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14
#2113.
바라보다 (3)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강진호에게 전권을 받은 이현수는 재빠르게 원탁과 홍왕계에 협조를 구했다.
그러고 나서 돌아온 반응은 이현수의 예상 이상으로 긍정적이었다.
[위임한다고 하지 않았나?]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이커창의 짜증 어린 목소리에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전달은 해야 할 것 아냐.”
[적당히 알아서 해라. 이쪽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다.]“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는 하고 있는 거냐?”
[이해를 못하는 건 그쪽이지.]“응?”
이현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막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는 찰나, 차이커창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국제적 공조와 얼마나 발을 맞출 거라고 생각하나?]“…….”
할 말이 없어진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원탁이야 별문제가 없다. 총회와 바깥세상에 협조가 끝나면 유럽은 당연히 그 결정을 따를 테니까.
하지만 중국은? 중국이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중국이야. 대외적인 이미지는 물론이고, 실질적인 피해도 발생했지. 막대한 사람이 죽어 나갔어. 그런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여 결정된 조약 같은 걸 이 나라가 따라갈 것 같나?]“……아니겠지.”
[그래. 그러니까 이쪽도 최전선이다, 이 말이야. 멍청하게 굴지 마.]이현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강진호와 총회의 상황만 신경 쓰다 보니, 이런 상황까지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정신 없겠군.”
[몸이 다섯 개쯤 되면 좋겠군.]수화기 너머로 차이커창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은 어때?”
[좋지 않지. 중국은 나라 안에 특정한 목적을 가진 집단이 생기는 것에 노이로제가 있는 나라란 말이지.]“그렇지.”
[그런데 하필이면 흑왕 놈이 요구한 무인 자치구가 중국 내에 있었잖나. 멍청한 놈이 벌집을 쑤셔 댄 거지. 내 생각에는 이번 승부에서 흑왕이 이겼다고 한들, 하하호호 웃으며 끝날 일은 없었을 거야. 저쪽은 지금 잔뜩 독이 올라 있어.]이현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다 끝났으니 이에 ‘없던 일로 합시다’라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테니까.
“이쪽에서 뭐 도와줘야 할 건 없나?”
[건방 떨지 마라, 이현수.]으르렁대는 듯한 차이커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회가 선수를 잡기는 했지만, 홍왕계는 아직 총회에 손을 벌릴 정도로 나약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무인계 최대 계파는 홍왕계라는 것을 잊지 말도록.]“예이,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감돈다.
이현수는 지금 중국에 있는 차이커창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음?”
[홍왕께서 총회와 주도권 싸움을 천명하셨다면 말이 달랐겠지만…… 지금은 홍왕께서도 마왕의 입장을 존중하고 계신다. 어쩌면 마왕보다 더.]“그 홍왕이?”
[그래.]차이커창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황이 달라진 거지. 예전에는 무인계의 일은 무인계로 끝났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 내의 무인계를 일통한다 하더라도 다른 일이 남아 있지. 이쪽을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저들과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며 점점 관계를 진전시켜야 하는 막중한 업무가 말이야.]“그것 때문에 다들 이 고생인 거지.”
[홍왕께서는 자신이 그 일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평생을 중국을 일통하는 데 바쳐 오셨는데, 이제 와 타국의 무인들까지 신경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시더군. 그럴 바에야 골치 아픈 일은 모조리 총회에 떠밀…… 아니, 총회에 맡기고 중국 내부의 상황에 집중하겠다고 하시는군.]“너, 잠깐 본심이 나온 것 같은데?”
[오해다.]“오해는 얼어 뒈질. 개새끼들.”
이현수가 쌍욕을 퍼부어 댔지만, 차이커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은 같은 것 아닌가?]“목적?”
[그래.]차이커창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홍왕께서 중원을 일통하려 하신 이유는 저 창왕이나 흑왕이 무인들의 삶을 위할 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기 때문이다.]“개소리하지 마, 새끼야. 그럼 우리한테는 왜 지랄했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 과거에 중원을 피바다로 만든 마교의 수괴가 되살아나서 박해받던 마교도들을 모조리 규합해서 국경 바로 옆에서 힘을 키운다는데, 너희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다 쓸어버렸겠지.”
[그런 거지.]차이커창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마왕은 의외로 상식적인 인물이었고, 무인들을 위해 목숨을 걸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협조하지 않을 도리도 없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른 방법도 없어. 지금 국외로 눈을 돌릴 만큼 우리 상황이 좋지가 못하거든.]“할 수는 있는 거냐?”
[우리는 홍왕계다.]차이커창이 다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왕께서 그럴 의도가 있으셨다면, 중국을 평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너희 총회도 부숴 버렸을 거다. 하지만…… 홍왕께서 평화와 안정을 천명하신 이상, 우리의 대립은 여기까지인 거지.]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그럴 힘은 있으시고?’라는 말이 입술 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꾹꾹 눌러 다시 밀어 넣는다. 패배를 인정하는 이의 마지막 허세를, 그 자존심을 짓밟는 건 승자의 도리가 아니다.
[여하튼 그러니 중국은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국외의 일은 도와주기 힘들겠군.]“중국만 잘 처리해 줘도 더 바랄 것 없어. 대신 입장은 우리 측과 맞추는 걸로 하지.”
[그럴 거다. 홍왕께서 그걸 원하시니까.]“알겠다.”
[이상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지.]전화가 매정하게 끊겼다. 끊어진 휴대폰을 빤히 바라보던 이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지간히 기분이 나쁜 모양이군.’
이런저런 변명을 대기는 했지만, 결국은 총회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저쪽에서 내건 조건은 중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 그 대신 대외적인 모든 부분을 총회의 입장에 따르겠다는 말.
총회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차이커창은 여전히 미련이 남는 모양이지만, 홍왕은 제 입장을 확실하게 정했다.
‘생각보다 그릇이 작은 건가?’
아니, 아니겠지.
이현수가 지켜본 홍왕이라는 사람은 의외로 그리 호전적이지 않다. 그는 처음부터 중화의 적통과 자부심을 논하던 이였지,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일본을 이용해 한국을 노리는 전략이라든가, 한국 내부에서 벌어진 홍왕계의 수작 같은 건 전부 다 차이커창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다.
차이커창에게 아무리 미련이 남았다고 한들, 홍왕계의 수장인 홍왕이 저리 입장을 정해 버리면 그에게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좀 아쉽긴 하군.”
중국 주변에는 작은 나라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중국이 그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준다면, 이현수도 일을 조금 덜 수 있겠지만…….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니란 말이지.’
어쨌거나 저들에게 국외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좋지 못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니까. 지금은 총회와 한길을 걷겠다고 천명했지만, 홍왕의 마음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중국 주변국들의 무인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중국을 포위해 둬야 한다.
“차이커창이 알면 지랄을 해 대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정치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애초에 이현수는 차이커창에 그리 좋은 감정이 없었다. 입장이 비슷해 서로 이해할 뿐.
“그럼 이걸로 일단 홍왕계는 됐고…….”
이현수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실장님.]“오랜만입니다, 나이트 무어. 그쪽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나이트 무어.
위긴스가 마스터 직을 역임하는 동안 원탁의 내부 관리를 위해 박아 넣은 영국의 나이트. 마스터와 위긴스가 둘 다 부재한 지금 상황에서 원탁의 실권을 잡고 있는 이였다.
새로운 마스터가 선출된다면 그 실권이야 순식간에 날아가겠지만, 마스터의 자리가 공석인 지금, 총회의 은근한 지지를 받고 있는 나이트 무어에 대항할 이는 원탁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원탁은 총회와 같은 길을 가는 데 거부감이 없습니다. 회주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원탁은 전폭적으로 회주님을 지지할 것입니다.]“반발은 없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꽤 다수가요.]이현수가 눈을 찌푸렸다.
“말씀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원탁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실장님. 원탁은 중국이나 한국의 체계처럼 제왕적인 권력이 통하는 곳이 아닙니다. 원탁의 정체성은 의회이고, 의회는 언제나 반대파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체제입니다.]“그렇긴 하죠.”
[총회에 대한 지지가 60%를 넘어 7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의회에서 70%를 확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으시겠죠.]70%라면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개헌도 가능한 수치였다.
“그 정도면 별문제는 없겠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신기하긴 합니다. 원탁이 총회에 그리 우호적인 곳은 아니었을 텐데. 마스터와 위긴스의 장렬한 죽음이 영향을 많이 끼쳤을까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물론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게 모든 걸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선택이 나온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상황 때문이겠죠.]“상황이라 하시면?”
[원탁은 단독으로 외부와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다른 무인계와는 다르게 원탁은 각국에서 차출하는 보조금으로 운영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이 무인계를 배척하기로 정한다면, 원탁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말라 죽어야 할 판이죠.]“그…….”
[생각보다 돈은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이현수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아뇨…….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그리 많다는 게 갑자기 너무 부러워서.”
머리에도 내력만 찬 무학 바보들과 대소사를 논의해야 하는 이현수의 입장에서는 원탁에서 논의되고 있는 ‘상식’이 눈물 나게 부러웠다.
생각해 보니 저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들. 무력만으로는 나이트가 되는게 불가능할 것이다.
[여하튼 그러니 원탁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견제의 의미로 마스터만은 반총회파에서 선출될 확률이 높으니 입장을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새 마스터가 선출되기 전에 결정을 끝내주셔야 합니다.]“원하신다면 나이트 무어께서도 마스터가 되실 수 있을 텐데요?”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이유는요?”
[마스터와 전대 마스터께서 이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가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권력에 욕심을 낸다면, 그들의 뜻마저 흐려집니다.]“으음.”
[지금은 그저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그분들이 바라는 일일 겁니다.]“일단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현수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원탁에 소속되지 않은 소국도 규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겠죠?”
[쉽지 않겠지만, 노력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럼.]이현수가 전화를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큰 산은 넘었군.’
아직 자잘한 일들은 남아 있지만…… 이제부터는 그의 몫이라기 보다는 강진호의 몫이었다.
‘잘해내시겠지.’
대책없는 믿음일지도 모르지만, 이현수는 정말 강진호만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는 강진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