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33
#232.
한가하다 (2)
최연하는 조금 멍해졌다.
대답은 예상하던 바였다. 그 어떤 사람이든 간에 강진호와 같은 상황에서 이런 제안을 들으면 일단은 거절부터 할 것이다. 그러니 거절이야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연하를 당황시킨 것은 강진호의 목소리에 어려 있는 어조의 단호함이었다.
―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것 못해요.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진짜 가능성이 있을까요?
보통은 거절을 하더라도 말투에서 이러한 어조가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강진호의 말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철벽같은 단호함이었다.
‘어째서?’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저리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가.
최연하다.
지금 길로 뛰어나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너 연기해 볼래?’라고만 말해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자신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배우계의 신성쯤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최연하는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최연하가 제안을 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이라니.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죠?”
가슴이 뛰고 답답함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천상 연기자. 태연을 가장하고 미소를 짓는 게 어려울 리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다기보다는…….”
강진호가 대답을 고심하자 최연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진호 씨는 저를 잘 모른다고 하셨죠?”
“예.”
“그럼 먼저 아셔야겠네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강진호가 가만히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잘난 척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감히 내가 손을 내밀었는데 네까짓 게 거절을 해?’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무심하게 넘겨 버리기에는 제가 강진호 씨에게 드린 기회가 무척이나 크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최연하의 가면이 조금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강진호 씨를 위해서 제가 남자 배우 캐스팅까지 막았어요. 드라마면 몰라도 영화에서 이런 패악질을 부리는 건 저한테도 엄청나게 부담이라구요.”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당신이 하는 게 가장 최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친 최연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는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슬그머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하튼 그래요.”
강진호는 가만히 손을 뻗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쭈욱 커피를 들이켠 강진호가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연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말 다음에 나올 말이야 빤하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연하가 벌떡 일어나 팔을 잡았다.
“자, 잠시만요.”
“예?”
강진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최연하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뭔가 매달리는 모양새가 되다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이런 저자세를 보인 적이 없던 자신이 아닌가.
“이유라도 좀 들려주세요.”
“…….”
“거절을 당하더라도 미련 안 남게…… 확실하게 말을 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게 아니면 앞으로 몇 번이고 귀찮게 해드릴지도 몰라요. 그건 서로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흐음…….”
강진호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고민된다는 얼굴로 입가를 주물렀다.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연기하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아니요.”
“……그럴 것 같았어요.”
일전에 본 모습을 감안하면 강진호는 성격 자체가 무던하다. 일반인이 아니라 숙련된 배우라고 할지라도 그만큼이나 NG를 내면 멘탈이 터져 나가 완전 질려 버릴 텐데, 강진호는 수많은 이들의 한숨을 들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만큼 뻔뻔하기도 쉽지 않지.’
사회에서라면 모르겠지만, 배우에게는 그것도 강점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연기를 펼칠 수 있으니까.
“그럼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러우세요?”
강진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민하네?’
아무래도 그런 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강진호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기질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대에 직접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연극인이나 가수들과는 다르게 영화나 드라마는 굳이 많은 이들의 시선에 노출될 필요가 없다.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안 난다고 생각한 최연하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강진호 씨, 제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네?”
“스타가 된다는 건 정말 끝내주는 일이에요.”
“하하하!”
강진호가 최연하의 돌직구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연예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망가지는 게 왜인 것 같아요?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쾌감을 다시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가요?”
최연하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전혀 짐작도 못하는 모양이다.
“수많은 이들이 우러러보고, 어디를 가도 선망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충족감을 주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잘나가는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반인과 다른 잣대를 들이대기도 하거든요. 대마를 피워도 구속 안 당하는데요, 뭐.”
“음…….”
“이런 말 하기는 민망하지만, 강진호 씨가 영화 두어 편만 찍고 나면 웬만한 배우나 모델들도 강진호 씨와 손 한 번 잡아보고 싶어서 안달일걸요?”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굉장한 일이군요.”
“네, 그렇다니까요.”
“듣고 보니 알겠네요.”
“네?”
“왜 제가 그 일에 관심이 없는지 말이에요.”
최연하가 허탈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 인간, 진짜 뭐하는 인간이지?’
그녀의 말을 다 귓등으로 들었다는 말인가.
강진호는 그런 최연하의 시선을 이해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기라는 걸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만…….”
강진호가 어색하다는 듯 코를 긁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것은 질려서요.”
“……네?”
최연하는 강진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진호도 그 사실을 이해시키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영화를 찍어 남는 것은 좋은 영화와 재산 정도일까요?”
“성취욕과 명예욕도 충족시켜 주죠.”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별로 자주 보는 편도 아니고, 좋아하는 편도 아니라 제가 좋은 영화를 찍었다는 것에서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재산도…… 음…….”
강진호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할 때, 최연하가 대신 말을 해주었다.
“세아 씨가 말하기로는 강진호 씨가 재산이 엄청 많다고 하더군요.”
“제 돈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긍정이었다.
‘너 대체 톱 배우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인 줄은 알고 하는 말이냐’라고 소리를 지를 뻔한 최연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억눌렀다.
강진호는 모를 수 있지만, 강은영이 모를 수는 없다. 그걸 다 아는 사람이 그 정도 돈으로는 우리 오빠 통장 중 한 개도 못 채운다고 한 걸로 봐서는 이미 재력적인 부분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아뇨, 강진호 씨. 그러니까…….”
강진호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죠.”
“…….”
“배우는 좋은 직업입니다. 세상 모든 직업에는 다 가치가 있겠죠. 하지만 사람마다 가치를 느끼는 직업은 다를 겁니다. 배우이신 분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저는 배우를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그 시간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연하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모욕적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뭘 하실 건데요?”
“애 돌보기.”
“……네?”
강진호는 태연히 대답했다.
“숙제 같이해 주기, 운동 가르쳐 주기, 코 닦아주기?”
“지금 저 놀려요?”
최연하의 얼굴이 얼음이라도 두른 것처럼 차가워졌다.
하지만 강진호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떠한 일에 대해서 사람이 부여하는 가치는 다 다른 겁니다. 우스운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영화를 찍는 시간에 그런 일을 하는 게 더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최연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그런 일에 무슨 가치가 있는데요?”
“글쎄요.”
강진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음, 그렇게 물으니 대답이 어렵네요.”
“이봐요, 강진호 씨!”
“적어도 말입니다…….”
강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제가 지금 뻗은 손이 어떤 아이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제가 하지 않았다면 달라지지 않았을 삶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죠. 그럼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최연하는 지금 강진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깨달은 것은 지금은 강진호에게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안 하겠다는 거죠?”
“예.”
“하지만 저도 강진호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진 못했어요. 그러니 제가 이 정도로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네, 알아요. 적당히 구슬린다고 해서 좋답시고 마음 바꾸고 넘어올 남자였으면 제가 이러고 있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가 얼마나 지독하고 집요한 여자인지 알게 될 테니까요.”
강진호가 난감해하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몸을 돌려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그녀가 다시 강진호에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푹 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하…….”
“그럼.”
최연하가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리자 강진호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주물렀다.
‘괜히 나왔네.’
혹 떼려다 혹 붙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오셨어요?”
“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고 있어!”
“네?”
운전석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매니저가 밴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최연하를 보고는 공포에 질려 찌그러졌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들고 있던 백을 좌석에다 던져 버린 최연하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쾅쾅, 내려찼다.
“적당히 둘러대면 내가 포기하고 물러날 줄 안 모양인데, 내가 이 바닥에서 배운 건 근성 있는 년이랑 미친년이 이긴다는 거야. 내가 근성 있는 미친년이 뭔지 제대로 보여줄 거야! 어디 한 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고!”
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질러 대는 최연하를 보며 매니저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때려치워야지.’
이 지옥 같은 극한 직업.
세상에 고통받는 직장인은 조규민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강진호는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에 피해자를 하나 늘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