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24
#2123.
내어놓다 (3)
“쇼를 하고 있군.”
팔짱을 낀 차이커창이 화면에 나오는 강진호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마왕도 급하긴 한 모양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의도는 이해하고 있다. 지금 세상은 끓어오르기 직전의 냄비에 담긴 물과도 같은 상태니까. 잠잠해진 것은 잠시잠깐의 적응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상황을 만든 것은 역설적으로 강진호의 부재였다.
무인들은 하나하나의 객체인 동시에 거대한 하나의 집단이다. 그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감정은 외부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끈적하다.
기본적으로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리는 이들은 종교와 사상, 인종과 국가를 넘어 하나로 뭉치기 마련이니까.
강진호가 흑왕을 이긴 순간, 무인계는 강진호의 움직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가 행동 방식을 정하지 않은 이상은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무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바깥세상 역시 강진호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과 접촉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 없는, 끓는 용광로 같은 이 세상이 강진호의 칩거 때문에 지금까지 터지지 않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법이지.’
상황에 적응한 이들은 결국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강진호가 저리 나서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불타오르기 전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하고 싶을 테니까.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도 차이커창이 지금의 강진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지만 저건 저들의 방식이지.”
일반적인 세상에서는 권력을 쥔 이가 미디어에 나서고 자신이 대표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무인의 세계는 다르다.
지금 강진호가 가진 대표성은 그가 가진 힘과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것. 그가 지금처럼 대중 앞에 나서서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그가 가진 힘과 권위를 의심하는 무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충돌을 막기 위해서 분열을 조장하다니, 내가 아는 마왕이 맞기는 한 건가?”
한때 강진호의 적이었던 그이기에 알 수 있다. 강진호라는 이가 적이 되었을 때 얼마나 두려운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두려운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강하고, 그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람이라서지.’
강진호와 총회가 중국 바로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던가. 그때, 자신이 느낀 두려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차이커창이다 보니 지금 강진호가 하는 일련의 일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마 그의 입으로 흑왕의 방식이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홍왕의 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방식에 일리가 있었다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친절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이다. 호의는 언젠가 반드시 한계를 드러낸다.
무기를 두르고 벼랑 끝에 서야 할 이가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버리는 순간, 남은 것은 적의 자비를 갈구하는 것밖에는 없잖은가.
“멍청한 짓을…….”
“글쎄.”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차이커창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홍왕을 뵙습니다!”
“음.”
차이커창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TV에 정신이 팔려 홍왕께서 오시는 것도 알지 못한 모양이다.
“확실히…….”
하지만 홍왕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내 방식과는 다르지.”
“예.”
차이커창이 숙인 허리를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좋은 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잠시잠깐 봉합하는 데는 도움을 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들이 무인들을 우습게 볼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니까요.”
“…….”
“조금만 압박하면 먼저 고개를 숙이는 이들. 그런 이들이 얼마나 상대하기 쉽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홍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정말 마왕이 그런 걸 몰라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차이커창이 입을 다물었다.
이 질문은 그도 받아치기 힘들었다. 그도 알고 있으니까, 저 강진호라는 이가 의외로 굉장히 똑똑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싸울 때 보이는 악마 같은 모습과는 달리.
“나는 너를 굉장히 높이 평가한다. 그건 굳이 이제 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
“영광입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한다.”
“……어떤?”
홍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이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이의 입장은 다르다.”
“…….”
“참모가 내놓아야 하는 것은 최선의 방책이다. 가장 옳은 길을 제안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이지.”
“예, 그러합니다.”
“하지는 위에 선 이는 그래서는 안 된다.”
“…….”
“위에 선 이가 해야 하는 것은 최악을 막는 것이지. 더 많은 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상황이 악화되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그건…….”
차이커창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보며 홍왕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이커창은 자신이 세운 전략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되는 입장에서 싸워왔으니까. 스스로 하지 않은 일조차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가진 부담을 겪어본 적 없으니까.
“네 말대로 대립각을 세운다면 무인들의 입지가 더 올라갈지도 모르지.”
“예.”
“하지만 그게 영원히 이어지겠는가?”
“……지속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 년?”
“…….”
“아니면 백 년?”
차이커창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정확한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기억해라, 차이커창.”
“예.”
“이건 언젠가는 지는 싸움이다.”
“……예?”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저들을 이기지 못해. 지금 당장은 전략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패배하게 될 것이다. 이미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그 말에는 반박을 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힘으로 저들을 위협해 우리의 권리를 얻어낸다면 당장은 편해진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저들의 적으로 남게 되겠지.”
“…….”
“인간은 적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히나 나와 다른 적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지. 늑대는 길들여 개로 만들고, 범은 모조리 잡아 죽여 가죽으로 만들어 감히 인간이 사는 곳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
“…….”
“그래도 늑대와 범은 살아남았지. 그런 것들은 인간이 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결국 우리도 사람이니까.”
차이커창이 눈을 감았다.
“남는 것은 둘 중 하나겠지. 저들의 틈에 섞여 언제 저들이 우리를 압도할 힘을 손에 넣을지 떨면서 살아가든가, 그게 아니면 저들과 섞이지 않는 우리만의 세상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사이좋게 몰살당할 순간까지 모르는 척 살아가든가.”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쪽이든 가짜 평화일 뿐이야.”
차이커창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전히 그의 생각도 그리 틀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왕의 말처럼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힐 일인 것도 인정해야 한다.
“위에 선 이는 후대에 그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마왕이 저리 나서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홍왕이시여.”
그럼에도 차이커창이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지금 마왕의 방식은 홍왕께서 말씀하시는 파멸을 앞당길 뿐이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이번에는 홍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홍왕이 화면에 나온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마왕이라는 자는 확정되어 있는 패배를 외면하고 지금의 안온함을 즐기는 이가 아니다. 그런 이였다면 내가 이겼겠지.”
“…….”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패배할 싸움이기에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 적어도 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게 마왕의 생각이겠지.”
“그 방법이란 게…….”
“지켜보면 알겠지.”
홍왕이 턱짓으로 TV를 가리켰다.
“물론 이번 한 번에 무언가 대단한 것을 내놓는 건 마왕이라 해도 쉽지 않겠지. 하지만 그게 뭐가 문제더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이가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멍청한 우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
“기다리고 지켜보면 될 일이다. 내가 아는 마왕은 포기하지 않을 이니까.”
“……예.”
홍왕이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우스운 일이지.’
설마 그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불과 한 해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패자.
모든 것을 자신이 짊어지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겠지.’
홍왕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상대가 마왕이라면 천하의 홍왕이라 해도 믿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기억해라,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저 자리에 가장 서고 싶지 않아 한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강진호다.”
“…….”
“그는 이미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네가 말하는 대로 해도, 저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도, 아니…… 어떤 방법을 선택하더라도 날만 세우지 않는다면 남은 그의 여생은 황제의 삶과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차이커창이 입을 닫았다.
그 말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마왕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 자리에 선 것이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노출한 이상, 앞으로 무인들이 벌이는 모든 일은 다름 아닌 마왕의 책임이 되겠지.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가시밭길을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
“그래도 네 생각과 다르다고 비웃겠느냐?”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홍왕이 피식 웃었다.
“저쯤 되어버리면 나도 도리가 없지. 나는 절대로 저런 짓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릇의 크기가 달라.”
“……성향이 다른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차이커창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은 홍왕이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서 있는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마왕이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홍왕계는 전력으로 마왕을 지원한다.”
“……예.”
“그리고 마왕이 직접 나서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명을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으로 나서서 처리해라.”
“그 말씀은…….”
홍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 일이라는 게 그런 법이지. 누군가는 더러운 일에도 손을 대야 하는 법이다. 가장 앞에서 가장 많은 화살을 맞을 이에게 그런 일까지 시킬 수는 없지.”
그가 고개를 돌려 차이커창을 바라보았다.
“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리하겠습니다.”
홍왕이 시선을 돌려 다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어깨 위에 올려진 중압감이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만 같다.
‘마왕이여.’
홍왕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