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32
#231.
한가하다 (1)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물줄기가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최연하는 굳이 레버를 돌려 온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침 샤워를 찬물로 하는 것은 그녀의 오랜 징크스 같은 것이었다.
촬영장에 들어간다거나, 아니면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든다. 잔소리 많은 매니저나 피부과 원장님이 피부에 좋지 않다고 해서 최근에는 조금 자제하고 있지만, 오늘은 이 의식을 반드시 수행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타월로 몸을 닦으며 욕실 밖으로 나오자 휴대폰이 신경질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최연하는 조금은 차가운 눈으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왜?”
[누나. 그…… 점심때 예정되었던 언론사 인터뷰 말인데요.]“취소하라니까?”
[메이저예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 인터뷰를 취소했다가는 말이 좀 나올 거예요.]“아프다고 해.”
[그런 변명은 학교에나 하는 거구요. 응급실에 앰뷸 타고 들어가도 안 믿어주는 게 이 바닥인데, 그런 변명 믿겠어요?]최연하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조금은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걔들이 기분 나쁘면 어쩔 건데?”
[아니, 그래도…….]“내가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작품 때문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배우한테 작품보다 중요한 게 있는 거야? 언론사 비위 맞추는 게 작품보다 중요하냐고!”
[아니죠…….]“너도 이 바닥에서 매니저질 오래하고 싶으면 하나는 명심해. 언론사와 친해놓으면 다 좋을 것 같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조그마한 틈 하나만 보여도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이 굴던 놈들이 네 간을 빼 먹겠다고 달려들 거야. 이런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걔들한테 꼬리 치는 게 아니라 작품 잘 보고 어떻게든 망하지 않는 게 중요해. 알았어?”
[예.]“그래서 인터뷰가 어쨌다고?”
[취소하겠습니다.]“좋아.”
최연하가 머리를 닦던 수건을 바닥으로 던지고는 빙긋 웃었다.
“시간 맞춰 태우러 와. 오늘은 늦으면 안 되는 약속이야. 알았어?”
[예. 걱정 마세요.]“그래.”
전화를 끊은 최연하가 휴대폰을 소파 위로 던지고는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쩔지!’
여배우의 근자감이 아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봐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자로서의 매력이 가장 넘치는 시기가 지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한창 활동할 때보다 풋풋하고 순수한 맛이야 조금 줄었겠지만, 대신에 농염함이 생겨났으니까.
‘승부를 지어야 할 때야.’
지금 어떤 작품을 하느냐에 따라서 한때 반짝 얼굴로 먹고살던 배우로 남느냐, 아니면 십 년 뒤까지 스크린에 얼굴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느냐가 갈린다. 최연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10년 가까이를 이 세계에 몸담은 최연하다. 그녀보다 잘나가던 여배우들이 거짓말처럼 잊혀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휴우우우우.”
최연하는 낮게 심호흡을 했다.
이 바닥에서 먹고사는 여배우들은 다들 비슷한 공포에 시달린다. 무대에 올랐을 때 쏟아지는 찬사와 스포트라이트는 너무도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그만큼 무대의 뒤는 어둡고 우울한 법.
지금 그녀에게 향하는 관심이 모두 다른 이에게 옮겨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누구는 이런 중압감 때문에 몰락하기도 하고, 아직 버티고 있는 이들도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맛이 가버린다.
‘나도 정상은 아니겠지.’
그나마 그녀는 나은 편이리라.
매니저를 노예처럼 괴롭힌다거나 앞에서는 청순한 척하다가 밤만 되면 비밀 호스트바를 집처럼 드나드는 것들에 비하면 훨씬 낫다.
작품 집착증은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그녀의 커리어를 몇 배는 아름답게 만들어줄 테니까.
“강진호.”
최연하가 굳은 얼굴로 강진호의 이름을 되뇌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영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여자 배우는 티켓 파워가 극히 미약하다는 것이다. 천만을 넘은 영화 중에 여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있는지만 떠올려 봐도 결론은 빤하다.
드라마에서라면 여배우의 힘이 아직은 먹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영화는 아니다.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여배우는 여전히 남자 배우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배우가 누구냐를 놓고 벌어지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자잘한 토론에서도 여자 배우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게 대한민국의 여배우가 처한 현실이었다.
“징징댄다고 달라질 건 없어.”
거울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돌려 화장대로 걸어갔다. 결전을 앞둔 장수와 같은 눈빛으로 말이다.
짤랑.
요즘 같은 시대에 문에 종을 달아놓는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손님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일일이 파악할 필요가 없는 카페라면 더더욱 말이다. 편의성을 위해서라면 딱히 의미 없는 일을 굳이 한다는 것은 이 카페의 주인이 실용성보다는 낭만을 추구하는 로맨티스트라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 말고도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강진호는 문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종을 한 번 바라보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11시, 카페 일루아나.
강은영이 말한 시간과 장소를 제대로 찾아왔다. 그러니 아마 …….
“강진호 씨!”
미처 강진호가 그녀를 찾기도 전에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난 최연하가 손을 흔들더니,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셨어요?”
강진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카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10시 30분.
약속에 늦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아침에 딱히 할 일도 없던 강진호가 30분이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그녀는 그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최연하가 만면 가득 환한 미소를 띠더니 강진호의 소매를 잡고 테이블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앉아서 이야기해요, 앉아서.”
“아니, 그전에 주문을 좀…….”
“여기 주문 받아요.”
“아…….”
세상에 같은 사람이 둘은 있다더니, 아버지와 같은 타입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는 모양이었다. 둘 다 시대를 역행한다는 점과 그럼에도 기묘하게 망하지 않고 가게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절묘하게 닮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갔다.
주문이 끝나자 최연하가 가만히 강진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별일이라…….”
많은 일이 있었다, 정말 많은 일이.
생각해 보면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그리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이 벌어진 것은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딱히 별일은 없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최연하가 생글생글 웃었다.
강진호는 가만히 최연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쁘지는 않군.’
얼굴이 아니라 태도가.
그는 최연하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강은영이 말하는 것만 들어도 눈앞의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현 시대가 연예인이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세상임을 감안한다면, 객관적인 최연하의 지위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쁘기도 엄청 바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먼저 나오고 최대한 강진호의 기분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에서 대화를 해볼 가치는 있어 보였다.
“은영이에게 약속을 잡아달라고 했다던데요.”
“은영? 아! 세아 씨요. 네, 그랬죠.”
“무슨 일이십니까?”
최연하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강진호에게서는 떠보는 기색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사람만 보냈네.’
보내는 와중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해서 경계심을 낮춰주길 기대했는데, 정말 사정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보내 버린 모양이었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부터 모두 설명해야 한다는 건 역시나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자리에 나왔다는 게 강진호 역시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성적인 감정을 떠나서 여배우가 일반인에게 돌조각처럼 보이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최연하는 입술을 핥으며 대응을 고민했다.
이리저리 구슬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녀가 본 강진호와 강은영이 말한 강진호의 성격을 토대로 판단한다면…… 어설프게 구슬리려다가는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
최연하는 직구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강진호 씨.”
“네.”
“혹시 배우 해볼 생각 없어요?”
강진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배우요?”
“네, 배우요.”
최연하의 너무 당당한 반응에 강진호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막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왔기에 일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주문하신 룽고와 아이스 룽고 나왔습니다.”
강진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가운 커피를 쭉 들이켰다. 황당함에 굳어진 혀가 그제야 겨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최연하가 빙긋 웃었다.
“아마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무척이나요.”
최연하가 빙그레 웃었다.
영업용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였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야.’
특이하기는 하지만, 부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달라서 불쾌감을 주는 타입이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과 다르기에 신선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최연하에게 강진호는 후자였다.
독특하고 남다르지만, 그 독특함이 부담스럽지는 않은 사람.
“강진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강진호 씨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 판단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여자의 감이라고 하면?”
“주식은 안 하시는 걸 추천드리죠.”
최연하가 쿡쿡대며 웃었다.
“충고는 받아들일게요. 농담이고, 연기자의 재능은 연기를 보고 판단해야 하는 법이죠. 강진호 씨 본인이 연기한 걸 본 적 있어요?”
“있을 리가요.”
“당연히 없겠죠. 아직 방영이 안 됐으니까. 강진호 씨가 연기한 것에서 발성과 목소리를 제거하고 나니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더라구요.”
정말 그럴듯한 그림이 말이다.
그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 배우를 드라마용 카메라로 잡으면 잘생김이 돋보이게 된다. 하지만 강진호는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배경과 함께 화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주얼은 영화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야.’
“전 영화판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이에요. 강진호 씨가 아무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도 그 연기를 저보다 잘 평가하실 수는 없을 거예요. 제가 보기에 강진호 씨는 연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적당한 배역은 제가 찾아뒀어요. 강진호 씨만 좋다고 하면 제가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길게 말을 늘어놓은 것에 비해 너무도 허무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생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