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63
#262.
끼어들다 (2)
이중걸은 참담한 심정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그를 정말 괴롭히고 있는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믿어온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전면에 앉아 있는 사내가 기묘한 웃음을 흘렸다.
“저희라고 좋아서 이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 거지요.”
이중걸이 이를 꽉 깨물었다.
“신뢰를 주고 믿어준 사람을 배반하고 등에 칼을 꽂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건가?”
“아니지요. 세상의 이치는 약육강식입니다.”
이중걸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눈으로 전면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보십시오, 회주.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당신의 무능 때문입니다. 왜 그걸 이해 못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능하다고?”
사내는 비웃음을 잔뜩 머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영남회는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회주께서 우물쭈물하지 않았더라면 지난 십 년간 언제든 말입니다.”
“하나!”
사내는 회주의 대답을 들어주지 않았다.
“동족상잔이니,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하느니 같은 고리타분한 말을 지껄여 댄 대가가 이겁니다. 우리는 이제 단독으로는 영남회와 그 힘을 겨룰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회주가 총회의 수장으로 있는 동안 벌어진 일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 이놈…….”
이중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게 왜 벌어진 것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외세의 힘 때문이라 말할 생각이십니까?”
“아는구나! 알면서도 나의 무능을 논하는 것이냐?”
“회주, 왜 모르십니까?”
사내가 진정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대처하지 못한 것이 무능입니다.”
“……뭣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우두머리 된 자의 임무입니다. 다른 외세의 힘을 빌리든, 외세의 힘을 얻어 성장하기 전에 그 싹을 자르든, 그게 아니라면 회주가 말하는 온건한 방법으로라도 결과를 내놓는 것이 회주라는 자리에 있는 이가 해야 할 일이란 말입니다.”
“…….”
“하지만 회주는 참상을 피한다는 변명으로 그저 몸을 움츠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생각해 보십시오.”
사내가 선언하듯 말했다.
“불혹의 당신이었다면 어찌했겠습니까?”
이중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답이 바로 상대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이 사십의 혈기 왕성하던 시절의 그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남회의 맥을 끊어놓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 불혹까지의 당신도 필요 없습니다. 이순 때의 당신이었다 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회주는 너무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한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죠. 흐르지 않는 물에게 남는 것은 썩는 것뿐입니다.”
“……내가 썩었다는 건가?”
“그건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십시오.”
이중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상황보다 저 사내의 세 치 혀에서 나온 말 몇 마디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생을 총회에 바쳐 온 인생이다. 그런데 저자는 지금 그의 인생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었다.
“약을 써서 사람을 취하게 하고 그 뒤를 노리는 짓거리를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말하는 건가?”
순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가볍게 웃고는 이중걸을 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계집애처럼 굴지 마시지요. 목적은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하는 법입니다. 높으신 자리에 오르신 분들이 그걸 두려워하여 수단까지 정정당당해야 한다고 늘어놓을 뿐이지요. 힘을 가진 자가 정정당당히 아래와 맞서 싸우겠다는 것이 지지 않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비겁한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이중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패권을 쥔 자가 다른 자와 정당히 겨룬다면 승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당신의 패권을 정당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이중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무슨 말로도 이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중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원한다면 알려드리지요. 천태훈. 그게 제 이름입니다.”
“그리고 너는 아마 방진훈의 사람이겠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 아닙니까?”
“방진훈은 영남회에 적대적인 인물이라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왜 영남회의 지원을 받는 것이지?”
천태훈이라 불린 사내는 낄낄대며 웃었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을요. 이 모든 일은 제가 진행했습니다. 저와 방진훈 이사님과의 관계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일은 영남회가 저지른 일로 알려지게 될 것이고, 방진훈 이사님은 당신이 없어진 총회를 수습하게 될 것입니다. 저야 몇 년 몰디브라도 가 있다가 신분을 세탁하고 돌아오면 그만이지요.”
“그게 말처럼 쉬울까?”
“회주님.”
천태훈이 혀를 찼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흘러간 인물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아무리 말아먹는다고 한들 당신만큼이야 하겠습니까?”
이중걸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천태훈을 바라보았다.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는 무모하긴 해도 때때로 나이 든 이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댄다. 이자가 무모함이 진짜 무모함인지, 아니면 이미 늙어버린 이중걸의 사고가 이자를 따라가기 못하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일찍 물러났어야 하는가.’
노욕은 아니었다. 욕심을 부려 잡고 있던 자리는 아니다. 다만, 아직 확실하게 믿고 자리를 물려줄 수 있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방진훈은 유능하지만 너무 과격했다.
그에게서 혈기가 조금만 빠지면 원치 않는다 해도 회주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었건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끌었습니다. 이제 말씀하시지요. 비밀 문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
“언젠가는 찾게 됩니다. 지금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혼란에 빠진 총회의 힘만 약해질 뿐이죠. 마지막 순간이라도 항상 주장하셨던 그 총회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가시는 길 추하지 않게 말입니다.”
이미 모든 사안이 끝났다는 것을 느끼며 이중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천태훈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그가 버틴다면 총회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어차피 그의 죽음은 정해진 것.
총회가 내분을 겪게 하느니, 차라리 모든 것을 주고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문건들은…….”
막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천태훈의 고개가 획 뒤로 돌아갔다. 그의 시선은 꽉 닫혀 있는 문으로 고정되었다.
“……무슨 소리지?”
바깥에서부터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건 이상하다고 할 일이 아니었다. 소리는 언제나 들려오는 것이니까.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도 이 오래되고 낡은 건물은 비명을 질러 댈 것이다.
그러나 천태훈이 모든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이유는 그 소리가 보통의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이 아닌, 사람이 지른 소리.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극한의 공포에 질린 인간이 뿜어낼 것 같은 소리였다. 너무도 먼 곳에서 작게 들려온 소리라 확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분명 인간의 비명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누군가 회장을 도우러 온 것인가?
불가능하다.
총회의 인물들은 방진훈이 완벽하게 감시하고 있다. 만약 그들 중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면 방진훈이 막아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천태훈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
잘못 들은 것인가?
그 순간, 천태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것이 비명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도 없는, 확실한 비명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또 한 번.
너무도 선명하고 확연한 비명 소리가 점점 그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문밖은 영남회에서 지원받은 스무 명의 무인이 지키고 있다.’
총회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문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영남회에서 온 이들이 서로 상잔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명 소리는 끊겼다.
그런 비명이 들려왔으면 더 이상 비명이 없다 해도 어느 정도 소란스러움은 있어야 할 텐데, 문밖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천태훈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우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문밖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면 당장에라도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이성적인 대처는 둘째 치더라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니까.
하지만 처음 비명이 들린 그 순간부터 이 방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이상한 일이었다.
저벅.
그때, 천태훈의 귓가로 낮은 소리가 파고들었다.
발소리.
저벅, 저벅.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천태훈의 몸이 낮게 떨렸다.
이 상황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밖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무인이다.
무인의 기본은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무인에게서 발소리가 난다는 것은 스스로가 삼류라고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밖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라면 발소리가 날 리 없다.
하지만 저만한 발소리를 내는 자가 이곳을 막고 있는 이들을 뚫고 온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뭐란 말인가.
혼란스러움과 갑갑함이 그의 머리를 제멋대로 헝클어놓으려는 찰나, 문고리가 서서히 돌아갔다.
굳이 잠가두지 않은 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런 후, 천태훈은 보았다.
열린 문 뒤로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말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천태훈은 자신의 가슴을 서늘하게 물들이고 있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자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검붉은 피로 완전히 물들인 혈인(血人).
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 머리카락 끝으로 방울져 흘러내리는 핏방울, 그 핏방울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눈과 너무도 검은 눈동자.
그리고…….
붉은 얼굴 사이로 균열이라도 간 듯이 새하얗게 빛나는 이.
“여기에 있었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천태훈은 실감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막다른 곳에서 굶주린 짐승을 만나는 자가 아마도 이런 기분을 느낄 것이다.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는 절망감.
피 칠갑을 한 얼굴 사이로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 눈이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 천태훈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수많은 무인을 보았다.
그중에는 천태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도 많았다.
하지만 이자는 다르다.
단순히 무위의 강함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은 공포를 안겨주는 이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사내가 손을 들어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를 천천히 닦아냈다. 그러고는 기이한 광기에 휩싸인 듯한 미소를 채 지우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