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07
#2106.
정리하다 (1)
물론 강진호의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총회야 어떻게 힘으로나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들이지만, 세상에는 강진호가 가진 힘과 권력이 통하지 않는 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잘하는 짓이다.”
“…….”
강진호가 반쯤 넋이 나가 버린 얼굴로 침대 옆에 의자까지 가져다 놓고 앉은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잘하는 짓이야, 아주.”
“…….”
“얌전히 사업이나 하랬더니, 아주 전 세계에 얼굴을 팔아대고 있구나. 아주 대단해, 아주!”
“거꾸로 생각하면 나쁜 일도 아니잖습니까, 회장님.”
“뭐야?”
조규민이 웃으며 강진호를 도와주었다.
“사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홍보보다 중요한 게 어디에 있습니까? 돈 주고도 못할 홍보를 했으니, 오히려 칭찬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입은 살아서!”
조규민이 찔끔해 고개를 돌리자, 황정후가 다시 혀를 차기 시작했다.
“에잉.”
“…….”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지만, 그 눈빛에는 잔정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강진호도 차마 볼멘소리를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한동안 골치가 아프겠구나.”
“……그렇죠.”
“너야 이제 깨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바깥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럴 것이다.
강진호는 흑왕에게 승리하고 세상의 평화를 지켜냈다. 하지만 그건 벌어진 일을 수습했다는 의미이지, 세상을 다시 과거로 되돌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갈 것이다.
“뭐, 내게는 나쁜 일은 아니지.”
황정후의 말에 강진호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변화란 언제나 기회가 되는 법이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없던 사업이 생겨난다는 의미이고. 안 그래도 요즘 그룹이 영 정체기에 접어든 것 같아서 찝찝했는데, 이 기회를 빨리 포착해야지.”
“……이런 상황에도 그런 생각이 드세요?”
“이런 상황? 이게 뭐 대단한 상황이라고.”
“…….”
황정후가 코웃음을 쳤다.
“거, 무인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같이 어울려 산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도 다들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 대는 건지 모르겠어. 북에서 탱크를 몰고 내려와서 피난 갈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
물론 거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 건 맞겠지……. 하지만 전쟁에 비유를 하면 세상에 특별한 일은 존재하지도 않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자네도 괜히 호들갑 떨 것 없어.”
“예?”
황정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 성격에 생각하고 있는 건 빤하지. 지금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자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세상일이란 게 그런 거야. 심각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심각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또 별거 아닌 게 세상사지.”
황정후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흘러가게 두면 돼.”
“…….”
“살다 보니 알게 되는 게 있더라고. 나도 젊을 때는 내가 무언가를 바꿨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어.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보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바뀔 것은 바뀌는 법이더라, 이거지.”
말을 끝낸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아닙니다, 회장님.”
“응?”
“……도움이 됐습니다.”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던 황정후가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뭐, 그럼 됐어.”
황정후가 딴청을 피우자, 조규민이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거, 쓸데없는 소리를!”
“아니, 뭐가 부끄러우시다고.”
“조용히 안 해?”
황정후가 역정을 내자, 조규민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쯧쯧, 이래서 사람이란 잘해주면 안 된다니까. 오냐오냐해 줬더니 이젠 맞먹으려 들어!”
“그게 아니라 회장님이 요즘 적적해 보이셔서 제가 최대한…….”
“시끄러워!”
황정후가 소리를 빽! 지르고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여하튼 몸조리 잘해. 사람이 돈 있고, 권력 있어봐야 몸 상하면 다 끝이야. 예전 내 꼴을 봤을 것 아냐?”
“……걱정 마세요.”
황정후가 슬쩍 침대 머리맡에 서 있는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좀 신경 써주고.”
“네, 회장님.”
“알다시피 좀 손이 가는 친구가 아닌가. 애 키운다 생각하고, 잘 보듬어주게.”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진호 씨가 얼마나 듬직한데.”
“……크흠!”
아무래도 최연하의 너스레에는 당할 수 없었는지, 한숨을 내쉰 황정후가 내려둔 중절모를 덮어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하튼.”
황정후가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사람이 기력이 있을 때는 뭐든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기 마련이지.”
“…….”
“그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야. 머리 식히고 주변을 돌아봐. 자네 주변에 사람이 좀 많은가? 그 사람들이 조금씩 도와주면 아무리 큰일이라 해도 그리 어려울 게 없어.”
“예…….”
조규민이 입을 가리는 척하며 속삭였다.
“이야기만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돌려하시는 중입니다.”
“거, 이놈! 촉새같이!”
“헤헤.”
“쯔쯧.”
황정후가 중절모를 꾹 누르고는 말했다.
“재계 쪽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정계 쪽도 웬만큼은 되겠지만, 그건 고 총리가 나보다 더 잘할 테니까.”
“예, 회장님.”
“어련히 잘하겠냐마는.”
황정후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조규민이 강진호에게 속삭였다.
“강진호 씨 언제 깨어나느냐고 하루에 열 번씩 병원 원장님한테 전화해서 닦달하셨습니다.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정말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빨리 안 와?”
“가, 갑니다, 회장님!”
조규민이 끝끝내 한마디를 더 남겼다.
“강진호 씨를 걱정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니까 힘내십쇼.”
조규민이 빙긋 웃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황정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던 강진호의 귓가에 최연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호 씨.”
“……네?”
“행복한 사람이네요.”
“…….”
강진호가 말없이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가 봐요.”
덜덜덜덜.
“…….”
덜덜덜덜.
“아니…….”
“가만히 있어요!”
“…….”
강진호가 불안한 얼굴로 휠체어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휠체어가 보도블록으로 돌진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다.
“그…….”
“에이, 진짜 못해먹겠네! 환자면 그냥 병실에 얌전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놈의 담배는 안 피우면 뒈지나!”
저기요?
제가 혼자 다녀온다고 했는데 끝끝내 사람 휠체어에 앉혀서 끌고 나온 건 그쪽입니다만?
“콱 폐암이나 걸려라!”
“거, 말이 좀…….”
“뭐요?”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군말 없이…… 아니, 군말 넘치게 강진호를 흡연 구역까지 데려다 주는 최연하였다.
“아니, 우선 담배를 사야 하는…….”
“자요.”
“…….”
최연하가 담배와 라이터를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강진호가 빤히 바라보다가 의혹 어린 눈으로 물었다.
“담배 피워요?”
“뭐, 인마?”
“……죄송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끊으라고 잔소리는 못할망정 편안하게 담배 피우시라고 모셔다 드려, 미리 담배도 준비해 드려. 세상에 이런 여자 친구가 어디 있겠어.”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받아요.”
“넵.”
담배를 받아 든 강진호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보름 만에 피우는 담배라 그런지, 씁쓸한 맛이 지독할 정도다. 하지만 강진호는 오히려 더 깊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폐 속으로 들어온 담배 연기가 몸 안을 훑고 나간다.
“후우.”
길게 연기를 내뿜은 강진호가 고개를 들어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
강진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보름 내내 여기에 있던 거예요?”
“네.”
“…….”
“뭐 불만이라도?”
“아니, 고마워서. 스케줄이 차 있었을 텐데.”
“아, 스케줄? 진호 씨, 지금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시는 모양인데…….”
“……예?”
최연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댁이랑 나랑 사귀는 거 웬만한 사람은 다 알거든요?”
“……그죠.”
어쩌다 보니 공개 연애를 해버렸잖은가. 알 사람은 다 알겠지. 세상 사람들은 강진호에게는 큰 관심이 없지만, 최연하에게는 관심이 많으니까.
“그런데 내 남자 친구라는 양반 얼굴이 전 세계 온갖 채널에서 생중계되네?”
“…….”
“심지어 그 생중계되는 와중에 그 양반들이 슈퍼맨처럼 손에서 레이저를 뻥뻥 쏴대네?”
“…….”
“심지어 내 남자 친구가 그 양반들 대장이라네?”
“…….”
최연하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스케줄? 아아, 스케주∼울? 가고 싶지. 나도 가고 싶었지. 촬영 한번 해보려고 했더니, 촬영장에 기자들이 삼 열 종대로 운동장 열두 바퀴는 채울 정도로 서 있더라! 그거 뚫고 가려면 사람으론 안 돼. 불도저 불러야 돼.”
“주, 죽을 죄를…….”
“지금 진호 씨가 병원에 있어서 사태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요, 지금 여기는 재경 그룹이랑 정부에서 기자 출입을 막아놔서 이 정도인 거예요. 지금 밖에 나가면 기자들에 둘러싸여 한 걸음도 못 갈걸요?”
“…….”
그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실감 난다.
“미안합니다, 괜히 피해를 줘서.”
“말로만?”
“…….”
“됐네요, 이 사람아. 촬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거기서 연기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아니, 정신 나간 사람 연기면 잘했겠네.”
강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안 해도 돼요.”
“네?”
“어쨌거나 약속은 지켰으니까. 돌아왔잖아요.”
“…….”
강진호가 멍한 얼굴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나 정말…… 정말 당신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생각했어요. 당신, 그런 얼굴을 한 건 처음 봤으니까.”
뭔가 말을 하려던 강진호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은 그저 저 말을 듣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그걸로 됐어요.”
“…….”
최연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문다. 그러고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괜스레 쑥쓰럽고, 괜히 미안하다.
“돌아온 게 아니라…….”
“네?”
“……돌아와야 했던 거죠.”
강진호가 미소를 지어냈다.
이제부터 그가 맞이해야 할 세상은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청마와 치른 전투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 그래도 괜찮다.
세상은 변할지 모르지만, 그가 아는 이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가 돌아올 곳은 여전히 이곳에 있으니까.
“이제 어디 갈 일 없을 거예요.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 걸 알았으니까.”
“……민망하게 뭐 그런 말을.”
강진호가 환하게 웃었다.
어쩌면 조금은 긴 방황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마침내 자신의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이해했다.
한없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낸 강진호가 최연하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이거, 내가 피우는 담배 아닌데.”
“……그냥 뒈졌으면 좋았을 텐데.”
“…….”
아니, 약간. 어…….
그래, 아주 약간은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