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30
#229.
개업하다 (4)
박유민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 굳이 찬찬히 따져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양팔에 하나씩, 양다리에 둘, 그리고 등에 둘을 붙이고 있는 강진호는 그가 사 온 것이 합체 로봇인지, 아니면 본인이 합체 로봇인지 진지한 성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팔다리에 붙은 파츠들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그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실패한 합체였다.
“밥 먹었어?”
“……너하고 우리 엄마의 공통점을 알려줄까?”
“안 들어도 될 것 같다.”
박유민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애들 장난감을 사 왔다. 좀 큰 애들은 뭘 줘야 할지 모르겠더라.”
“앞으로는 이런 거 하지 마라.”
“음…….”
뭔가 포스가 넘치는 박유민의 말에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애들한테도 뭘 해주려고 하지 마. 잠깐 들르라고 한 건데, 이런 거 사 오면 부담스러워서 내가 못 오게 할 거야.”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형이 무슨 자격으로 진호 형을 못 오게 해!”
이번에 대학생이 된 철민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 우린 이제 얹혀사는 거야. 거, 덤처럼 붙은 인생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면 소박맞아요.”
“으…….”
논리에서 밀린 박유민이 몸을 들썩였다.
“진호 형, 형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유민이 형 이제 그런 권력 없어요.”
“오!”
강진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박유민의 얼굴이 벌게졌다.
“반란이냐?”
“……거, 말년 병장 놀이 그만하시고, 얼른 집이나 구해서 나가. 돈도 있는 양반이 왜 자꾸 이런 데 붙어 있나 몰라. 아줌마들이 형 눈치 보더라. 다 큰 남자가 있으니 좀 이상하다고.”
“너는!”
“……나도 나가야지. 그러니까 형, 나갈 때 집에 나도 좀 데리고 가주면 안 돼?”
“내가 너를 데리고 나가느니, 안 나간다.”
“에이!”
이철민이 투정을 부리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강진호가 슬그머니 말했다.
“얘들 좀 떼어주고 가면 안 되냐?”
“……형, 그건 저도 못 떼요. 포기하세요. 배고프면 떨어져요.”
“그래?”
이철민이 씨익 웃으며 강진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큰 애들은 옷이나 휴대폰요. 아니면 태블릿.”
“알았다.”
“야, 이철민! 너 인마!”
“와, 유민이 형 열 받았다. 저 도망가요!”
이철민이 낄낄대며 밖으로 달아나자 박유민이 씩씩대며 말했다.
“저건 언제 철들려고.”
강진호가 씨익 웃었다.
집과는 다른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뭔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아이들 때문에 적응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어빠, 어빠.”
“음…….”
강진호가 오른팔에 매달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하다가 새삼 자신의 왼팔 역시 봉인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음…….”
강진호가 곤란해하는 것을 본 박유민이 피식 웃고는 아이들을 어르기 시작했다.
“자자, 진호가 힘들어하잖아. 이제 놓고 떨어지자.”
아이들이 슬쩍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자 박유민이 조용히 말했다.
“진호가 힘들면 다시 안 올 텐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을 보자 강진호는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오, 온다.”
목소리에 진심이 들어갔다.
아이들이 다시 웃으며 강진호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매달리지는 않았다.
“자자, 장난감 가지고 놀아야지. 저쪽으로 가자.”
박유민이 아이들을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해서 놀이방으로 밀어 넣었다.
“휴…….”
이마를 쓱, 훔친 박유민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게 이런 건 뭐 하러 사 왔냐? 몸만 오면 되지.”
“몸만 왔으면 쟤들이 저리 순순히 갔을까?”
“어렵지.”
나름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비싼 거 아냐?”
“아니야.”
“……그래?”
박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는 다 좋은데 금전 감각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예전에는 비싼 물건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더니, 요즘은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삐까번쩍하던데.”
“아니라니까.”
그때, 문이 열리고 점장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창고에 물건 다 넣었습니다. 남은 물건은 일주일 뒤에 제가 직접 배송하겠습니다.”
“아, 예. 수고하셨어요.”
“예. 그럼.”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점장을 보며 박유민이 굳은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리 싹싹하다고? 비싼 것도 아닌데?”
“요즘은 서비스 없으면 못 먹고살아.”
“그래도 좀 과한데?”
“물건 양이 많잖아. 재고 떨이 해줬으니 고마운 거지.”
“사람을 바보로 아나?”
강진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장난감 상자를 구석으로 모으며 딴청을 부렸다.
“재활용은 어디다 버리냐?”
“보육원이었네.”
잘난 집 아들내미가 잘사는 동네 유치원 같은 데 일이 있어 물건을 사 가나 싶던 점장은 반성하는 눈으로 성심 보육원을 바라보았다.
“돈지랄은 이렇게 해야지.”
그도 사람인지라 젊은 나이에 돈을 펑펑 써 대는 놈을 보니 알게 모르게 적대감이 들었지만, 장난감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고 나서는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 사람에게 저 돈은 푼돈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면 그 역시 받는 월급 중 백 원이라도 기부를 해본 적이 언제인지 돌이켜 보게 된다.
“……콩이라도 기부할까?”
다음에 올 때는 장난감만 들고 올 게 아니라 과자라도 같이 사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점장이 트럭에 올랐다.
“그냥 잠깐 데리고 나갔다 온다니까.”
“안 돼.”
“잠깐이면 된다니까.”
“안 된다.”
“아니, 내가 데리고 나가겠다는데…….”
“내가 널 오라고 한 게 실수였다.”
박유민은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보육원에 틀어박힌 강진호는 할 짓도 없으면서 보육원을 떠나지 않았다. 함께 놀아주다가 애들이 강진호에게 흥미를 잃으면 휴대폰이나 하며 시간을 뭉개다가 다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 강진호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집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에 갔던 애들이 다 돌아오자 본색을 드러냈다.
“백화점 가자.”
나이가 어린 애들에게는 장난감을 주었으니, 큰 애들에게도 선물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박유민이 원천 봉쇄에 나섰다.
“야! 얘들이 거지야? 뭘 자꾸 사 주려고 해?”
“내가 사 줄 수도 있지.”
“돈으로 자꾸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돈 말고 정성을 들이는 걸로 하라는 말을 하려던 박유민이 입을 닫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강진호가 앞마당에 놀이 탑을 세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인간은 한다면 한다.
“돈으로 뭘 하려는 게 아니고, 있으면 좋은 거니까 일단은 해주려는 거다.”
“여하튼 안 돼.”
강진호가 슬쩍 아래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쭉 둘러앉은 아이들이 박유민의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줬다 뺏는 기분일 텐데.’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말을 꺼낸 이상은 해야 한다. 강진호는 결심을 굳혔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번에는 날 막을 수 없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번만은 날 뚫을 수 없어.”
강진호와 박유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처음 만난 그날 이후 평화로운 공동전선을 유지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치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응?”
박유민이 의아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리 순순히 포기할 놈이 아닌데?
“승부다.”
“……승부?”
“패자는 말이 없는 법. 이기는 쪽이 모든 것을 가진다.”
“……종목은?”
박유민은 어리석지 않았다.
승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종목을 알고 난 다음이다. 아무리 강진호가 날고 긴다고 해도 그가 이길 수 있는 종목은 충분히 있었다.
갤럭시 크래프트라든가, 아니면 가위바위보라든가.
“어제 한 그 게임.”
부르르르.
박유민의 몸이 떨려왔다.
“……붙어.”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는 지금 챌린저다. 대한민국 랭킹 50위 안에 들어 있다. 부캐를 돌리는 시간을 제외하고 한 캐릭에만 올인한다면 랭킹 10위권 안에도 틀림없이 들 수 있는 실력이다.
그런데 지금, 다이아 티어 따위가 그에게 승부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방식은?”
“미드빵.”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남자의 자존심을 건 승부다.
“남자 방 컴터 두 개 켜라.”
“옙!”
사나이의 승부를 감지한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방으로 달려 들어가 컴퓨터를 세팅했다.
“후후. 강진호, 지고 나서 두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울지나 마라.”
“게임에서만은 너도 날 못 이겨.”
“울지 말라고.”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박유민은 건방지게 자신에게 덤벼든 강진호를 무참하게 꺾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거 좀…….’
물론 강진호의 티어는 다이아다. 그런데 그 티어라는 게 모든 전술과 전략을 배제하고 오로지 우직하게 앞으로만 돌진한 결과로 만들어낸 티어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일대일이면 팀 게임이 아니잖아?’
짐승 같은 기세로 적 라이너를 도륙하던 강진호의 모습이 떠오르자 살짝 긴장감이 올라온다.
“형, 다 했어.”
“다들 나와. 공정한 승부를 위해서 뒤에서 훈수 놓는 놈들은 배제한다. 그리고 구경도 하지 마. 신경 쓰인다.”
“응.”
강진호와 박유민이 죽일 듯이 서로를 노려보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실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작했어?”
“몰라. 문에 가까이도 가지 마. 괜히 말 나온다.”
“응.”
두 사람이 들어간 지 삼십 분쯤 흘렀을까?
쾅!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강진호가 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열심히 게임을 한 건지, 그 강진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강진호의 얼굴을 본 아이들이 승부의 결과를 짐작하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얘들아.”
“……응, 형.”
“택시 불러. 사람 수 맞춰서.”
그와 동시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이라도 한 듯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진호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백화점으로 간다.”
마치 위화도 회군을 결심한 이성계처럼 강진호의 얼굴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옷을 챙기기 시작하자 강진호는 뒤를 슬쩍 돌아보고는 낮게 말했다.
“훌륭했다. 편히 쉬어라.”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의자에 늘어져 있던 박유민이 뭔가 서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미친놈.”
게임에서는 패배해도 승부에서는 패배하지 않는 남자가 방문에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 * *
조규민은 오랜만에 칼퇴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창업 문제도 거의 정리됐고…….”
이미 인테리어 공사는 거의 끝나 있었다. 신경 쓸 일이 확 줄어든 느낌을 받은 조규민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은 영화나 볼까?”
조규민이 손에 들린 무료 영화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한이 오늘까지인데, 딱 오늘 일찍 퇴근을 하게 된 것이다. 혼자서 보는 영화는 그 맛이 또 각별하다. 결코 같이 볼 여자가 없어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조규민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으응?”
강진호라는 이름이 떠 있는 액정을 본 조규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일은 아니겠지?”
하느님, 제발…….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조규민이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네?”
조규민의 얼굴이 나라 잃은 김구의 표정으로 변해갔다.
“백화점이 문을 닫는다구요?”
시간이 시간이니 당연히 문을 닫지, 이 양반아!
“여, 연장이요? 아, 그건 좀 어렵습니……. 네? 성심 애들이랑 같이 왔다구요?”
조규민이 피식 웃고는 영화표를 바라보았다.
영화표를 꽉 움켜쥔 조규민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