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61
#260.
시작하다 (5)
스르르릉.
강진호는 가만히 적루를 뽑았다.
빛나는 검신이 그 자태를 드러내자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이 검을 자신의 수족처럼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검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보았다. 적루는 그에게 있어서 수족이자 해결책이었다.
분쟁이 있으면 적루를 뽑았고, 대립이 있으면 적루를 뽑았다.
그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스스로 지성인이라 자부하던 강진호라는 인간은 중원을 겪으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에 동화되어 갔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제는 중원인인 강진호가 되어 현대에 적응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그가 잊지 않아야 할 것 한 가지.
이곳은 중원이 아니고, 어떠한 분쟁도 적루로는 해결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스르릉.
검집에 적루를 꽂아 넣은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쪽이 원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먼저 폭력을 써온 것은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다. 그렇다면 강진호는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응수해 줄 것이다.
그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해온 방식이 얼마나 미적지근한 것이었는지, 강진호를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자신을 공격해 온 이들을 그냥 보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진호는 용납할 수 있어도 적천마존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오래 참았지.’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온 이상 더 이상은 참을 필요가 없다. 이제 영남회는 그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강진호가 나직하게 웃었다.
“진호야!”
“예!”
웃던 강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좀 나와봐라! 전구가 나갔는데 엄마가 손이 안 닿아.”
“제가 갈아 끼울게요.”
강진호는 적루를 침대 밑으로 던져 놓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유서 깊은 마교의 검이 저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 피눈물을 흘릴 이가 한둘이 아니겠지만, 강진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 마교에 몸을 담았을 때도 제발 신물 좀 잘 간수하라는 잔소리를 오죽 들었던가.
어머니에게 전구를 받아 들어 갈아 끼우고 있으려니 강은영이 퇴근을 하고는 집으로 들어왔다.
“오라비! 오라비!”
“응?”
“이리 와봐! 이리!”
강은영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앉더니 강진호를 불렀다.
“왜?”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와보시지요, 오라비.”
“……그래.”
이게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서 건너편에 앉자 강은영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 가게에 사람이 그렇게 몰린다며?”
“그래.”
“그게 다 오라비가 드라마에 출현한 거 보고 손님이 몰린 거라며?”
“그렇지.”
“응, 그래. 그러면 결국 드라마에 출현한 게 잘된 거네?”
“…….”
강진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몰아가는 꼬락서니가 좀 이상한 것이, 분명 또 뭔가를 해달라고 할 게 빤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오라비, 들어봐. 드라마 한 번 출현해서 이만큼 손님이 몰렸잖아. 그런데 오라비가 계속 드라마에 안 나오면 손님이 빠질 거란 말이야. 매상을 계속 올리려면 드라마에 한 번쯤 더 나와야 할 것 같지 않아? 이건 내가 진짜 동생으로서 순수하게 오라비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거든?”
“잘 들어라, 동생.”
“응?”
“내가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너는 거짓말할 때 버릇이 있다.”
“헐? 진짜?”
“그래.”
“뭐, 뭔데?”
“그걸 내가 알려주면 다음에 거짓말할 때 구분을 못하잖아. 그러니까 순수한 걱정이라는 거짓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헤헤.”
강은영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버무리려고 하지만 티가 너무 났다.
“오라비이! 한 번만 더 출연하자. 응? 피디님이 오라비가 한 번만 더 나와주면 진짜 시청률 레전드 찍을 수 있데.”
“생각 없다고 전해.”
“한 번만 더 나오면 가게에 손님이 넘칠 거야!”
“지금도 충분해.”
“그 사람들, 조금 있으면 다 빠진다니까.”
“안 그래도 손님이 너무 많아서 좀 빠졌으면 싶었는데, 잘됐네.”
“오래비이!”
강진호가 미간을 좁히자 강은영이 뜨끔하여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 잘되라고 이럴 것 같지는 않고. 원하는 게 뭐야?”
“아닌데? 나 원하는 거 없는데?”
“거짓말할 때 버릇이 있다고 했을 텐데?”
“……귀신이 따로 없네, 진짜.”
강은영은 자신의 버릇이 뭔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그건 안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심장이 빨리 뛴다. 다만, 그걸 눈치챌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이다. 강진호는 그걸 알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장 피디님이 오빠 한 번만 더 출연하게 해주면, 다음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써준댔어.”
“흠…….”
“오빠, 장학선 피디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 그 최연하가 장 피디님 드라마에는 출연하잖아. 이번 한 번만 도와주라? 응?”
강진호가 가만히 강은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 들어.”
강진호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듯하자 강은영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줘야 잘될 것 같으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으응…….”
“지금까지만 해도 내가 많이 도와줬어. 그렇지?”
“응, 오라비. 그건 알고 있어. 항상 고맙게 생각해.”
“너 한 번 도와주는 게 어려운 건 아냐.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올라간 배역이 무슨 의미가 있니? 주연급 배역을 따내고 싶으면 더 열심히 해. 알았어?”
“……알았어.”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은영이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반응이 좀 이상한데?’
보통 이렇게 야단을 맞고 나면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인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 왜 말을 꺼낸 걸까?
“오라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응?”
“다시 출연하는 게 어려우면 우리 매니저 오빠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될까? 그건 별로 어려울 거 없잖아. 그지?”
이거구나.
여우 같다, 여우 같다 했더니, 이제는 오라비 머리끝에서 놀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은 왜?”
“……지금 오빠 때문에 난리가 났잖아. 그런데 오빠는 소속사도 없고, 보도자료도 안 나가서 오빠 좀 이용해서 언플하려고 해도 힘들다고 하더라고.”
“언플?”
“오빠가 뜨면 나도 떠야지. 동생인데.”
“음…….”
고개를 끄덕이자 강은영이 강진호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오라비! 인터뷰 좀 해주고, 기사 좀 나가게 해줘. 응? 나 지금 열심히 촬영 중인데, 너무 관심을 못 받아서 강무룩하고 있단 말이야. 응?”
강진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인터뷰?”
“응. 인터뷰만 하면 연예란 메인에 걸리는 건 일도 아니래. 우리 쪽 친한 언론사 쪽에 인터뷰해 주면 나쁘게 나갈 일도 없고, 편집도 잘해줄 거래. 오라비이!”
강진호가 강은영의 머리를 꾹 눌렀다.
“이제 하다 하다 오빠를 팔아먹네, 이게?”
“헤헤헤.”
“……그 정도는 생각 좀 해볼게.”
“와아! 역시 우리 오라비밖에 없어!”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달라붙는 강은영을 밀어냈다.
“좀 씻어라.”
“헐? 내가 더러운 거야? 오라비, 날 그런 눈으로 본 거야?”
“진심을 말해줘?”
“아냐. 그냥 거기까지. 내가 잘못했어.”
강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은영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강진호가 자신도 방으로 가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음?”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액정을 확인한 강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현주.
그녀가 갑자기 강진호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여보세요.”
[강진호 씨, 갑작스레 연락드려서 죄송해요.]“네. 무슨 일이죠?”
[죄송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일단 들어보죠.”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지만, 말을 듣는 것에 손해는 없었다. 게다가 일전에 한 번 신세를 지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 집 앞에 와 있는데, 잠시만 좀 뵐 수 있을까요?]집 앞?
강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집이라는 곳은 그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영역이다. 그런 곳 바로 앞에 무인이 설치고 있는 게 용납될 리가 없었다.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고 한 경고를 못 들은 모양이군요.”
[그런 게 아니라…….]“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죠. 지금 어디라구요?”
[집 바로 앞이에요.]“지금 나가죠.”
강진호가 전화를 끊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니?”
“앞에 친구가 왔다고 해서 잠시 다녀올게요.”
“늦지 말고 와.”
“예.”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없이 부드러웠지만, 강진호의 눈은 낮게 불타고 있었다.
분명 경고를 한 번 한 거 같은데 집까지 사람을 찾아온다는 것은 그를 무시한 처사나 다름없다.
‘날 겪고도 이런 짓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직 그를 잘 모른다면 확실하게 알게 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현관을 나서 밖으로 나가자 골목에 서 있는 이현주가 그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강진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을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온 것은 아닌 듯싶었다.
“무슨 일이죠?”
“저…….”
이현주가 강진호를 보고 덜덜 떨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강진호는 멍한 눈으로 그런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도통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뭐하는 거죠?”
“이런 부탁 드리게 돼서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찾아올 곳이 강진호 씨밖에 없었어요.”
“사설은 치우고…….”
강진호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만 말하시죠. 늦지 않게 들어가 봐야 하니까요.”
“도, 도와주세요.”
“네?”
“할아버지가 위기에 처했어요. 그런데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강진호 씨, 저희 할아버지를 도와주세요.”
강진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그쪽 할아버지가 위기에 처해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
“예, 그래요.”
“어째서?”
“네?”
강진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쪽을, 아니, 그쪽 할아버지를 도와야 할 이유가 있나요? 안면도 없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수고로움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거절당해도 억울하지는 않겠네요. 조심해서 가세요.”
강진호가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고 하자 이현주가 다급하게 팔을 붙잡았다.
“할아버지를 구해주시면 저희가 많은 것을 해드릴 수 있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무인 총회의 회장이거든요.”
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쪽에 바라는 게 없어요.”
“강진호 씨, 제발요!”
흐느끼는 이현주를 보며 강진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뭔가 전후가 있어야지, 앞뒤를 다 잘라 먹고 이리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더욱이 예전의 강진호라면 울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하셨죠.’
원장 수녀님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린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라 하셨는데, 도움을 청해온 사람을 매몰차게 내쫓는다면 수녀님이 뭐라 하실까.
‘피곤한 일이야.’
역시나 자신은 수녀님이 바라는 사람이 되기 힘들다는 걸 새삼 실감하며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일단 무슨 일인지부터 말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