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19
#2118.
풀어놓다 (3)
파도가 새하얀 포말과 함께 밀려온다.
해안으로 느릿하게 밀려 들어온 파도가 천천히 다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백사장에 앉은 강진호는 그런 파도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딱히 바다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호불호가 있는 게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딱히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왜 사람들이 가슴이 답답할 때 바다를 찾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너른 해안선을 보고 있으면, 꽉 막힌 것 같던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았으니까.
쏴아아아아.
파도가 천천히 밀려왔다 멀어져 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진호의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요?”
슬쩍 고개를 돌린 강진호가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자.”
“아, 네.”
최연하가 내민 커피를 받아 든 강진호가 컵의 뚜껑을 열었다. 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에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최연하가 강진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모래 묻는데.”
“털면 되지.”
음, 그래. 세상 쿨한 여자지.
“뭐야? 자기 차에 모래 떨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지금?”
“그런 건 아니고…….”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알아요. 우리 진호 씨가 그렇게까지 쫌생이는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완전히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
“양심적으로, 양심적으로.”
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진호를 보며 최연하가 깔깔 웃어 댔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궁상맞게 있으래요?”
“궁상 맞은 게 아니고…….”
“그래서 무슨 생각 하는데요?”
“그냥…….”
강진호의 시선이 다시 바다로 향한다.
“의미 없는 생각이죠. 그냥……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
최연하가 슬쩍 강진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강진호를 만나온 시간이 그리 적지 않지만, 이번처럼 강진호가 먼저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한 것은 처음이다. 그녀가 굳이 약속을 잡고 끌고 다니지 않으면 총회와 집을 오가는 동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강진호라는 걸 감안하면, 이건 꽤 중차대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연하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우리 진호 씨가 이번에는 또 무슨 고민을 사셨을까?”
“……사요?”
“네. 진호 씨, 고생을 사서 하는 타입이잖아요. 그것도 꽤 비싸게 주고 사는 타입.”
“…….”
최연하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에요? 생각보다 잘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음…….”
“어쨌거나 이번에 벌어졌던 일은 진호 씨가 온몸 던져서 잘 해결했잖아요.”
“그…….”
“덕분에 몸뚱아리가 걸레짝이 되기는 했지만, 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항상 있던 일이라 익숙해요. 이번에는 좀 특별하게 너덜너덜해져서 ‘저 인간, 이번에야말로 정말 뒈지는구나. 내가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장례식장에서 소복은 입어줘야 하나’ 고민하기는 했지만, 안 뒈진 게 어디야.”
“……많이 죄송합니다.”
강진호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놓고 욕을 하고 화내는 것보다 지금처럼 조곤조곤 말하는 게 열 배는 더 무섭다.
“여하튼 뭐, 해결의 의도와 방법, 과정,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해도 어쨌거나 진호 씨가 바라던 대로 된 거잖아요. 덕분에 이번에 기구도 창설된다고 하고.”
“반응이 많이 격한가요?”
“언제는 안 그랬나요?”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진호 씨가 과민반응하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진호 씨랑 사귄다고 기사 났을 때가 더 반응이 격했을걸? 당신이 워낙 미디어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강진호가 웃고 말았다.
최연하 나름의 배려다. 아무리 그래도 이 일이 그런 스캔들과 비교할 수 있는 급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결국은 다들 이해하게 될 테니까.”
“음…….”
“아니면 다른 내가 모르는 다른 문제라도 있어요?”
“문제라기보다는…….”
강진호가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잘되고 있죠.”
“그렇죠?”
“네. 뭐가 뭔지 모르지만, 뭔가 척척 진행되고 있는 기분이에요. 다들 이번에는 내가 많이 신경 쓰지 않도록 애써주는 것 같더라고요.”
“자기들도 양심이 있으면 그래야지.”
“…….”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다, 이 사람.
“그런데 글쎄요…….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게 정말 잘 되고 있는 건지.”
최연하가 말없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을 맞는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쓸쓸해 보였다.
“옛 친구 놈이 그랬어요. 갈등이 끝난 뒤에 그 세상을 이끌어 나갈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찐친인가 보네, 사람을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고. 그 정도면 콩깍지 아님?”
“…….”
강진호가 돌아보자, 최연하가 슬쩍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
“여하튼…….”
한숨을 푹 내쉰 강진호가 말을 이어갔다.
“놈은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물론…… 엄살 부리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제가 생각해도 꽤 잘해왔거든요.”
“올?”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저한테는 싸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
“그냥 싸우면 됐어요. 누가 막으면 옆으로 치워내고, 달라붙으면 걷어차고……. 네 그냥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됐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거죠.”
“음…….”
최연하가 볼을 긁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좀 이해가 안 가는 게…….”
“네?”
“진호 씨가 굳이 그 짐을 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
“이게 뭐랄까, 근자감? 답도 없는 자신감? 아니면 설레발? 그것도 아니면 캐리병? 이걸 뭐라고…….”
“거기까지.”
무슨 말 하려는지 이해했으니까,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고 사람 마음에 상처 주는 표현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음, 뭐, 그러시다면.”
최연하가 살짝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애초에 이건 진호 씨 혼자서 한 일도 아니고, 진호 씨 혼자만 얽혀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이건 거의 국가 단위를 넘어서 벌어지는 일 아니에요?”
“……그렇죠.”
무인들의 수만 생각하면 국가 단위라는 말이 좀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그 영향력이나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분포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걸 한 사람이 해결한다는 게 웃긴 이야기잖아요. 그건 모두가 노력하고,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죠.”
“…….”
“한 번씩 보면 진호 씨는 조선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요. 아니면 그 총회인지 무인인지 하는 양반들이 제대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숲속에만 숨어 살다 보니 사고방식이 조선 시대에 박혀 있어서 아직까지 ‘전하, 해결해 주시옵소서’를 외치고 있는 거든지.”
“……요즘 무슨 게임 같은 거 해요?”
“응? 뭔 게임?”
“그…… AOS라든가. 채팅 많이 치는 게임들.”
“왜? 딜량 터지냐?”
“…….”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아니, 뭐, 고민을 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닌데, 진호 씨는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하느라 힘든 게 아닌 것 같아요.”
“……네?”
“뭔가 잘못되면 그게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요.”
“…….”
그 말에는 강진호도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아무리 가볍게 생각하려 애써도 그게 쉽지가 않다.
“조금 편해지려고 애써도 봤는데, 생각처럼 잘 안 되네요.”
“……병이야, 병.”
최연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남자는 쓸데없이 책임감이 높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에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적당히 포기해 버린다. 잘못되더라도 자신의 탓이 아니니까.
하지만 강진호라는 사람은 자신이 해결하는 게 불가능한 거대한 일조차 결코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진호라는 사람이 좋은 거긴 하지만…… 이럴 때는 그녀마저도 속이 갑갑해진다.
“잘되고 있죠.”
“……네?”
강진호가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말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사람들의 반응도 생각만큼 격하지는 않고, 분명 반발할 거라 생각한 무인들도 예상 이상으로 잘 협조해 주고 있고.”
“흐응.”
“기적 같은 일이죠. 분명 여기까지 진행되는 동안 커다란 사건이 몇 개는 터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진호가 낮게 웃었다.
“어쩌면 최연하 씨 말이 맞는가 봐요. 제가 아니라 모두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겠죠. 여기서 파국으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요. 우리는 그 결과를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그럼 잘된 거잖아요.”
“네, 그렇죠. 정말 잘되고 있어요. 정말…….”
강진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네.”
“근본적인 건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
강진호가 깊이 감춰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정말 이걸로 다 되는 걸까요?”
“…….”
“무인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고. ‘우리는 절대 너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 좀 껄끄럽더라도 우리를 받아들여라’. 그렇게 반쯤 애원하듯, 협박하듯 강제로 세상을 뒤섞어 버리는 걸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걸까요?”
“진호 씨…….”
“좀 이상해서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는 해결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닌데. 이건 그저 반발을 눌러 버리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언젠가는 지금 내가 한 일 때문에 더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들거든요.”
최연하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기분은 최연하 역시 느끼고 있었다. 대놓고 반발하지는 못해도 불만에 찬 사람들의 눈빛을 그녀 역시 느끼고 있으니까.
“그래서…… 네,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강진호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쏴아아아.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온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새삼스레 생각해 보는 건데…….”
“네.”
“사람들은 왜 싸우는 걸까요?”
“……네?”
그 뜻밖의 질문에 최연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할 수 없는 질문은 아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는 하지만, 이상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상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질문이 강진호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빈 말로도 평화주의자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 강진호가 아니던가.
“수도 없이 싸웠어요, 저도.”
“…….”
“어쩌면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제가 가장 많은 싸움과 다툼을 겪은 사람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강진호가 바다 너머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는 제가 싸우는 이유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있더라고요.”
“…….”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해요. 스스로 싸워야 할 이유도 알지 못하고 사람을 죽여 대던 내가 이제 와 공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나. 정말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
“그래서 그래요, 그래서. 그냥…… 그래서.”
조금씩 음성이 낮아지는 강진호를 바라보던 최연하가 말없이 강진호의 어깨에 제 손을 올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따뜻한 커피가 점점 식어간다.
‘청마.’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넌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한 거냐.’
대답이 들릴 리가 없었다.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