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12
#2111.
바라보다 (1)
이현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진지한 이야기라고는 하는 법이 없는 방진훈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달라 보이지만 다르지 않다.
그건 어쩌면 이현수조차도 놓치고 있던 이야기일지 모른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작게 헛기침을 한 이현수가 말을 이었다.
“스케일이 다를 뿐, 결국은 동일합니다. 다만, 이전에 한 일은 우리가 맡은 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한 것이라면,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다를 뿐이겠죠.”
이현수가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결국은 회주님이 하시던 일의 연장 아니겠습니까.”
강진호가 볼을 긁어 댔다.
“나는 그런 거창한 걸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걸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거창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딘가에 매몰되기 마련입니다. 이상은 작은 것을 크게 키워 나가는 거겠죠.”
“으음.”
강진호가 깊은 침음을 흘렸다.
그러자 장민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마존이시여.”
“응?”
그가 평소와는 다른,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마존께 제 목숨을 바치기로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존께서 하늘에서 떨어진 천신이 아니라…… 아니 맞기는 한데, 그게……. 어? 아, 아니, 이게 아닌데……. 제가 하려던 말이 뭔 소리냐면…….”
바토르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 영감탱이가 치매가 왔나.”
“닥쳐라, 이놈!”
바토르를 죽일 듯이 노려본 장민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은 마존께서도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뭔 소리야?”
장민이 작게 웃었다.
“저는 한때 마존의 강림만을 기다리며 살아갔습니다. 달아날 곳이 없던 제게 마존의 존재는 희망이자 절망이었고, 또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
“그런 제가 마존을 직접 배알했을 때 느낀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존께서 저희를 이상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장민의 표정이 조금 씁쓸해진다.
“하지만…… 시일이 조금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믿어온 마존 역시 세상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강진호가 장민과 시선을 마주치자 장민이 눈을 살짝 감았다.
“사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마존께서 교에 가지는 애정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마존이시여. 감히 서운함을 논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되레…… 오히려 그렇기에 저는 마존께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마존께서 과거 교의 유일무이한 존재셨다고는 하나, 그 인연을 이 먼 훗날에도 이어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그건 그저 부담이고, 그저 속박일 뿐입니다.”
강진호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장민이 하는 말이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존께서는 교도들을 긍휼히 여기어 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걸고 싸워 교도들을 지켜내셨습니다.”
장민이 눈을 떠 강진호를 똑바로 바라본다.
“저는 모르고 있던 거지요. 저는 마존께서 위대하시기에 그저 따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마존을 뵙고 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이 따라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음을, 오히려 너무도 위대한 자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아낄 수 없음을 말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자는 그 어떤 희생도 필요하지 않으므로.”
“…….”
“아낀다는 것은 스스로의 희생을 감수한다는 것. 마존께서 교를 어찌 생각하셨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거신 순간부터 마존은 저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따라야 할 존재가 되신 겁니다.”
강진호가 물고 있던 담배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낯 뜨겁게.”
“그저 제 생각입니다, 마존이시여.”
장민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저도 방 이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마존께서는 과거 중국에서 교도들을 이끌고 한국으로 들어올 때와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
“마존께서 교도들을 이끈 이유는 과거의 인연 때문이 아니시잖습니까. 그저 박해받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셨기 때문이죠.”
“그런 거창한 마음은 아니었어.”
“손끝에 박힌 작은 가시 같은 겁니다.”
“…….”
“불편하지만…… 참으려면 참을 수 있는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예.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장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타인의 고통을 제 손에 박힌 가시만큼이라도 생각하는 이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마존께서 나서신 것도 그때와 결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듣고 있자니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군.”
이사들이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강진호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금 강진호가 스스로를 대단치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겸양도 아니다. 그가 지금껏 이룩한 것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그냥 나는 발버둥친 것뿐이야.”
강진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어떻게든 해결하려다 보니 운 좋게 여기까지 온 거지. 그렇게 먼 미래를 본 것도 아니고, 대단한 가치를 지키려 한 것도 아니야. 그냥…… 그래, 우습지만 그냥 어쩌다 보니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겠지.”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바토르가 입을 열었다.
“한 번씩 보면 주인은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뭘?”
“그 사람 안에 얼마나 대단한 이상이 있든,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외치든, 그 안에 얼마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든.”
바토르기 비릿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의도로 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살아온 행적으로 하는 거지. 그 의도가 크든 작든, 혹은 선하든 악하든 남는 것은 그저 그 발자취뿐이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뭐, 여기에 있는 우리가 주인의 인성을 굉장히 높게 평가해서 주인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으응?”
“꿈 깨라, 주인.”
바토르가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 주인은 가진 것답지 않게 소심한데다가 남자치고는 쓸데없이 가정적이고, 일의 선후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이가 일만 생기면 어떻게든 남이 길을 뚫어주기를 바라는 한심한 남자다.”
강진호가 멍한 눈으로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강진호를 서글프게 만든 것은 바토르가 한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장민의 모습이었다.
‘왜 너마저?’
발끈한 강진호가 반발했다.
“아니,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가정적인 거랑은 관계없잖아.”
“그럼 뭐 그건 빼지.”
바토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주인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그 방식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그 방식으로도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아무리 우리 방식이 맞다고 우겨봐야 결국 주인이 만들어낸 결과가 우리보다 우월하다면 그냥 주인이 맞는 거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걸 이해하는 사람들이고.”
바토르가 턱짓으로 이현수를 가리켰다.
“저 머리 좋은 놈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인의 결정을 따르고 보는 것도 그런 거지. 머리는 머리일 뿐이야. 그게 항상 옳은 건 아니지.”
“세부적으로는 좀 다르지만…….”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인정합니다. 크게 보면 맞는 말이죠.”
“그러니 주인…….”
바토르가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
“…….”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주인이 해오던 일이지. 그저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좀 더 커지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좀 더 많아졌을 뿐이다. 고민을 하든 고민을 하지 않든, 결국 주인은 주인다운 방식을 선택할 거다.”
바토르가 소파에 등을 기댄다. 튼튼한 소파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댄다.
강진호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바토르가 어색한 얼굴을 한다.
“놈이 여기 있었다면…….”
“…….”
“분명 지금처럼 말했을 거다. 아마도…….”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바토르가 말하는 놈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위긴스.’
정말 위긴스가 있었다면 바토르처럼 말했을까?
그래, 아마 그랬을 것 같다.
조금 더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했겠지만, 결국 그 말의 내용은 다르지 않았겠지. 어쩌면 위긴스는 장민보다 더 그를 믿어준 사람이었으니까.
강진호가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사들이 차분히 그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던 대로라…….”
강진호가 옅은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말해봐야 나는 내가 하던 게 뭔지 잘모르겠는데.”
“……주인이 뭐 그렇지.”
“하지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해야 하는지는 알겠어.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야겠지. 이현수.”
“예, 회주님!”
이현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홍왕계, 원탁과 협조해서 각 지역을 대표할 만한 이들을 추려 달라고 해. 영향력이 닿는 안에서는 직접적인 통제에 들어갈 거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엇을 최우선으로 하시려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우선은 모양을 갖추는 거지.”
“……그 말은?”
강진호가 담담하게 말한다.
“적당히 무인계를 대표한다는 말로는 저들을 테이블에 앉힐 수 없을 거야. 실권이 없는 대표자를 상대해 줄 만큼 한가한 이들이 아니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좀 더 선명한 무언가가 필요하겠지. 홍왕계와 원탁을 넘어서, 현재 존재하는 작은 단체들까지 모조리 끌어들여 연합한다.”
방진훈이 허리를 쭉 폈다.
말이 연합이지, 이건 정말 무인계를 일통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연합을 한 이들이 강진호에 지시에 따르게 된다면, 그게 일통과 다를 게 뭔가.
‘진짜 이날이 오는구나.’
방진훈이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강진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상황이 길어져서 좋을 건 없겠지. 양측에 전해서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라고 해. 이 실장도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찍어 눌러.”
강진호가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단, 살인은 안 돼. 그건 확실하게 주지시켜.”
“명심하겠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귓가에 청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 망설이지 마.
그가 주저할수록 희생은 늘어난다. 지금 강진호에게 필요한 것은 단호한 결단력이다.
“틀어쥐어야 한다면 쥐어야지. 그래야 죽어간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테니까.”
모두가 단호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진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그저 믿을 뿐이었다.
“좋아, 시작하지.”
“예!”
총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