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72
#271.
드러내다 (1)
사람들은 모른다.
야성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지.
단어를 단어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막상 그 상황에 처했을 때에야 비로소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써온 그 말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말이다.
방진훈의 기분이 그랬다.
그는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그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실감하는 중이었다.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범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그 크기에 놀라게 된다.
그저 막연하게 ‘크다’라고 생각해 온 범이 그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머리를 압도적으로 넘었을 때에야 범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범이 자신의 바로 앞에서 이를 드러냈을 때는 실감하게 된다.
힘의 격차.
어째서 과거의 사람들이 범을 ‘산신’이라 부르며 경배해 왔는지를.
지나가던 선비의 화살에 벌벌 떠는 이야기 속의 존재가 아니라 야성을 간직한 짐승으로서의 범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말이다.
장난스레 후려친 앞발에 얼굴이 날아가고, 가볍게 물어챈 이빨에 경동맥이 잘릴 때쯤에야 인간은 이해하게 된다.
범의 힘은, 그리고 그 공포는 인간의 언어로는 반의반도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방진훈이 그런 심정이었다.
강진호에 대해서는 천태훈에게 충분하다고 싶을 정도로 들었다. 넋이 나가 버린 천태훈의 반응만 보아도 상대가 얼마나 두렵고 강한 존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성을 드러낸 강진호를 본 방진훈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말이다.
“증명하라 했나?”
강진호는 웃고 있었다.
방진훈이 한 말이 너무도 우스워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의 입가에 배인 미소의 의미는 생각할 것도 없을 만큼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강진호가 몸을 슬쩍 돌려 테이블 옆으로 나갔다.
과거에는 그도 그런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끝도 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던 시절.
사부와 헤어져 홀로 되었을 때, 그는 세상이 모두 그의 적 같았다.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나자, 이제는 마교가 그를 증명하라고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강진호는 들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자 아무도 그에게 무언가를 증명하라는 사람이 없어졌다.
“내게 그런 말을 한 이들이 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방진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강진호가 말한 그런 말을 한 이들은 아마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강진호가 그 시대에는 과연 어땠을까?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방진훈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식하고 하는 행동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강진호가 그에게 다가오자마자 어느새 그가 일어나 있었다는 것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 눈앞으로 짐승이 다가온다고 느꼈을 때 취해야 할 가장 온당한 일은 무엇일까?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달아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설사 달아나지 못하더라도 앉아 있는 것에 비해서 대처가 몇 배나 쉽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처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우득.
기이한 소리였다.
보통 그런 소리가 난다면 일반적으로는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났는지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방진훈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 소리가 난 곳은 그의 귀에서 너무도 가까웠으니까.
강진호가 움켜잡은 목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내 목이 부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장에라도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강진호의 눈이 그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증명하라고?”
어떻게 증명하면 될까?
강진호가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 순간, 방진훈은 깨달았다. 이곳에서 그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잔인한지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방진훈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방진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사자에게 목을 내밀고 그 이빨로 내 목을 부러뜨려 보라고 한 꼴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반사적으로 목이 부러진다고 생각한 방진훈의 우수가 강진호의 얼굴을 향해 빛살 같은 일권을 쳐냈다.
무인으로서의 본능, 그리고 위기감이 초래한 일권.
턱.
그 선택이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는 자명했다. 강진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던 주먹이 강진호의 손에 그대로 붙들렸다.
“칭찬해 줘야 할까?”
강진호는 웃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권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네가 무인이라는 거겠지.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대처하는 무인 말이야. 나는 그런 이들을 좋아하지.”
강진호의 목소리에는 분명 호의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야.”
우드드득!
강진호의 손에 잡힌 방진훈의 오른 주먹이 그대로 으스러졌다.
방진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멀쩡한 정신인 채로 주먹의 뼈가 제멋대로 부서지고 우그러져 살을 뚫고 튀어나오는 고통은…… 수많은 고통으로 단련이 되어 있는 방진훈의 몸을 일순 간질 환자처럼 떨게 만들 정도였다.
꽉 다문 이가 서로 부딪쳐 부러질 정도다.
하지만 방진훈의 입에서는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실핏줄이 터져 나가 괴물처럼 빨갛게 변한 얼굴로 강진호를 노려볼 뿐이다.
“강단이 있군.”
강진호는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동안 그의 손에 떨어진 것들은 하나같이 대가 약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살려 달라고 빌기 일쑤였다.
물론 그런 반응을 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쉽게 얻어낸 열매는 달콤하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그뿐이야.”
뚝.
그 소리는 마치 수수깡이 부러지는 것처럼 미약하게 들렸다.
방진훈의 고개가 가만히 돌아갔다. 손목이 부러져 덜렁거리는 그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장 든든한 무기가 되어준 그의 오른손이 뭉개지고 부러져 덜렁대는 모습은 방진훈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 방진훈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아, 알겠소.”
“응?”
“당신이 얼마나 강한지, 나는 충분히 알겠소. 당신은 이미 내게 그 사실을 증명했단 말이오. 그러니 이제…….”
“그만하라고?”
강진호가 방진훈의 말을 끊으며 이죽거렸다.
“그, 그렇소.”
웃는다.
강진호가 그를 비웃고 있다. 그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방진훈은 자신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강진호의 손이 점점 더 방진훈의 목을 졸라오고 있었다. 호흡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며, 방진훈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나는 아직 다 보여주지 않았어.”
강진호의 오른손이 방진훈의 명치에 와 닿았다. 방진훈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자가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알 수 있었다.
알 수 있기에 더 두려웠다.
우득, 우드득.
방진훈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손이 인간의 육체를 파고들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말이다. 산 채로 배가 뚫리는 것이 어떤 기분이고, 또 어떤 고통인지를.
“크흐흐으으.”
무인으로서의 방진훈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자는 악마다.
천태훈이 왜 그렇게까지 무너졌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도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힘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야 방진훈은 왜 강진호에게서 이런 공포심이 느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강진호는 한계가 없는 사람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 보통은 타인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긋는다.
다짜고짜 길에서 만난 사람이 자신을 향해 칼을 쑤셔 박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마음 놓고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대할 때, ‘이자가 내게 일정 이상의 일은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강진호는 그 합의의 밖에 존재하는 자였다.
강진호는 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목을 잘라 버릴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부러뜨리고 가지고 논다. 그리고 지금은 명치를 손으로 꿰뚫고 있었다.
눈을 뜬 채 타인의 손이 자신의 내장에 닿는 느낌을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그것도 장난스레.
방진훈의 입이 헤, 벌어졌다.
지금 자신이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수십 년 동안 고련에 고련을 거듭하여 쌓아 올린 그의 무. 한반도 내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으리라 믿어온 그의 무학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는 도마 위에 올려진 고깃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섬세하게 고기를 다루는, 실력 있는 요리사가 아니었다. 제멋대로 고기를 짓무르고 뜯어 대는 초보 칼잡이였다.
“으……아아아!”
그의 배를 꿰뚫은 강진호의 손이 아래로 쭉 내리그어지는 순간, 방진훈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지르는 비명. 공포와 압박에 짓눌려서 겨우 터져 나오는 절규였다.
그 직후.
“어어?”
방진훈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보인다. 어찌 보면 섬세하여 여자의 손 같아 보이는 손.
그 손의 주인이 누군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었다.
‘강진호?’
강진호의 손이 그의 얼굴 앞에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강진호의 손은 분명 오른손이다. 강진호의 오른손은 지금쯤 그의 뱃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그 손이 피 한 점 묻지 않은 채 그의 얼굴 앞에 와 있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방진훈이 자신의 배를 더듬었다.
없다.
뻥 뚫려 있어야 할 구멍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방진훈은 자신의 오른손도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그럼 지금 자신이 겪은 것은 뭐란 말인가.
방금 전, 그가 겪은 일은 꿈 같은 게 아니었다. 부러진 손과 꿰뚫리는 배에서 느껴지던 그 고통은 너무도 생생해 지금도 욱신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해했나?”
채 모든 것을 알기도 전에 강진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방진훈이 해야 할 것은 너무도 빤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턱 대신에 고개를 격렬히 움직였다.
끄덕이고, 또 끄덕이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방진훈을 보며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준비해. 내가 다시 너를 부를 거야. 그럼 너는 총회를 접수하고 영남회와 싸운다. 내 말 이해했나?”
“……이해했소.”
자신의 목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힘이 빠지고 쉬어버린 목은 그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그래. 그럼…….”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한동안 잘 부탁하지.”
악마가 방진훈을 자신의 손에 넣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