 맺지 않고서는 누구도 다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청마와의 인연.
길었던 그의 과거.
그리고 어쩌면 그를 옥죄고 있던 운명까지.
그 모든 것이 이곳에서 종언을 고한다.
최연하가 강진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럼…….”
“…….”
“그럼 이젠 뭘 할 건데요?”
“글쎄요.”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도 점점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밤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강진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건 최연하를 안심시키기 위해 짓는 미소가 아니다.
“그냥 소파에서 뒹굴거리기도 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그냥…… 네. 시간이 남으면 산책도 좀 하고.”
핀잔을 줘야 할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연하는 도무지 태연하게 그 말을 받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저 평범한 일상이 이 사람에게는 너무도 특별한 것이라는 것이 절절히 느껴져서, 그래서 웃을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그냥 무작정.”
“진호 씨…….”
“하지만 지금은 그냥…….”
강진호가 겸연쩍게 웃었다.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네요.”
“……병원 침대겠죠.”
“……그것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최연하가 강진호를 향해 한 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을 제 이마로 꾹 눌렀다.
“아파요?”
“아뇨.”
“……그럼 잠시만, 정말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그렇게 잠시 머리를 대고 있던 최연하가 강진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
“더 했다가는 미움받을 것 같으니까.”
“네?”
최연하가 강진호를 잡아 뒤로 빙글 돌린다. 그런 강진호의 눈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
강은영의 손을 잡고 있는 백현정과 강유환의 모습이 말이다.
강진호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괜히 새삼스럽다.
“야!”
“…….”
화가 난 얼굴로 다가오는 강은영을 보며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미친 인간아!”
강은영이 강진호를 한 대 후려치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차마 강진호의 가슴을 때리지 못했다.
“미안하다.”
“그걸 말이라고…….”
입술을 질끈 깨문 강은영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빠, 괜찮아?”
“그래.”
“나쁜 놈.”
강은영이 울음을 터뜨리며 강진호에게 안겨든다. 강진호가 말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그런 그에게 백현정과 강유환이 다가온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백현정과 코가 시큰거리는지 자꾸만 시선을 돌려 버리는 강유환을 본 강진호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래.
이들이 있어서 그는 흑왕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에게 가족이 없었다면, 어쩌면 청마와 그의 운명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진호야.”
백현정의 어깨를 다독이는 강진호를 보며 강유환이 말문이 막힌 듯 크게 헛기침을 한다.
“……아버지.”
“너 이놈아, 너…….”
강진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릴게요.”
강진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뭘 겪어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요.”
강유환이 말없이 강진호를 빤히 바라본다. 빨갛게 충혈된 그의 눈에 옅은 물기가 고여 있었다.
“그런 이야기 같은 건 됐다.”
강유환이 손을 뻗어 강진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잖아. 돌아가자. 이제 쉬어야지.”
“……예.”
“고생 많았다. 너무 고생 많았어.”
어깨를 잡은 강유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강진호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다.
‘힘들군.’
강진호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지금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제 겨우 청마와 매듭을 지었을 뿐이다.
그가 벌여 놓은 수많은 일들, 그리고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강진호가 저질러 놓은 모든 일들을 정리하려면, 쉴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곤하군.’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천 근처럼 무거워진다.
품에서 강은영을 살짝 밀어낸 강진호의 몸이 비틀거리는 그 순간이었다.
“읏차.”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 제 목에 두른다.
“……뭐야?”
“기대십쇼.”
이현수가 단호한 얼굴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구경이나 한 것뿐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 지쳤잖습니까.”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구경이나 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에는 이현수의 몰골이 너무 말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강진호보다 더 지독한 꼴을 당한 것 같아 보였다.
“괜찮아.”
“됐으니까 기대십쇼.”
“괜찮다니…….”
“아, 기대라고!”
“…….”
강진호가 당황한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했으면 됐습니다, 회주님.”
“……뭐가?”
“이제 그만 쉬십쇼. 남은 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내가…….”
“압니다. 회주님이 아니고서야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요.”
“…….”
“아니까, 잠이나 자십쇼. 회주님이 아니면 해결 못 할 일이 아니면 모조리 제가 다 처리해 둘 테니까.”
강진호의 팔을 잡은 이현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대단한 척하지 마시고요.”
“…….”
“회주님도 그냥 한 사람의 인간일 뿐입니다. 아무리 강해봐야 그냥 인간이죠.”
강진호가 영문 모를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회주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다 할 필요 없으니까, 이제 쉬셔도 됩니다. 회주님은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까요. 남은 건 그냥 맡기면 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장민과 바토르, 이명한…… 그리고 저 멀리에서 마염들까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쟤들은 언제 왔데?”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더니, 건수 하나 잡았다고 또 저렇게 몰려왔습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말귀는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다니까.”
“…….”
“하지만 든든하지 않습니까?”
“응?”
이현수가 말없이 미소를 짓는다.
고개를 들어 마염들을 바라보던 강진호도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든든하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마음 놓으십시오. 저도 있고, 장로님들도 있고, 저 새끼들까지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
“저희가 하면 회주님이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모두는 회주님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이현수가 뭔가 시큰하다는 듯 강진호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주님.”
“…….”
“정말…… 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그러네.’
새삼스레 알게 된다.
그를 걱정하던 사람이 이토록이나 많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현수가 강진호를 꽉 당겨 부축한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게이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금방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우선은 병원부터…… 가서…… 치…… 하면…….”
이현수의 말소리가 점점 끊겨 들린다.
작아지고 멀어졌다.
강진호의 몸에서도 힘이 풀려 나간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고, 의식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전하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무거움.
저항하려 해도 도무지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수마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처럼 깊은 수마가.
‘비슷하군.’
이전에 겪은 죽음들이 생각난다.
그때도 이와 비슷했던가.
‘아니…… 다르겠지…….’
그때는 조금 더 차가웠다. 그리고 조금 더 쓸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밀려드는 서글픔만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무학은 그를 강인하게 해주었지만, 마음마저 단련하는 무학 같은 건 없으니까.
어쩌면…….
그의 안에 있는 것은 첫 번째 삶의 그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 청마가 제 첫 번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달라.’
이제 그에게는 어깨를 내주는 이가 있다.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이가 있고, 그를 위해서 국경을 넘어서 달려오는 이들도 있다.
그러니 다르다.
그러니…….
강진호의 의식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전해 들어갔다.
어쩐지 조금 따스한 기분이었다.
“진호 씨?”
축 늘어진 강진호의 고개를 본 최연하가 움찔하며 손을 뻗어온다.
“잠드신 겁니다.”
“아…….”
“아니, 잠드셨다기보다는 기절한 것에 가깝겠지만, 여하튼.”
이현수가 고개를 숙인 강진호의 얼굴을 바라본다. 잠이 든 강진호의 얼굴은 그저 제 또래의 남자 같아 보인다. 딱히 특별할 것도, 다를 것도 없다.
살짝 입술을 깨문 이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쉬게 해드려야죠. 너무 긴 싸움을 겪어왔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회주님은 이제야 처음으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쉬는 걸지도 모르니까요.”
최연하의 손길이 잠든 강진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눈가를 매만지다 볼로 향하던 손끝이 가만히 강진호의 입술 끝에 가닿는다. 그의 입술이 작은 미소를 그리고 있음을 손끝으로 느낀 최연하의 입가에 강진호와 같은 미소가 피어난다.
“……잘 자요, 진호 씨.”
긴 비가 그쳤다.
먹구름이 밀려간 동쪽 하늘에서 여명이 비춰온다.
아직 태양이 그 모습을 비추지 않았음에도 세상은 밝아온다.
완전한 빛이 아니어도 충분히 밝고…….
충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