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75
#274.
드러내다 (4)
“말씀하세요.”
조규민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지 않은 생담배를 입에 문 채 먼 차창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잔소리를 하겠다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조규민은 이미 강진호에게 있어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주에 들었으니까. 강진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뽑으라 한다면 조규민은 친구와 비슷한 범주에 들 것이다.
그러니 쓴소리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그 쓴소리의 바탕이 강진호에 대한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
“즐거우십니까?”
뜻밖의 말을 들은 강진호가 얼굴을 굳혔다.
“즐겁다라…….”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이건 즐거움의 영역이 아니라 그의 삶을 뒤틀려는 자들에 대한 응징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그 대답은 쉽게 나오지 못했다.
‘즐거운 건가?’
‘그렇지 않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강진호의 가슴을 무겁게 억눌렀다.
그래, 즐겁다.
솔직히 강진호는 그들을 상대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누르고 또 억눌러야만 했던 것들을 일시에 풀어놓는 해방감은 즐거움이란 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어쩌면요.”
“실망이네요.”
조규민은 정말 실망했다는 투로 말을 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진호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해치며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무인의 세계는 원래 그렇다는 말로 포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깥에서 본다면 강진호는 그저 사람을 죽이면서 쾌감을 얻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 사이코패스와도 다르다. 무감정한 그들과는 다르게 강진호는 말 그대로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쾌락살인마.
이 시대가 정의할 강진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멈출 생각 역시 없었다.
‘변명의 여지도 없군.’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사람은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악인이다.
강진호는 그저 악인일 뿐이었다.
조규민의 말 한마디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려는 찰나에 조규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규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강진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제가 없이 즐거우십니까?”
“네?”
지체 없이 반문이 튀어나온다.
이게 뭔 소린가?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강진호 씨와 제가 동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일을 맡아 처리해 주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 말하고 상담하고 논의할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닌 것 같은데요?”
조규민이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진호 씨가 제게 상담하는 건 반쪽짜리일 뿐이잖습니까.”
조규민의 선명한 눈빛을 보며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세계만이 강진호 씨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미 거기로 반쯤 발을 들이기도 했구요.”
“예.”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저를 쏙 빼놓고 일을 진행하시면 제가 섭섭하죠.”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조규민과 언젠가는 이 일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지금 이런 대화가 오고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세계는…….”
“저 같은 놈이 뛰어들 곳이 아니라구요?”
“…….”
재떨이에 재를 털어낸 조규민이 깊이 담배를 빨아들인다. 그러고는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회장님도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세계에서 발을 빼고 겉으로 드러나 있는 세상을 살아라. 거기는 없는 세계라고 쳐라.”
조규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남편이 새벽마다 나가서 대리운전을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척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는 부부가 과연 제대로 된 부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
“물론 강진호 씨와 제가 부부는 아니죠.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상대의 다른 면은 못 본 척하고 드러나 있는 면만 관심을 가지는 관계가 언제까지 유지가 될까요?”
조규민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로 강진호 씨를 대하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이상한 말이다.
그리고 이상하게 사람을 조금은 흔들리게 하는 말이었다.
“회장님의 말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저같이 평범한 인간이 그 세계에 발을 들였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이미 실감했고,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강진호 씨.”
“예.”
“저는 재경에 소속되어 일을 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강진호 씨의 뒤를 보는 사람입니다. 시작은 재경에서 했지만, 지금 만약 재경과 강진호 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제가 어디를 선택하겠습니까?”
확고한 그 발언에 강진호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저겠죠.”
“네, 아시네요. 강진호 씨입니다.”
조규민의 얼굴에는 울분이 차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양반이 나는 쏙 빼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고, 그 일에서 재미까지 느끼고 있다니, 제가 열 받고 짜증 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죠?”
“……미안합니다.”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이리 혼이 나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예전에 박유민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욕을 퍼먹고 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
이제는 나이도 좀 들고, 세상에 적응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혼이 난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저를 빼놓으실 거면 제대로 빼놓으세요. 저는 허수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이 가시겠다면 제 목숨까지 걸겠습니다. 하지만 어설픈 반쪽만 관리하라고 하시면…… 그건 못합니다.”
“…….”
“확답을 주십시오.”
이글거리는 조규민의 얼굴을 보니 이 사람이 그저 반 농담 삼아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기야 강진호가 조규민의 입장이라도 탐탁치는 않을 것이다.
“다만…….”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위험합니다.”
“압니다.”
“제가 하는 일이 재경에 오히려 손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려치우죠. 월급은 챙겨주십시오. 돈 많으시잖아요.”
“……연속성이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러다가도 예전처럼 아무 일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놀면서 돈 받겠네요. 고맙죠, 저야.”
강진호가 인상을 쓰며 조규민을 노려보았다.
“확고한 겁니까?”
“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한 조규민이 부연했다.
“황정후 회장님이 제게 불을 질렀습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알고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사는 게 이득이라고 하시더군요. 아뇨, 저는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내일 죽어도 진짜를 살다가 죽을 겁니다.”
“그 진짜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요?”
“왜 이러십니까, 강진호 씨.”
조규민이 피식 웃었다.
“제가 살고 싶은 세계는 위험한 세계가 아니라, 강진호 씨가 숨을 쉬고 있는 세곕니다. 나는 같은 데서 같은 공기를 맡고 싶다구요. 그게 독이라 폐가 망가진다고 해도 말이죠.”
“…….”
“저는 재경맨입니다. 그리고 재경에서 제게 내려준 명은 강진호 씨를 보필하라는 거였구요. 그게 벌써 몇 년입니까. 이제는 재경이 명을 내려서가 아니라 강진호 씨가 그걸 바라서 제가 재경을 다니고 있는 겁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조규민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사람 인생 이리 만들어놨으면 책임을 지십시오. 이제 와서 강진호 씨와 인연을 끊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마시구요. 그거 지루해서 사람 살겠습니까?”
조규민이 키득대며 웃자 강진호도 웃음을 터뜨렸다.
“후회하실 겁니다.”
“알면서도 달려드니까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도 그러네요.”
강진호는 가만히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이유도 많고 비전도 많지만, 실제로 조규민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강진호도 알고 있었다.
그저 강진호가 좋으니까.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이 세계까지 같이 들어오겠다는 것이다.
세월은 그들 사이에 우정을 만들어냈고, 그 우정은 이제 사무적인 관계를 벗어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앞으로는 숨기지 않으면 되는 거죠?”
“네. 우선은 그걸로 좋습니다.”
조규민이 씨익 웃고는 다시 핸들을 잡았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리스크는 충분히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 방금 나눈 이 대화가 조규민의 인생을 크게 바꿀지도 모른다.
지금 이대로만 살아도 조규민은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재경이라는 대기업의 비서실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재경에 다니고 있는 또래에 비해 세 배가 넘는 연봉을 받고 있고, 앞으로의 출세가도도 탄탄대로일 것이다.
이미 재경 내에서는 황정후가 조규민을 후계로 점찍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까.
조규민은 그 말을 듣고 박장대소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이 보기에는 그만큼이나 조규민이 파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만 살아도 성공한 인생은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성공한 인생 따위 뭐가 대단하다고.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성공만을 좇는 삶은 조규민의 취향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생생히 살아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조규민에게 있어서 강진호는 생동감이다.
그가 그의 삶을 흑백에서 컬러로 바꿔준다. 강진호와 함께 움직일 수 있다면 적어도 눈을 돌린 삶보다는 백배는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됐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좇아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데, 더 뭘 바라겠는가. 조규민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액셀을 꽉 밟았다.
“나중에 혹시 재경에서 쫓겨나면 받아주셔야 합니다.”
“……저는 비서 필요 없는데요.”
“아버지 가게 마당이라도 쓸게 해주세요.”
“그건 고민해 보죠.”
쓸데없는 농담을 던지는 조규민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강진호는 차창 밖으로 길게 늘어진 네온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군.’
최근 들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의 충동은 자꾸 늘어가고, 어쩌면 너무 많이 참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 회의가 씻은 듯 사라지고 있었다.
‘헛되지 않았어.’
그를 좋아해 주고, 그를 위해서 험한 길을 얼마든지 걷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얻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모두가 등을 돌려 버린 중원에서의 삶에 비하면?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지금이 더 성공한 삶이겠지.’
강진호는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비웃음이나 상대를 내리까는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지어보는 게 말이다.
“잘 부탁합니다.”
“별말씀을.”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조규민의 목소리에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만은 그의 의지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