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58
#257.
시작하다 (2)
“밀수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가져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알아보니 이거… 연대가 굉장히 오래된 검이더군요. 중국에서도 골동품의 일종으로 분류될 만한 검이라 걸리면 난리가 날 것 같아서 좀 신중해야 했습니다.”
“그렇겠죠.”
이만한 세월이 흐르고도 과거의 그가 쓸 때처럼 생생한 외양을 간직하고 있는 검들이었다. 그 가치는 아마 모르기는 해도 국보급에 육박할 것이다.
강진호조차 이 검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모르니까.
양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이 그를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이 검을 잡고 중원 전체를 누비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그 대는 청루가 아니라 적루만을 들었지만.
“여하튼 생각보다 늦어지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강진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빠르고 늦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 검이 마침내 그의 손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일순 강진호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이 시기에 맞춰서 검이 그에게 돌아왔다는 것이 왠지 이상할 만큼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평온하던 그의 세상이 다시 전투로 물들 것 같은 확증적인 예감이 강진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영남회.’
미뤄둔 것에 대한 대가를 받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조규민이 의아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나 더 챙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 더요?”
“네.”
조규민이 손에 든 카탈로그를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고르시죠.”
“이건?”
강진호가 카탈로그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안에는 형형색색으로 도색이 되어 있는 각종 스포츠카의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다.
나름 평범하게 생겼다고 할 만한 차부터 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은 디자인의 차까지. 강진호는 카탈로그를 휘휘 넘기다가 한숨을 쉬었다.
“전의 차는 어떻게 안 되는 겁니까?”
“그거 수리하는 거보다 새 차 뽑는 게 훨씬 싸게 칩니다. 정말 애정이 넘치신다면 수리도 고려해 보겠지만,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고르기 힘드시면 제가 대신 고르죠.”
“……이번에는 요란하지 않은 것으로 해주세요.”
조규민이 씨익 웃었다.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강진호 씨는 이미 운전하는 스타일이 슈퍼카에 적응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차량은 쉽게 모실 수 없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조규민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번 말해봐야 한 번 몰아보는 것만 못하겠죠. 가시죠.”
깔끔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조규민을 보며 강진호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안 되겠네요.”
“그렇죠?”
주차장으로 내려간 조규민은 강진호에게 키를 주더니 자신의 차를 몰아보게 했다.
이게 무슨 뻘짓이냐 싶던 강진호이지만,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는 그 순간 조규민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반응이 그렇게 느릴 줄이야.”
“원래 아래에서 위로는 갈 수 있지만, 위에서 아래로는 못 내려오는 법이죠.”
강진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액셀을 밟고부터 차가 움직이기까지의 시간, 핸들을 돌린 이후 차가 방향을 틀기까지의 시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할 그 미세한 차이가 강진호에게는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일반인들보다 미세한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무인이다 보니 더 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거짓말 좀 보태서 핸들을 꺾고 나서 3초 뒤에 차가 돌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답답하다고 대중교통도 못 타고 자전거 타고 다니시는 강진호 씨가 일반 세단에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스포티 세단으로 고른다고 해도 슈퍼카에 미칠 수는 없죠.”
“으음…….”
“강진호 씨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차를 제가 따로 뽑아두었습니다.”
조규민이 내민 두 번째 카탈로그를 받아 든 강진호가 책자를 펴서 살피기 시작했다.
“저…….”
카탈로그를 다 훑어본 강진호가 참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장난감 같은 차 말고는 없습니까?”
“보기 좋으라고 그렇게 만들어놓은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야 반응성과 공기역학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실 요란한 걸로 따지자면 지금 타시던 차도 한 요란 하는데, 이미 어느 정도는 적응되지 않으셨습니까.”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얀색 람보르기니만 해도 눈에 엄청 띄는데, 빨간색으로 랩핑을 하고 나서도 잘만 타고 다니지 않았던가.
“굳이 차에 적응을 해야 합니까?”
“이상해서 그럽니다. 제 나이면 몰라도 강진호 씨의 나이면 평범한 세단보다는 이런 차를 더 선호하기 마련이거든요. 성능뿐 아니라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도요.”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그러시는 건가요?’
조규민이 보기에는 강진호가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애송이일지 모르겠지만, 실제 강진호는 조규민의 몇 배를 더 살아온 할아버지나 다름없다. 아무리 젊은 마인드를 유지하며 살려 노력하는 중이지만, 저런 요란한 차에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는 못 고르겠어요.”
“그러시면 제가 고르겠습니다.”
“지불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 그건 괜찮습니다. 회장님께서 전역 선물로 한 대 선물한다고 하시네요.”
“……전역 선물로 차를요?”
“강진호 씨도 빨리 이 스케일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너무 소시민적으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받습니다.”
“명심하죠.”
카탈로그 안에 있는 차 가격들이 얼마인지를 안다면 반응이 조금 더 달라졌겠지만, 조규민은 카탈로그를 작성하며 가격을 모두 삭제해 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제 차 고르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두근두근하네요.”
“……타고 다니세요.”
“그러다 흠집이라도 나면 제 월급이 몽땅 날아갑니다. 사양하죠.”
카탈로그를 덮은 조규민이 커피를 타 내밀며 말했다.
“일단 그 검을 집에 두기 위해서는 도검 허가증이 필요합니다. 제가 일단 신청해 두기는 했는데,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다음 주 정도는 되어야 나온다고 하더군요. 장식용으로 신청했으니, 차고 다니는 일은 자제해 주세요.”
“저 그렇게 정신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걸 허리에 차고 거리에 나갔다가는 온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다 끌어모을 것이다. 강진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차가 없어서 불편하실 테니, 이 중에서 그나마 빨리 나오는 차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예. 편하신 대로.”
“음, 그럼…….”
조규민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커피 드시고 잠시 인사라도 드리는 게 어떨까요?”
“…….”
“거, 얼굴 보기 한 번 더럽게 힘들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투정을 부리는 황정후를 보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나름 포스가 넘치던 황정후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손주 찾는 할아버지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강진호에게는 이런 친근한 모습을 유지하는 황정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진호가 황정후를 쉽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상인들은 무서운 이들이지.’
과거 중원에서도 상계의 거물들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평해졌다. 그들만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황정후쯤 되는 이를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지금은 황정후가 강진호에게 등을 돌리기 어렵겠지만, 세상일에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이다.
“앉아라, 앉아. 내가 뚱해야 하는데, 왜 네가 뚱하고 있어?”
“아닙니다.”
황정후가 자리에 앉은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그래, 장사는 할 만하고?”
“배운다고 생각하며 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지?”
“예.”
황정후가 거 보라는 듯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영업이라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 너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그렇지?”
“……예.”
“이번 일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겪어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조규민이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기대하지 않으신다더니.’
경영에 대한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요행수나 보려고 장사를 시켰다더니, 강진호에 대한 황정후의 진짜 노림수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돈도 벌면 더 좋은 거고.”
‘아닌가?’
황정후의 속내는 영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돈은 중요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의 돈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만 알면 된다.”
그 말에 조규민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거기 지금 대박 났습니다, 회장님.’
아직 정기 보고가 들어가지 않아 가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황정후였다. 경영 수완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냥 잘생겨서 손님이 터지기 시작했다고 하면 무슨 반응이 나올지 궁금한 조규민이었다.
“음, 그래. 그럼…….”
황정후가 고개를 돌려 조규민에게 말했다.
“자리 좀 피해주게나. 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예.”
조규민이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 대 피워라.”
“괜찮습니다.”
황정후가 가만히 강진호를 보며 웃었다.
“이제는 나이 어린 청년 연기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모양이구려. 둘이 있는 곳에서도 존댓말이 쉽게 나오는 것을 보니 말이오.”
“…….”
강진호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내려놓고 편히 이야기합시다. 지금 당신의 모습도 좋다고 생각은 하지만, 진짜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당신의 본모습을 보는 편이 나도 수월하니까.”
강진호가 대답 없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파에 살짝 허리를 기댄 강진호의 모습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여유와 나른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황정후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강진호의 모습에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잊혀지지가 않았지.’
그때 이후로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처음 본 이후로 강진호는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는 평범한 청년의 모습만을 내보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정후는 알고 있었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사람이 달라졌다고 여긴다면, 그건 그 사람이 새로운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지, 근원적인 곳에 있는 본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맹수는 맹수.’
풀을 뜯어 먹고 산다고 해서 맹수의 이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강진호에게는 이 모습이 더욱 잘 어울렸다. 가식을 걷어낸 강진호를 보자마자 지금까지 보고 있던 모습이 철저한 위선으로 느껴질 만큼 말이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말해.”
“그, 무인들의 세계라는 것 말이오.”
의외의 말이 나오자 강진호가 가만히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눈빛.
드러낸다는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 눈빛마저 달라진다는 사실이 더없이 신기한 황정후였다.
“꼭 그 세계로 다시 끼어들어야 하는 거요?”
무거운 황정후의 말에 강진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이번 일은 그냥 끝날 일이 아니오.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신 돌아올 수 없게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