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08
#2107.
정리하다 (2)
병실로 돌아온 강진호는 또 다른 방문자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에 맞은 방문자의 성격은 지금까지 그를 찾아온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총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주님.”
대한민국의 총리인 고한봉이 환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테이블에 놓인 꽃바구니를 살짝 들어 보인 고한봉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문병이다 보니 선물을 사 와야 하는데…… 사실 회주님께 마땅한 선물을 뭘 드려야 할지 몰라 빤한 걸로 준비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한봉이 들고 있던 꽃바구니를 최연하에게 내밀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최연하가 꽃바구니를 받아 들자, 고한봉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론 정치를 잘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인으로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실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잘 파악하는 것이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리님!”
최연하가 희희낙락하며 꽃바구니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의문 어린 표정을 짓더니, 꽃바구니 손으로 손을 쑥 밀어 넣어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없는데?”
“……예?”
“아니, 정말 꽃만 들었네요.”
“…….”
“이상하네. 안에 흰 봉투가 있어야 하는데.”
최연하의 의문 어린 시선을 마주한 고한봉이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땀을 닦아냈다.
“그…… 요즘에는 그런 거…….”
“암암리에 다 한다고 하던데.”
“…….”
최연하가 궁시렁거리며 꽃바구니를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그녀가 ‘봉투도 안 넣을 거면 먹지도 못하는 꽃을 뭐 하러 사 왔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고한봉은 필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외면했다.
“영 마음에 담긴 것 같지 않은 선물이지만, 잘 받겠습니다.”
언제부터 사람의 마음이 빳빳한 현찰과 동의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넘어가 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휠체어를 타셔야 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강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크게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 회주님.”
고한봉이 눈에 띄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인의 감정 표현을 대놓고 믿는 건 멍청하게 보이겠지만, 적어도 강진호의 눈에는 그 과장된 한숨이 연기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회주님께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고한봉을 빤히 바라보던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최연하와 시선을 마주한다. 그러자 최연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요.”
강진호가 고한봉을 다시 보고 입을 열었다.
“자리를 옮길까요?”
강진호가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그 두 눈에 담았다.
누군가가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할 만한 대화는 아니다 보니, 적당한 곳을 찾다가 결국에는 고한봉의 차에까지 타게 된 것이다.
“이쯤이면 될 것 같네. 여기 세워주게나.”
“예, 총리님.”
운전을 하던 비서가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는 슬쩍 고한봉을 돌아본다. 고한봉이 눈짓을 하자 비서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차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위잉.
고한봉이 차창을 열고는 빙그레 웃었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래도 일국의 총리를 만나는 자리다. 강진호도 그 정도의 경우는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고한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팔걸이의 수납함을 열었다.
열린 수납함 안을 바라본 강진호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수납함 안에 휴대용 재떨이가 들어 있던 것이다.
“담배 피우십니까?”
“회주님 같은 분이시면 냄새로 아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남의 냄새를 맡는 취미 같은 건 없어서요.”
“그건 그렇군요. 이해합니다.”
고한봉이 어깨를 으쓱했다.
“총리쯤 되면 담배 피우는 모습 하나까지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금연 구역이 많은 시대에는 회의 한 번을 위해서 대여섯 시간씩 금연을 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죠.”
“……잠시 나가서 피우고 오시면 될 텐데.”
“그게 또 사진이 찍혀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편히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차 안밖에는 없더군요.”
고한봉이 빙긋 웃었다.
“회주님께서 담배를 피워 주셔야, 제가 참은 걸 한 대 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쯤 되니 강진호도 더는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럼.”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자, 고한봉도 수납함 안에 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강진호가 손가락을 튕겨 그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신기하군요. 아니, 이제는 딱히 신기할 것도 없는 광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쓴웃음을 지은 강진호가 제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차창 밖으로 담배 연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담배를 피워 댔다. 그 짧은 침묵을 깬 쪽은 다름 아닌 강진호였다.
“어떻습니까?”
“글쎄요.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한봉이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우선…… 흑왕이 점거했던 핵미사일 기지는 탈환했습니다.”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다.
“흑왕에 찬동하던 이들이 순순히 해산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지만, 사실 그들이 문제였던 건 아니지요. 누군가가 발사 버튼을 누를지도 모른다는 게 불안 요소였던 거지.”
“그렇죠.”
“외부에 있던 이들은 중국 정부가 군사력을 투입해 모두 강제로 해산시켰고, 내부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트랩이나 자동 발사 시스템을 확인하기 위해 사흘을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무사히 발사 기지의 통제권을 회수했다고 하더군요.”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수나 위긴스는 기지 내부에도 흑왕에 동조하던 이들이 있을 거라 했지만, 여기까지 와버리면 그런 건 의미가 없어진다. 흑왕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고는요?”
“그 이후로는 딱히 진전이랄 게 없습니다.”
“진전이 없다고요?”
고한봉이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이십니까?”
“……조금 그러네요.”
그가 의식을 잃고 있던 것도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러니 그사이에 무언가 결정이 났을 거라 생각했다. 저들은 흑왕의 존재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협을 느꼈을 테니까.
물론 그 위협이 무인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는 효과는 분명 있었겠지만, 언젠가 제2의 흑왕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준 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진전이 없다라…….
고한봉이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적당한 사건이었다면 이미 결론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회주님, 이건 한 나라나 몇몇 지도자들이 결정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각국의 입장을 조율하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릴 일입니다.”
“그럴 만한 일입니까?”
고한봉이 피식 웃었다.
“회주님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를 집어삼킨 전쟁 속에서도 같은 편에 선 국가들의 입장을 조율하는 건 끝까지 불가능했으니까요.”
“…….”
“그리고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이유?”
고한봉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강진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한봉이 잠시 말을 고심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적대해야 할지, 아니면 협조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길들이거나 회유를 해야 할지.”
“…….”
“그 대상이 모호했다는 겁니다, 바로 어제까지는.”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이해하셔야 합니다, 회주님.”
고한봉이 진지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회주님께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회주님께서는 이제 무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
“설사 무인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될 겁니다. 전 세계가 연합하여 회주님의 확고부동한 지배를 지원할 테니까요.”
“……왜 그렇게 됩니까?”
“머리 없는 짐승보다 무서운 건 없지요.”
고한봉이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국에 살아가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범죄의…….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계속하세요.”
“예. 대부분의 국가는 범죄 조직의 수장이 사라지는 걸 그리 원하지 않습니다. 과거, 미국에 거물 범죄자들이 조직을 운영하던 시절, 미국은 그들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제거하고 나자 범죄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이가 사라졌고, 경찰을 겁내지 않는 조무래기들이 점조직화하면서 치안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죠.”
“…….”
“이건 단순히 미국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각국이 다들 비슷한 일을 겪었죠.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테러.”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국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이가 도심 한복판에서 벌일 수 있는 테러의 공포를 뼈저리게 깨달은 뒤입니다. 그 몇 번의 테러가 세계에 가져다준 충격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모두가 봐버린 겁니다. 마음먹고 일을 벌이는 무인들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음…….”
이해할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손에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충격이었을 테니까.
일반인이 그만한 테러를 벌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인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더욱 무서운 건 무인이란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겁니다. 더욱 공포스러운 건…… 우리에게는 무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고한봉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무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인이 필요하다.”
“바로 그렇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죠. 지금 이 시점에 한한다면, 무인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무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주님은 강력한 조직과 힘으로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죠.”
“…….”
“심지어 명분조차 완벽히 얻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를 비롯한 국가를 운영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다른 대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한봉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회주님께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적어도 다른 ‘대안’이라는 게 생기기 전까지 회주님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실 겁니다.”
고한봉이 말을 끝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한봉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가 빠져 있네요.”
“한 가지라 하시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겠죠.”
강진호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려 올라갔다.
“내가 당신들에게 협조하는 한은 말이죠.”
“회주님, 그건…….”
“하나 묻겠는데…….”
“…….”
강진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협조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차 안의 공기가 차게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