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68
#267.
선언하다 (2)
이중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웃었을 것이다. 허세라는 건 사람의 웃음을 유발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중걸은 웃을 수 없었다.
이가 부러지도록 힘을 주고, 허벅지가 파고들도록 손에 힘을 주는 것, 등 뒤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눈가로 흘러드는 땀을 버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 귀환자라는 사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지금 강진호가 하고 있는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왕이라고?’
이중걸이 알고 있기로 마인이라는 것은 마공을 익힌 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마왕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공을 익힌 이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강한 자?
그게 아니면?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다과회를 하는 중이 아니었다. 그의 의문을 풀기에는 대답을 해주는 상대가 적절치 않았다.
“……마왕이란 말이오?”
“흐음.”
강진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마존이라 해야겠군. 당신들이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당대의 나는 마존이라 불렸다.”
‘마존이라…….’
마왕이나 천마 같은 직접적인 어감보다는 확실히 순화된 느낌이지만, 그렇다 해서 눈앞의 사내가 선사해 주는 압박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귀환자이시고, 마존이시라…….”
이중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귀환자들의 세력에 속해 있지 않은 겁니까?”
“내가 왜?”
강진호의 반문에 이중걸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질문에 저런 대답이 돌아오면 대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조금 전의 강진호에 비해 확실히 친절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를 위해 부연을 해주었으니까.
“나는 누군가에게 속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나의 밑에서 고개를 조아려야겠지.”
“…….”
광오하다.
너무도 광오해서 사기꾼의 헛소리가 아닌가 생각될 만큼 말이다.
비현실적인 느낌.
눈앞에 보이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광오한 기세와 지금도 풍겨오고 있는 피비린내는 너무도 현실적이지만, 이중걸은 어쩐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겪을 거라 생각지 않은 일을 겪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중걸이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알았는지 강진호가 다시금 물어왔다.
“어쩌겠다는 거지?”
말 그대로다.
어쩔 것인가.
이중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선택의 순간이 닥쳐오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마인을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와 그의 손녀의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 마인에게 협조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저자가 인간 백정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이미 그의 두 눈으로 확인했다.
협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이중걸이다. 그런 이중걸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마인을 지원한다?
‘있을 수 없는 일.’
이중걸이 입을 악다물고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마인에게는 협조할 수 없소.”
“할아버지!”
이현주가 기겁하여 강진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의외로 강진호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군.”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보지.”
“네?”
이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이중걸도 의문을 가득 담은 채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진호는 두말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진호가 나가 버린 문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이현주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왜 강진호가 더 이상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안 돼요, 할아버지! 저 사람 잡아야 해요.”
“현주야, 저자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구요!”
이현주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거의 비명이 되어 있었다.
“저 사람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구요! 방진훈이 있으니까!”
이중걸의 목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천태훈이 방진훈과 강진호를 연결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강진호 역시 천태훈에게 이틀 내로 방진훈을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했다.
만약 그 둘이 만나 방진훈이 강진호를 지원하겠다고 하면 총회의 지원은 당연히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방진훈을 감당하는 것이 힘든데, 방진훈이 강진호라는 검을 손에 넣는다면 더 이상 이중걸을 껄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강진호가 그들을 닦달하지 않았는지를 알아낸 이중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잡아야 한다.”
그가 돕지 않는다 해도 결국 총회는 강진호를 지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아니면 방진훈이 할 테니까. 그렇다면 이대로 강진호를 보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간 이현주는 열려 있는 현관만을 보았을 뿐, 강진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아, 안 돼.”
싸늘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이현주가 절망 어린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녀왔습니다.‘
강진호는 새벽녘이 되어야 집에 도착했다.
“오라비!”
“안 잤어?”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강은영을 보고 강진호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오라비가 집에 안 왔는데 어떻게 자!”
“시간이 몇 신데.”
“그게 오빠가 할 말이야? 내가 할 말이지! 여자 만났지?”
“…….”
“헐, 진짠가 보네?”
“아니다.”
강진호는 손을 내저었다.
“진짜 아니지?”
“내가 여자를 만나고 왔는데 그걸 너한테 숨겨야 할 이유가 있나?”
“흐응?”
강은영이 알 듯 말 듯하다는 얼굴로 강진호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대체 이게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서 하는 짓을 보고 있었더니, 강은영이 발을 빼꼼 들고는 강진호의 머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뭐하냐?”
“……미묘한데. 샴푸 냄새는 아닌데, 비누 냄새 같기도 하고. 모텔에 갔으면 샴푸 냄새가 날 텐데. 담배 냄새랑 섞여서 잘 모르겠네.”
“혼나려고.”
강진호가 눈을 부라리자 강은영이 혀를 빼꼼 내밀더니 방으로 도망쳤다.
“빨리 좀 다녀, 이 불량아야!”
냅다 소리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는 강은영을 본 강진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강은영의 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가슴을 가득 채운 살기가 조금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강진호는 옷을 벗어 개어놓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과했어.’
적루를 잡았기 때문일까?
과거 중원에서나 하던 짓을 태연하게 저질러 버렸다. 강진호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마인이라는 말을 부정조차 할 수 없군.’
강진호가 생각하는 마인과 그들이 말하는 마인은 그 의미가 다르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들이 말하는 마인의 조건에 지금의 자신이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그는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지금까지 워낙 스스로를 억제하고 살아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공을 익히는 순서가 과거와 달라서 그의 정신에 마공이 영향을 주고 있어서인지…….
“아니겠지.”
강진호는 피식 웃었다.
스스로를 속이려 들지 말자.
“원래 그랬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진호는 적천마존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교에 투신하기 이전부터 강호공적으로 몰린 그였다. 손속이 잔인하고 인정이 없다 해서 악귀라 불렸고, 천하에서 가장 악독하다고 평해지던 마인들이 가득한 마교 내에서도 적마라는 이름으로 공포의 대상이 된 그였다.
강진호는 처음부터 그랬다.
적이 있다면 베었고, 거슬리면 베었다. 상대가 옳은가, 내가 옳은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거슬리는가, 거슬리지 않는가였다.
예전 하던 짓을 그대로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강진호가 변했기 때문이리라.
자꾸 다른 이유를 대서는 안 된다.
그는 오늘 과거의 자신을 대면한 것이다. 그게 껄끄럽게 느껴진다면 이제부터라도 바꿔 나가면 된다. 자신이 한 행위에 굳이 다른 이유를 찾아가면서까지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들과 엮이기 시작하면 현대의 삶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던 황정후의 말이 절실하게 와 닿고 있었다.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긴 했지만, 그의 통찰력은 강진호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균형이라…….’
지금의 삶과 이면의 삶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라는 말도 말이다.
강진호는 눈을 감고 가만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느새 꼬이고 꼬여 버린 이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가.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고, 고민과 고민이 이어지자 결론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영남회.’
적대감이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겪은 대로라면 총회는 그에게 거슬리는 곳이 아니었다. 총회의 회주부터 총회의 찬탈을 시도하는 자까지 모두가 강진호를 적대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라면 강진호의 삶에 딱히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남회.
그들은 강진호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삶에 개입해 온다. 그것도 적의를 가지고 말이다.
강은영을 납치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그런 이유만으로 영남회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은 강진호의 삶에 개입하고 있고, 강진호의 삶을 뒤틀려 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게 있으면 치워야지.’
어둠 속에서 강진호가 새하얗게 웃었다.
그의 안에 있는 적천마존이 속삭이고 있었다.
― 언제부터 이런 사정, 저런 사정 따져 가며 일을 벌였지?
거슬리면 치운다.
그것이 적천마존의 방식이었다.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 방식이 가장 효율이 높다는 것은 강진호 스스로 이미 증명한 일이다.
영남회를 부수면 강진호의 세상은 좀 더 편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영남회를 부수면서 또 다른 일이 생긴다면, 그것조차 부숴 버리면 된다.
강진호가 눈을 떴다.
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무인이고, 여전히 마인이고, 여전히 마존이었다.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은 그의 본질은 여전히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강진호나 낮게 웃었다.
유쾌하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그를 더없이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아아, 그래.
너무 참아왔구나.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이 그를 툭툭 찔러볼 때도, 그를 아는 자들이 해하겠다고 달려들 때도, 심지어 그의 가족이 피해를 보았을 때도 강진호는 참아왔다.
참고 또 참아야 이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참을 필요는 없다.
다른 이들이 참으면 되는 것이다.
강진호라는 존재가 분명히 있음에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하고 감히 눈을 마주치려 하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참지 못하겠다면?
참게 만들어야겠지. 죽은 이는 참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비틀린 웃음소리.
너무나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비틀리고 또 비틀린 마귀의 웃음소리가.
강진호는 그 웃음이 자신의 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들으며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편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