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77
#276.
시작하다 (1)
다음 날 아침부터 강진호는 조규민의 방문을 받았다.
“지금부터 왜 강진호 씨가 그런 차를 타서는 안 되는 것인지 브리핑하겠습니다.”
“아니, 이게 뭔…….”
“들으세요!”
조규민의 눈에 불이 켜졌다.
“혹시 밤을 새신 겁니까?”
“…….”
조규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보고서와 브리핑 자료를 본 강진호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회사는 공으로 다닌 게 아닙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를 도와준 것은 야근을 하고 있던 기획부였다.
회사란 무릇 자동차를 개발해 놓으면 ‘거기에 날개 하나 달아서 하늘은 못 날게 하나?’라고 물어보는 이사진들이 빼곡히 진을 친 용담호혈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그걸 하면 안 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재경에는 설득의 프로들이 진을 치고 있고, 조규민의 넋이 나간 모습을 본 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조규민을 돕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브리핑 자료였다.
“왜! 어째서! 그 차를 사서는 안 되는 것인가!”
조규민이 준비해 온 노트북에 프로젝터를 연결하고는 가게의 벽면에 화면을 띄웠다. 그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효율성과 가성비, 그리고 수많은 이유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강진호는 바위처럼 굳건했다.
“그래서 못 구한다는 겁니까?”
모든 이유를 설명했더니, ‘그래서 못하는 건가?’라고 되물어오는 꼰대 상사처럼 강진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웬만한 직장인이면 이쯤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들겠습니다’라고 나오겠지만, 조규민은 보통 직장인이 아니었다. 그도 강진호라는 사선을 수도 없이 넘어온 백전의 노장이자 유능한 직장인이 아닌가.
예상했다는 듯이 조규민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가능합니다! 저 그런 차, 구할 수 있습니다. 못 구하면 만들어서 환경부에 심사 통과시키면 됩니다. 그 아재들 뒷돈 조금 찔러주면 없는 법도 만들어서 통과시켜 주겠죠. 그런데!”
조규민이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그 차는 우리나라에 한 대밖에 없는 차가 될 겁니다. 정말 강진호 씨가 어디를 가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는 거지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절대 싫어요.”
조규민의 논리가 강진호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조규민의 필사적인 설득으로 강진호는 차를 한 대 더 구입하기로 했다.
스포츠가 필요할 때는 스포츠카를 사고, 마트에 장 보러 갈 때는 세단을 몰면 된다는 조규민의 간곡한 설득은 결국 강진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럼 세단 구입도 맡길게요.”
“……어떤 걸 원하시는지?”
“너무 묵직하지 않으면서 아저씨스럽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으면서 운전할 때 나름 반응도 좋은, 그런 세단으로 부탁드릴게요.”
“…….”
조규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일이 늘었어.’
그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냈지만, 덕분에 강진호의 취향에 맞는 두 대의 차량을 선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조규민을 보며 주영기가 혀를 찼다.
“모진 놈 만나서 고생하시네.”
“그러게.”
박유민도 질렸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거, 예전에는 차고 자전거고 아무거나 잘 탔는데, 애가 갈수록 꼬장이 심해지네.”
“군대 갔다 와서 그리된 거 같은데, 그 안에서 뭔 일이 있었냐?”
“군대에서 무슨 일이 없었냐고 물어보는 쪽이 차라리 설명하기 쉬울 것 같은데.”
세상 모든 경우를 다 겪고 나오는 곳이 군대다. 특히나 강진호의 군 생활은 파란만장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저거, 저거, 가만 보면 조 실장님 괴롭히고 있는 거 아냐? 군대에서도 안 하던 후임 갈굼을 사회에서 할 줄이야. 역시나 독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는 놈이라니까.”
“……아니야.”
주영기의 악의적 모함에 강진호가 억울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한 번 고르면 오래 타야 하니까.”
“또 부숴 먹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주영기와 박유민의 합작에 강진호는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조차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픈 점이었다.
“오늘 요리사 온다고 하지 않았나?”
“응. 곧 나올 거야. 열 시까지 오기로 했거든.”
“음…….”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만 있는 공간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도 조금은 껄끄럽고, 그저 요리사의 개념을 넘어 메뉴를 만들다 보면 조리장의 영역까지 총괄하게 된다.
“좀 껄끄럽기는 한데…….”
“그렇다고 언제까지 우리끼리 여기 모여서 소꿉장난할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
처음에는 복학을 하기 전까지 가볍게 해보고 문을 닫을 예정이었지만, 이리저리 손을 타다 보니 나름 정이 들어서인지 가게 문을 닫는 것이 탐탁지 않아졌다.
다른 이들에게 맡길 수 있다면 가게는 이대로 유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
누구 하나가 여기에 붙어서 일을 해주지 않는 이상은 가게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강진호가 없다면 매출은 줄어들 것이고, 매니저를 둔다고 해도 꾸준히 관리를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그저 추억이 어려서 조금 더 장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일 뿐이다.
그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누군가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두드렸다.
“온 모양인데?”
주영기가 실실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주영기를 보며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거 왜 저래?”
“글쎄?”
박유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영기에게로 다가갔다.
“왜 그래?”
“아, 아니다.”
주영기가 당황한 듯 몸을 돌리더니, 박유민의 목을 팔로 휘감아 질질 끌고 갔다.
“……왜! 왜?”
강진호가 있는 곳까지 박유민을 끌고 온 주영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자라고 말 안 했냐?”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이 미친놈아! 남자만 있는 데 여자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그게 뭔 상관이야.”
주영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아…….’
생각해 보니 박유민은 어릴 적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 항상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 있는 환경에서 자란 박유민이 여자와 한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했어야 하는 건데.”
“남녀 차별인데, 그거.”
“끄응.”
주영기와 박유민이 투닥거리는 동안 새로 온 요리사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강진호가 앞으로 나가 그녀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정수연이예요.”
“네.”
강진호는 새로 온 이를 안으로 들였다.
머리에 박혀 있는 요리사의 개념은 커다란 빵모자를 쓴 남자였지만, 정수연은 늘씬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녀였다.
‘힘들 텐데.’
가녀린 손과 팔을 보니 과연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가 의심되었다. 강진호가 겪어본 주방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하루 종일 열기에 노출되어야 하고 무거운 팬을 휘둘러야 하는 일인데, 과연 저 여린 몸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어서 오세요. 저는 강진호라고 합니다.”
“아…… 저를 뽑아주신 분이?”
“저쪽이요.”
자신을 가리키는 강진호의 손에 박유민이 손을 들었다.
“박유민입니다. 일단 홀을 맡고 있어요.”
박유민이 눈짓을 주자 주영기가 헛기침을 하고는 자기를 소개했다.
“주영기입니다. 홀도 보고, 주방도 틈틈이 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원래 요리를 하시는 분이?”
“예. 접니다.”
“사장님은?”
“그놈이요.”
정수연이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너 셰프시네요.”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이 주방을 직접 보시면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많거든요.”
“아…….”
“일단 소개를 드려야 하는 게 예의인 건 알고 있지만, 그전에…….”
정수연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인상이 살짝 진지해졌다고 할까?
“주방 좀 봐도 될까요?”
‘이게 뭐야?’
정수연은 혼란에 빠졌다.
분명 이 가게는 한 달 전에 오픈한 피자집이고, 초보나 다름없는 남자 세 명이 주방을 번갈아 맡아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정도 정보만으로 주방의 상태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은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주방에 대한 전권을 준다는 말에 상태라도 보자고 온 길이었다.
전화로 들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에서는 텃세가 느껴지지 않았고, 부릴 사람을 찾는다기보다는 구세주를 찾는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주방의 전권을 잡고 원하는 대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 출근하기로 했다. 그리고 입구에서 본 주영기의 우락부락한 인상에 ‘아, 여기도 쉽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
“세상에.”
주방은 그녀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방이라는 곳이 원래 그렇다.
아무리 닦고 청소를 해도 깨끗해지기가 힘들다. 특히나 피자집처럼 기름기가 있는 치즈를 다루는 곳은 곳곳에 자꾸 기름때가 내려앉아서 독한 세제를 써서 청소를 하지 않는 이상은 청결해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 곳을 남자 셋이서 운영했다기에 개판 오 분 전인 주방을 상상하고 왔는데…….
‘진짜 파리가 미끄러지겠네.’
바닥이 눈이 부시다.
관용어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광이 나고 있었다. 대체 뭘로 닦으면 바닥이 저리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저 정도로 광을 내려면 독한 약품을 써야 하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화학약품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오기 마련인데, 지금 주방에서는 치즈 냄새 말고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싱크대를 바라본 그녀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방 용품 가게에 전시되어 있는 싱크대도 저리 깨끗하게 광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청소를 어떻게 한 거야?’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주방 안에 들어가려던 그녀의 발이 멈칫했다. ‘이대로 발을 들였다가 바닥에 발자국이라도 남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새하얀 눈이 쌓여 있는 곳을 보면 누구나 그곳에 첫발자국을 내고 싶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완벽한 풍경이 내 발자국 때문에 무너질까 봐 저어하게 되는, 그런 심정이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주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역시나 냉장고였다.
‘놀라지 말자.’
그 주방이 얼마나 깨끗하게 운영되고 있는가는 냉장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냉장고 안이 더러울 것이라는 생각은 싹 가셨다. 바닥 청소를 이렇게 해놓는 곳의 냉장고가 더러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정신병자다.
천천히 냉장고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 정수연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종류별로 차곡차곡 오와 열을 잡고 있는 재료들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그냥 줄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라 유통기한별로 진열을 해놨다.
“……주방 정리 누가 하세요?”
상황을 지켜보던 두 사람이 자기는 아니라는 듯이 깔끔하게 강진호를 가리켰다.
정수연이 강진호를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병 있으세요?”
“…….”
그렇게 악담으로부터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