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05
#2104.
돌아오다 (4)
깊다.
무저갱처럼 깊은 어둠이 강진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건 조금의 안온함, 그리고 조금의 차가움.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 속에서 강진호는 그저 끝없이 부유했다.
의식은 그저 흩어진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어쩌면 이게 ‘안식’이라는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저 모든 것이 모호할 뿐이다.
그저 이대로…… 그래. 이대로 깊이 또 깊이 침전해 들어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강진호의 의식은 이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모호함 속.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부유감 속에서 강진호는 눈앞의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방.
사람이 살아간다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 삭막한 방 안에 한 남자가 낡은 휠체어에 앉아 있다.
초췌하다.
남자를 표현하기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분명 지금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초췌했다. 하지만 그 초췌함의 이유가 저 육체의 불편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 듯했다.
텅 비어버린 동공.
말라비틀어진 입술.
남자는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육신은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강진호는 그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가 축 늘어져 있던 손을 뻗어 탁자에 놓여 있는 작은 액자를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액자 안에 보이는 사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가족.
언젠가 그에게 의미가 있었을,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와 함께하지 않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 안에 있다.
천천히 사진을 쓸어내리는 사내의 동작에서도 생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텅 비어버린 동공은 그저 습관적으로 그가 잃어버린 것을, 그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을 되뇌고 있을 뿐이다.
강진호는 그 초라하고 작은 어깨를 말없이 그저 바라보았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강진호와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맞닿는다.
그리고 그 순간, 강진호가 바라보던 세상이 마치 거품처럼 사라진다. 세상이 낱낱이 분해되고, 다시 깊은 어둠이 강진호를 덮쳤다.
이어지는 침전. 깊은 침전.
한없이 아래로 빠져들던 강진호의 앞에 새로운 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
한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사자의 갈기와 같은 머리카락.
보는 것만으로도 강인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입술과 턱선.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울 듯 강렬하기 짝이 없는 두 눈.
그야말로 패도의 화신과도 같은 사내가 수천의 대군 앞에 우뚝 서 있다.
그 표정에는 그 어떤 것도 어려 있지 않다.
하지만 사내의 보보마다 강렬한 무언가가 묻어 나오고, 사내의 숨소리 하나가 세상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강인하고 또 강인하다.
그 사내의 두 눈을 강진호는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지.
강렬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다. 범의 눈을 연상시키는 그 눈빛은 적을 떨게 만들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고함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강진호의 눈에는 사내의 눈이 조금 전에 본 이의 눈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비어 있다.
그 강렬한 눈 속에서 반드시 존재해야 할 무언가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기에 허무하리라.
완벽하게 다른 두 삶. 극단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두 삶.
하지만 그 삶의 본질은 그리 다르지 않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손에 넣지 못하고, 자신에게 남은 것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세상이 흔들린다.
이윽고 바라보던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 그 검디검은 세상 속에서 강진호는 이윽고 둘과 마주했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
첫 번째 삶의 강진호가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패도로 전신을 두른 남자.
두 번째 삶의 강진호도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짙고 짙은 눈빛이 강진호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과연 찾아냈냐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너는 과연 찾아냈냐고 말이다.
강진호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참이나 애를 쓴 끝에 강진호의 목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알고 있다.
이들은 강진호 자신이라는 것을, 그가 지나쳐 온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어쩐지 이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을 거야.”
작디작은 목소리가 텅 비어버린 공간에 천천히 울려 퍼진다.
“의미가…… 없진 않았을 거야.”
두 사람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강진호가 그 비어버린 동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살아가며 찾게 되겠지. 더 많이 알아가게 되겠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도, 그 의미도.”
강진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러니 너희의 삶도…… 내 지난 두 번의 삶도 의미가 없진 않았을 거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몸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한다.
딱히 슬프거나 아련하지는 않았다. 과거란 언제나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지만, 영원히 보낼 수 없는 것이니까. 저들은 이제 그의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흐려진 두 사람이 그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준다.
강진호가 그들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 검고 검은 공간에 홀로 남은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그의 몸이 천천히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강진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점점 선명해진다.
‘천장…….’
눈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천장처럼 새하얀 벽.
그 벽의 한쪽에 자리한 소파에 두 사람이 기대어 자고 있었다.
최연하, 그리고 강은영.
강진호가 멍하니 잠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그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한다. 깨끗한 하얀 붕대가 감긴 제 몸이 보였다. 세상과 자신의 초점을 맞추려는 듯이 멍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살짝 느껴지는 통증.
하지만 그 통증이 되레 강진호에게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째깍, 째깍, 째깍.
벽에 걸린 벽시계에서 흘러나오는 초침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강진호가 막 침대에서 내려서려 할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더니, 양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든 이현수가 입에 식빵을 문 채 안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온다. 양 볼에 빵이 아닌 불만을 가득 채운 듯한 얼굴을 한 그가 채 두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강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
“…….”
강진호도, 이현수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툭.
이현수가 물고 있던 식빵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
“…….”
“그…… 어…… 그러니까…….”
이현수가 뭔가 할 말을 찾는 듯이 멍하니 강진호를 바라본다. 이내 그의 손에 들린 물건들마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셨네요?”
“그러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뭔가 할 말을 찾는 듯하던 이현수가 고개를 돌려 최연하와 강은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강진호와 눈을 맞췄다.
“깨울까요?”
“…….”
이현수를 만난 뒤 처음으로 저 인간이 사실 좀 멍청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는 강진호였다. 대체 그걸 왜 자신에게 묻는다는 말인가.
“……저녁인가?”
“정확하게 오전 7시입니다. 바른생활이 몸에 배셨네요. 일곱 시에 일어나시고.”
“…….”
“그…… 회주님.”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던 이현수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뭔가 울컥하는 듯 작게 헛기침을 한 그가 살짝 물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뭘 새삼스럽게.”
“보름 만이거든요.”
“뭐?”
강진호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하는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보름 동안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의사는 깨어날 확률이 없다고 했고요.”
“……돌팔이네.”
“그죠. 그…… 회주님이 깨어났으니 돌팔이가 맞죠. 대학병원 교수이지만…… 뭐, 이리되면 돌팔이인 거죠.”
“…….”
강진호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보름이라니.
눈을 뜨는 순간, 적어도 며칠은 지났을 거라고 직감하긴 했지만, 설마 보름이나 지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지.
의식을 잃은 사람이 보름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면, 그때쯤에는 슬슬 포기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니까.
“못 깨어날 거라 그랬는데, 여긴 왜 왔어?”
“그야 뭐…….”
이현수가 제 뒷머리를 긁었다.
“돌팔이일 것 같았거든요.”
강진호가 웃고 말았다.
“아뇨. 뭐…… 의학을 믿지 않는 건 아닌데……. 여하튼 회주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그…… 물론 의사 양반도 그런 거랑 관련 없이 이건 의식이 돌아오기 힘들다고 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그래도 사람이 믿음이라는 게 그…….”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이현수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강진호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에서 이현수가 그를 얼마나 걱정했는지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나저나 보름이라니.’
그럼 대체 세상은 어떻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
옆으로 젖혀져 있던 최연하가 고개를 천천히 든다.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든 해야지. 뼈마디가 쑤셔서 살 수가 없…….”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던 최연하가 하품을 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
“…….”
강진호로서는 뭔가 매우 어색한, 그리고 최연하에게는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어…….”
최연하의 입이 더 벌어진다.
“하하…….”
“너…….”
“하하하…….”
“너 인마!”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진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강은영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강진호를 발견하고는 고함을 내질러 댔다.
“오빠아아아아!”
최연하가 강진호의 가슴에 뛰어든다.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하게 강진호의 가슴을 들이받은 최연하의 몸이 잘게 들썩였다.
강진호가 벌린 팔을 가만히 내려 최연하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
“진짜 괜찮…….”
빠악!
“컥!”
“오…… 클린 히트.”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만다.
팔꿈치로 강진호의 턱을 돌려 버린 최연하가 베개를 잡아 들더니, 인정사정없이 강진호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새끼야! 지금 괜찮다는 말이 입에서 나와?”
“아, 아프…… 악! 악!”
“죽어! 차라리 그냥 죽어! 눈 뜨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냥 눈 감고 침대에 평생 누워 있어, 이 화상아!”
“아아, 거기 상처, 상처! 가슴에…… 거기, 아야! 아!”
베개를 휘둘러 대는 최연하와 그의 팔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강은영, 그 모습을 보며 낄낄 웃어 대는 이현수.
그 모습들 속에서 머리를 감싼 강진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