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50
#249.
조사하다 (4)
“한국 무도 총회라…….”
황정후는 조규민이 올린 보고서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영남회라고?”
“예.”
황정후는 서류를 제대로 펴보지도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의자에 한껏 등을 기댔다.
“이봐, 내가 어떻게 그 살벌하던 군사정권에서도 살아남았는지 알아?”
“……고초를 엄청 당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목숨이라도 붙어 있으니 다행이지. 그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그때 그들에게 저항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재경쯤은 우습게 알 만한 기업으로 성장했을 곳도 몇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나는 살아남았지. 그 차이가 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황정후가 혀를 찼다.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야.”
“…….”
“시대정신은 필요하지. 하지만 그건 개인으로서의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기업가로서 내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이윤을 늘리는가, 내 직원들을 어떻게 잘 보살피느냐, 지속 가능하게 기업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느냐…… 뭐, 이런 것들이지.”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에 항거할 수야 있지. 하지만 그건 기업가로서의 내가 아니라 인간 황정후가 해야 하는 일이야. 회사의 오너로서의 나는 회사에 피해를 끼쳐서는 안 돼. 왜? 이 기업으로 먹고 사는 건 나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래.”
황정후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런 일에 얽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느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자네가 재경의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움직인다면…… 이 일이 정말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일인가,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해야만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해.”
“예.”
황정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슬쩍 보고서에게 눈길을 주었다.
“얽히고 싶지 않은데 얽혔군.”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비밀이라는 게 없는 법이지. 세상에 아직 비밀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비밀이 유지된 것이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야.”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는 이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지만, 이젠 당당하게 그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위험하겠습니까?”
황정후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말인가?”
“강진호 씨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황정후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매우 기묘했다. 어찌 보면 어이없어 하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고심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들이 하나같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은 확연했다.
“네가 걱정해야 할 것은 강진호가 아니라 재경이겠지. 강진호는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 한 몸은 간수할 수 있겠지만, 재경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으니까 말이야.”
조규민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예.”
“그 피자집이란 건 어찌 되어가고 있나?”
“그게…….”
조규민이 뒷머리를 긁었다.
“아직 결론이 확 나온 것은 아니지만, 망해가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황정후가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녀석, 간만에 고생 좀 하겠군.”
“……유쾌해 보이십니다?”
“항상 성공만 하던 놈이 간만에 실패를 맛보는데, 유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야 내가 얼마나 훌륭한 기업가인지 알게 되겠지.”
‘쌓인 게 있으셨구나.’
하기야 그가 황정후라고 해도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정후는 기업가로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원로로서 만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존재다. 그 성품을 제외하고 이루어낸 업적만 보더라도 그는 당연히 존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강진호는 그런 황정후의 지위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인지, 때로는 황정후를 옆집 할아버지 보듯이 한다.
‘불만스러울 만도 하지.’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이루어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특히나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고생을 다해서 재경을 이루어냈다고 평가받는 황정후이니만큼 재경과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눈여겨보는 애송이 놈이 그런 황정후의 업적에 너무 심드렁하다.
처음에야 웃으며 넘겼겠지만, 그 시간이 몇 년이나 되다 보니 지금 자그마한 불만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조규민은 그 모습이 너무 생경한 동시에 재밌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강진호 씨에게 생각한 만큼의 능력이 없다는 뜻도 되니까요.”
“생각한 만큼?”
황정후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이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강진호 씨의 기업 운영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 아니셨습니까?”
“그렇지.”
“그럼 이미 평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황정후가 피식 웃었다.
“이봐, 규민이.”
“예, 회장님.”
“동네 구멍가게를 해도 말아먹는 게 사람이야.”
“……그렇습니다.”
황정후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성공한 노인네들이 가장 잘 저지르는 실수가 뭔지 알아?”
조규민은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그 성공한 노인네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누구인지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해서 성공했으니 다른 이들도 나만큼만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사실 대부분의 성공이라는 것은 피나는 노력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단순한 시운 때문에 결정 나기도 하거든.”
조규민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자니 황정후의 성공을 폄하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자니 황정후의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조규민은 이럴 때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입을 다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만큼 회사를 이끌 수 있을 것 같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모르는 거야.”
“…….”
“자신이 성공한 이유를 온전히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천운이 따른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
“으음…….”
조규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옳든 옳지 않든 황정후쯤 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대단함을 넘어 무섭기까지 한 일이었다.
“제대로 경영을 해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녀석이 가게를 말아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배운 것이 없는 이에게 관련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기대가 아니라 강짜야.”
“……그럼 왜?”
조규민은 황정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굳이 강진호에게 가게를 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철저한 실패를 경험하라는 뜻인가?
황정후가 조규민의 의아한 시선을 받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내 말을 뭘로 들은 겐가?”
“죄송합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강진호의 능력이 아니야. 아니, 능력은 능력이지.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은 아니야.”
“…….”
“경영이라는 것은 전문 경영인이 당연히 더 잘할 수밖에 없어. 배우고 공부한 사람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더 잘하기를 바란다면, 그건 도둑놈 심보지.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감각? 천운? 그런 종류의 것이야.”
“너무 막연합니다.”
“막연해? 막연할 것 없어. 결국 쉽게 말해서 경영 능력이 아닌 것으로 어떻게든 결과를 낼 수 있느냐만 보면 되니까. 마지막에 얼마가 남는냐만 보는 거야. 결과론이지.”
조규민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정후의 경영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는 경영인이 아니라 보좌진이니까.
‘하기야 우리나라에서 이분의 경영 철학을 반이라도 이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황정후가 강진호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
그 사실이 조규민은 못내 두근거리게 했다.
* * *
[자료는 모두 메일로 보냈어요.]“수고했습니다.”
강진호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쪽에서 유출할 수 없는 자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보냈어요. 다만…….]“다만?”
[부탁드릴 게 있는데, 혹여 그들과 충돌할 것 같다면…… 저희에게 먼저 연락을 주시면 안 될까요?]“어째서요?”
[그래야 수습이 되니까요.]“흐음.”
강진호가 마뜩찮다는 듯 말을 줄이자 이현주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강진호 씨를 감시하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건 저희에게도 생존의 문제라구요. 영남회와 강진호 씨가 크게 충돌해서 외부 세상에 우리에 대한 것이 알려진다면, 아마 엄청난 파장이 발생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강진호 씨도 불편하실걸요?]강진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확실히 사실이었다.
무인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일반인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웬만한 전염병이 터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충격이 세상을 휩쓸게 될 것이다.
“고려하죠.”
[자료를 보시면 알겠지만, 영남회는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아니고요. 자료를 요구하시니까 드리기는 했지만, 혼자 힘으로 그곳을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강진호는 가볍게 웃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라 전화기 너머로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진호 씨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세상 누구라도 그만한 단체와 홀로 싸울 수는 없어요. 아시죠?]‘세상 누구’라도라…….
이만한 일로 오기를 부릴 강진호는 아니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궁금해졌다.
만약 강진호가 예전처럼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고 영남회에 뛰어든다면 이현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짖궂은 생각을 지워낸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충고는 감사히 받죠.”
[이제 어쩔 생각이시죠?]“글쎄요. 아직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저희 쪽에 한 번 들르시는 건 어떠세요?]“그것도 생각은 해보죠. 그럼 이만.”
강진호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발을 옮겼다.
‘영남회, 그리고 총회라…….’
강진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은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 예전에는 이면인 무인의 세계에서의 자신과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을 완연히 구분할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 경계가 조금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뒷세계의 일로 현실에 영향을 주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이번에 강은영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평정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가끔은 힘들 때가 있었다.
강진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발을 재촉했다.
‘조금 늦었나?’
나름 빨리 온다고 서둘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약속 장소인 카페를 발견한 강진호가 종종걸음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미리 약속을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아직 안 늦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찰나에 구석 쪽에서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강진호를 보며 손을 들었다.
막 인사를 하려는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늦어요!”
강진호의 볼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