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34
#2133.
돌아오다 (3)
세상은 급격하게 바뀌어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생각이 달라졌고, 사고가 달라졌고,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눈빛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의 모습은 과거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안심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뭐가 그렇게 뚱해요?”
“아닌데요?”
“뚱한데?”
“아니, 정말…….”
“저기요, 진호 씨.”
“네?”
최연하가 강진호를 홱 바라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쯤 되면 당신보다 내가 당신 상태에 대해 더 잘 알지 않을까?”
“…….”
강진호가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뭔가 반박이 잘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 진호 어린이,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이야기해 보세요.”
“아니, 불만이라기보다는…….”
“뭐요?”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 화려한 간판들로 가득한 번화가 길거리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기, 벌써 몇 바퀴째 그냥 돌고 있는 것 같은데.”
“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짓을…….”
최연하가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적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단순함이란.”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니, 지금 분명 뭔가 욕한 것 같은데.
“그래서 싫어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됐잖아요.”
“…….”
그도 맞는 말이긴 하다.
“딱히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닌데…… 굳이 왜?”
“그냥요.”
최연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데이트.”
“…….”
“평범한 데이트라는 거예요.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냥 돌아다니고, 아무 데나 괜찮은 데가 보이면 들어가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강진호의 눈썹이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자, 최연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해 줘서 영화 보러 가자고는 안 했잖아. 좀이 쑤셔 죽으려고 하는 카페도 가자고 안 했고.”
“…….”
“요즘 계속 차 타고 어디 가기만 한 것 같아서 그냥 같이 걸어보고 싶었어요. 무슨 문제라도?”
“문제…….”
“그럼 영화관. 콜?”
“아무 문제 없습니다.”
“좋아요?”
“행복합니다.”
“그럼 된 거지.”
최연하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연하의 시선이 다시 닿는 순간, 강진호가 반사적으로 싫어서 한숨을 쉰 게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려 했다. 하지만 최연하가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냥 이래 봐요.”
“……네?”
“꼭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생각 없이 걸어봐요, 진호 씨.”
“…….”
“앞으로는 진호 씨도 이런 걸 눈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죠?”
강진호가 말없이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당신 세상은 너무 넓은데, 반대로 너무 좁아요. 중간이 없어. 평범하게 그냥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살아본 적이 없잖아.”
“……그렇긴 하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면서요? 이해해 주길 원한다면서요? 그럼 진호 씨도 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해야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이렇게 먼저.”
멍한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네요.”
“다 누나가 깊은 뜻이 있어서 데리고 나온 거란 말씀.”
“…….”
꼭 한마디 더 붙이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나쁜 생각은 아닌데.”
“네.”
“……진짜 괜찮을까요?”
강진호가 주변을 둘러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최연하와 강진호를 힐끔대고 있었다.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아본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이미 수많은 이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겠지만…….
“왜, 좋은 실드 하나 생긴김에 써먹어야지.”
“……실드?”
“진호 씨 무서워서 아무도 못 오잖아요.”
“…….”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자, 최연하가 웃으며 강진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뭐, 덕분에 평범하게 데이트하는 기분도 내보고 좋은 거죠.”
“정말 좋은 거예요?”
“익숙해질 거예요.”
“……예?”
“저 사람들도, 진호 씨도.”
최연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강진호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상하겠지. 그리고 어색하겠지. 불편하기도 할 거예요.”
“조금 그러네요.”
“진호 씨만이 아니라 저 사람들도요. 그런데……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그 사흘이 한 달, 일 년이 되다 보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질 거예요.”
그 말을 들은 강진호가 새삼스런 눈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되는 날이 올까?
“그때가 되면 진호 씨도 나도 정말 평범해지겠죠. 아니, 평범하다기보다는 익숙한 사람이 되겠죠.”
“…….”
“그러니까…….”
최연하가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걸어요. 좀 창피하긴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질 테니까.”
강진호가 최연하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짱을 낀 최연하의 손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최연하라고 해서 이 상황이 마냥 편할 리는 없다. 어쩌면 강진호보다 최연하가 배는 더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최연하는 강진호를 끌고 이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건 결코 최연하의 말처럼 그녀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부쩍 차가워진 공기가 더는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내디딘다.
보조를 맞춰서, 같이 걷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서.
여전히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진다. 힐끔대듯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들.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아니, 어쩌면 시선이 아니라 평소에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던, 사람 가득한 이 밤거리가 어색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디디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시선들마저 조금은 익숙해져 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슨 생각 해요?”
조심스러운 목소리.
강진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난다.
“생각만큼…… 네. 생각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
“흐음?”
“그리고…….”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시선과 그의 눈이 마주친다.
“조금 더 걷고 싶다는 생각.”
“정말이요?”
“아니.”
강진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하게는 아니네요.”
“그럼요? 정확하게는 뭔데요?”
“조금 더…….”
강진호가 작게 미소지었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조금은 쑥스럽다.
“당신과…….”
작은 머뭇거림 끝에 강진호의 입에서 그의 온전한 진심이 흘러나온다.
“같이 걷고 싶다는 생각.”
“…….”
최연하가 멍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다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한 바퀴쯤 더, 어쩌면 몇 바퀴 더. 아니면…….”
그럼에도 해야 하는 말이 있다.
“이대로 계속, 평생 동안.”
강진호의 팔을 잡은 최연하의 손이 가볍게 떨려온다.
강진호는 그런 최연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재촉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지금은 그래야 할 때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타이밍 진짜 이상하게 잡네.”
“…….”
“주변에 사람도 너무 많고.”
최연하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그녀답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녀답게.
“그래도…….”
최연하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조금 물기가 어린 눈을 한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내가 죽기 전에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조금 늦었나 보네.”
“많이 늦었죠, 많이. 너무 많이…….”
최연하의 손이 강진호의 팔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럼 어디 걸어봐요. 오늘 해 뜰 때까지.”
“……발 아플 텐데.”
“배우 체력을 얕보지 마시라고.”
최연하가 달아오른 얼굴로 강진호를 끌며 앞으로 나갔다. 강진호가 작게 웃어버리고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간다.
이상하지.
조금 전까지는 그토록 어색하던 시선들이 더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의 세상에는 지금 온전히 최연하만이 존재했다.
그래. 오직 그녀만이 이곳에 있다.
“대답은?”
“……뭘 대답까지 들으려고 해.”
“그래서 대답은?”
“안 해줄 거예요.”
“……네?”
최연하가 쌤통이라는 듯 웃었다.
“내가 대답을 하라고 그만큼 재촉을 했을 때는 끝까지 모르는 척했잖아.”
“진짜 몰랐던 건데.”
“여하튼. 그러니까 이제는 진호 씨가 기다릴 때예요. 내가 대답하고 싶을 때 대답할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요.”
“얼마나요?”
“나야 모르지. 어쩌면 평생일지도 모르고.”
“……악독하네.”
“나 원래 그런 여잔 거 몰랐어요?”
강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최연하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지. 그래도 한 삼십 년쯤 지나면 대답해 줄지도.”
“……삼십 년이나?”
“어쩌면 더 늦을 수도 있고.”
뚱한 목소리. 하지만 뚱하게 들리지만은 않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강진호가 웃어버렸다.
“삼십 년 뒤에도 여기 와야겠네.”
“그럼 안 오려고?”
“그러면 됐어요.”
대답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들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더 많은 것을 직접적으로 나누고, 더 확실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답지 않으니까.
그저 믿을 뿐이다.
먼 훗날에도 그들은 여전히 어색하고, 여전히 서툴고, 여전히 한심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같이 걷고 있을 거라고.
세상이 바뀌고, 거리가 바뀌고, 지나는 사람이 바뀌고. 그들마저 지금 같지 않게 늙어가도…… 그래도 여전히 이렇게 함께 걷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강진호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은 오지 않는다. 비도 내리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우중충한 서울의 검은 하늘뿐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특별하지 않으니까, 최연하가 그의 곁에 있는 이 시간이 그에게 있어 딱히 특별하지 않은 시간이어도 된다는 의미니까.
그가 아무것도 아닌 저 검은 하늘에 의미를 만든 것처럼.
이제는 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에 의미를 만들어갈 것이다.
강진호가 손을 살짝 올려 그의 팔에 올려진 최연하의 손을 맞잡았다. 못 이긴 척 손을 내준 최연하가 조금은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 말았다.
“진호 씨.”
“네?”
“행복해요?”
“…….”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최연하를 바라본다.
이번에는 최연하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과 그녀의 눈이 서로를 부드럽게 바라본다.
글쎄, 어떨까?
과거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었다. 이곳으로, 이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네.”
강진호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걸린다.
“행복해요.”
어쩌면 그는 이 대답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최연하의 입가에도 강진호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나도요.”
맞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간다.
“그럼 갈까요?”
“네.”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심한 듯 스쳐 가는 인파, 귀에 들려오는 소음, 시선 가득 들어오는 불빛들.
화려하지만 무심한 세상. 그 세상을 향해 두 사람이 나아간다.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그렇게 한동안.
어쩌면……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