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35
#2134.
돌아오다 (4)
한 사람이 앉아 있다.
낡은 휠체어에 앉아 처진 어깨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이.
잿빛으로 죽은 눈빛이 창밖의 세상을 그저 응시한다. 그는 가질 수도 없고, 섞여들 수도 없는 세상을.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
힘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눈빛, 아무것도 남지 않아 텅 비어버린 동공.
그 시선을 바라보는 이마저도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은 눈이다. 그 안쓰러운 눈으로 한참 동안 강진호를 바라보던 이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될 거라고 생각해?”
“…….”
강진호는 대답 없이 사내를 바라보았다.
“알잖아, 세상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 목소리에는 수많은 회한이 묻어 있다.
그래, 강진호도 알고 있다. 세상이 얼마나 차가운 곳인지, 세상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이미 느껴봤으니까. 질리도록 처절하게.
아무리 같은 인간이라 외쳐도 그 눈빛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다를 게 없다고 소리쳐도 편견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이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해? 정말?”
“……글쎄.”
사내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제 안에 담긴 심경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모르겠다, 솔직히.”
“…….”
“노력할 거야. 애쓰겠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볼 거야. 하지만…….”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그렇다 한들 아무 소용도 없을 수 있다는 걸. 아니, 어쩌면 그럴 확률이 더 높다는 걸.”
“그런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하지?”
“…….”
“알고 있잖아.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쯤은 편히 살 수 있어. 고개만 돌려 버리면 행복은 이미 보장되어 있어.”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굳이 네 발로 가시밭길을 걷겠다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을 위해서?”
“…….”
“멍청하고 어리석어.”
“너처럼?”
“그래, 나처럼.”
사내가 처연하게 웃었다.
“그래서 우스운 거지. 그렇게 많은 걸 겪었는데 너는 나와 다를 게 없으니까. 여전히 멍청하고 어리석지.”
“…….”
“말해봐. 왜 그랬어?”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사내가 바라보고 있던 창밖의 세상이 들어온다.
저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바라보는 세상.
그래, 그 세상은 한때 강진호에게 있어서는 희망이었고, 또한 절망이었으며, 바람이었고, 동시에 울분이었다.
“너도…….”
강진호가 사내를 보며 말했다.
“저기로 가고 싶었지.”
사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애초에 네 잘못이 아니었잖아.”
“그만해.”
“그건 사고였지.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었어.”
“…….”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너 역시 사고를 당한 피해자였어. 불운했지. 하지만…… 가족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 그 자체로 죄일 수밖에 없었어. 살아 숨 쉬는 것마저 죄스러웠지.”
“그만하라고.”
“그래서야.”
강진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몸이 불편하다고 해도 거기까지 나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을 텐데. 그저 조금 힘을 낼 용기가 없던 거잖아.”
“…….”
“그래서…… 그래, 그래서 하기로 한 거야.”
사내가 가라앉은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본다.
“후회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 거야. 그리고…… 후회 같은 걸 무서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도 이제는 알잖아. 지켜봤을 테니까.”
사내가 빤히 강진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지.”
“…….”
사내가 작은 미소를 머금는다.
조금은 처연하고, 조금은 씁쓸한. 지금의 강진호와는 많이 다른 미소를.
“나는 네게 뭘 남겼지?”
“잃은 것은 내버려 둔 채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강진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결국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
“그래…… 그거면 됐어. 그럼 내 삶도 가치 있었겠지.”
강진호가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 작고 처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금 강하게 사내의 어깨를 움켜잡은 강진호가 사내를 지나 걸어간다. 작은 방을 넘어서 길고 긴 어둠 속을 걸어간 강진호가 또 다른 사내를 마주했다.
전신을 투기로 뭉쳐 놓은 것만 같은 사내.
질식할 것과 같은 적의와 기이할 정도의 허무함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사내를.
사내가 들끓는 눈으로 강진호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일하군.”
묵직한 저음이 강진호의 귀를 파고든다.
“정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얻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방해하는 이들을 모조리 없애는 것.”
“…….”
“그 외에는 어떤 방법도 불완전하다. 알고 있을 텐데?”
“그래, 알고 있다.”
강진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저자가 말하는 것이 강진호가 살아온 방식이다.
“그런데도 타협하는군.”
“…….”
“묻어둔 문제는 언제고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정말 해결을 원한다면 싸웠어야지. 세상에 피를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 따위는 없어.”
“알아.”
“안다고?”
사내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는데도 그런 짓을 해 대는 건가? 청마가 지하에서 너를 보며 뭐라 할까?”
“잘하고 있다고 하겠지.”
“…….”
강진호가 사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묻어두는 것도 아니야. 부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뿐이지.”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지?”
“…….”
사내가 입을 닫자 강진호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 모조리 부쉈다. 막는 이들은 모두 치워냈지. 하지만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언제나 새로운 적이 생겨났지.”
“…….”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알 수밖에 없다.
싸우고 또 싸웠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 순간 다시 적이 나타났고, 결국은 그 적에게 패했다.
“멍청했지. 한 번 한 실수를 다시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아니야.”
“두려운가?”
“두려워한 건 내가 아니야. 너지.”
강진호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다른 방식은 생각할 수 없었지. 또 실패할까 봐 무서웠으니까.”
“…….”
강진호가 마주 선 이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로 살아갈 때, 나는 첫 번째 삶보다 나은 내가 되었다고 믿었지. 허무하고 텅 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어쩌면 폐부를 찔렸다는 듯.
“네가 이룬 것 중 네가 원한 건 아무것도 없어. 원치 않은 것만 이루어놓고 무언가라도 했다고 위안했을 뿐이야.”
“…….”
“그래서 찾은 거야. 얻을 방법을, 내가 싸울 수 있는 다른 방식을.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내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있나?”
“자신 같은 건 없어.”
강진호 역시 피식 웃어버렸다.
“해야 해서 하는 일이니까. 자신이 없어도 할 수밖에 없잖아.”
“고개를 돌리면 후회도 없을 텐데?”
“그래. 그럼 후회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얻고자 하는 걸 얻을 순 없어.”
“……뭘 얻고 싶은가?”
강진호가 입술을 뗐다.
조금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말.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게 된 말.
그 말을 전한다. 지금의 자신에게, 그리고 과거의 그에게.
“행복.”
“…….”
“처음부터…… 그래, 첫 번째 삶부터 지금까지 내가 얻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었어. 행복. 행복하고 싶었지.”
사내가 눈을 감는다.
“알아,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네가 만약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래,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야.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분명 그랬겠지.”
“…….”
“그러니 이제 그만 쉬어.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내가 짊어질 테니까.”
사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조금 짙어진다.
“강하구나.”
그건 특별한 말이었다.
저자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더욱.
강진호가 천천히 걸어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나아간다는 게 잊는다는 건 아니야.”
“…….”
“잊지 않는다. 지금의 내 삶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단 한시도 잊지 않아.”
사내가 쿡쿡대며 웃었다.
“거창한 말도 할 줄 알게 되었군.”
“…….”
“그래, 그것도 네가 선택한 전장이겠지. 하지만 잊지 마라, 강진호. 세상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적이 없었어.”
“…….”
“그러니 정말 그렇게 결정했다면…… 반드시 얻어내라. 네가 실패한다면 우리마저 영영 실패한 게 되어버릴 테니까.”
“그래, 그럴 거야.”
“가라.”
사내가 강진호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여기서 지켜볼 테니까. 기억해. 네 삶을 지탱한 게 우리였다는 걸.”
고개를 끄덕인 강진호가 사내의 어깨에서 손을 뗀다. 그러고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둡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무도 짙고 어두워서 발을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아마 그가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은 이런 길이겠지. 지금껏 그를 지탱해 주던 방식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두렵다.
그래, 솔직히 두렵다. 강한 척은 했지만, 한 걸음을 잘못 내디디는 순간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까 봐 두렵고 겁이 난다.
그가 내린 선택 때문에 지금 겨우 손에 넣은 작은 것들마저 사라질까 봐, 이 모든 게 어쩌면 그의 욕심에 불과할까 봐.
하지만 그럼에도…….
저벅.
강진호는 앞으로 걸었다.
알고 있으니까.
두렵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세상이 그를 버려두고 떠날 뿐이라는 걸 첫 번째 삶에서 배웠으니까. 두려움을 이기고 싸우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두 번째 삶에서 배웠으니까.
지금 그가 얻은 모든 것은 지난 두 번의 삶이 만들어준 것이다.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미련을 담아.
그곳에 있다.
그가 지나온 두 사람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이되 그가 아닌 이들. 하지만 분명 그인 이들.
그 두 사람이 부드러운 눈으로 응원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강진호가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쥔다.
마지막이라는 듯 두 사람의 모습을 그 눈에 담은 강진호가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발을 내디딘다.
짙디짙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강진호의 발걸음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믿고 있으니까.
이 어둠의 끝에 그가 찾는 빛이 있을 거라고, 나아가고 또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안녕히.”
그를 지탱해 준, 그리고 앞으로도 지탱해 줄 이들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
가만히 눈을 감은 강진호가 저 어둠 너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향해 서두름 없이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