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82
#281.
발휘하다 (1)
방진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무실에 구비해 놓은 전축에서 낮고 웅장한 클래식이 들려온다. 귀로 파고드는 음률을 느끼며 방진훈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잘하는 짓일까?’
인간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방진훈은 이번이 그 기회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문제가 있다면, 그 기회를 내민 이가 악마라는 것이다.
방진훈은 자신을 바라보던 강진호의 눈빛을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이 아니야.’
인간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종류의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였다.
사고방식 자체가 보통의 인간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악마와 거래를 하는 인간이 마지막에 어떤 꼴이 되는지는 너무도 빤한 일이다. 악마가 아닌, 악마 같은 인간과 거래를 한 이들이 종국에는 어떤 꼴이 되었는지 방진훈은 그동안 ‘충분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봐왔다.
그런데 악마와 직접 거래를 하는 자신은?
“후우…….”
낮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기호지세다.
이제는 돌릴 수가 없다. 머릿속으로 손실을 계산해 빠지는가, 아닌가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나 버렸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악마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강진호의 모습을 떠올리자 방진훈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대체 어디서 그런 인간이 나타난 것인가.’
알고 있다.
귀환자라는 인간들은 그렇게 뜬금없이 나타나니까. 어느 순간 사람이 달라진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듯이 보도 듣도 못한 기술을 발휘하고 능력을 보인다.
그런 이들이 귀환자였다.
당연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이들은 인간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총회의 이름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귀환자 몇몇을 제거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귀환자들은 사회를 뒤집어엎는 대신 음지로 스며드는 것을 택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귀환자에 대한 방진훈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강진호는 다르다.
그 어떤 귀환자도 이자 같지는 않았다.
‘대체 과거에 어떤 삶을 겪은 거지?’
모르긴 해도 적어도 한 나라의 왕급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그 위엄을 설명할 수가 없다.
단순히 무력이 높다고 사람을 압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그저 힘에 의한 것이라면 방진훈이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격함과 위엄.
그 두가지를 동시에 갖춘 이를 세상이 무엇이라 하더라?
‘폭군이군.’
겨우 강진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낸 방진훈이 씁쓸히 웃었다.
강진호가 폭군이라면 자신은 무엇일까?
폭군의 휘하에서 언제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신하쯤 될까?
“꼴 좋게 됐군.”
좋다, 그래도 상관없다.
모셔야 할 사람이 폭군이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역사상 명군이라 평가받는 이들은 대부분 폭군이었다. 능력이 있으면 명군이 되는 것이고, 능력이 없다면 그저 폭군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폭군을 능력 있는 명군으로 만드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혼란을 정리한다.’
조막만 한 땅덩어리에서 반목이 너무 길었다.
무인들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만도 못한 평가를 받는 것이 한반도의 무인들의 현실이었다.
그런 평가를 받는 와중에서도 서로 단합하여 실력을 늘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세력을 나누고 반목해 온 것이 벌써 반세기를 넘어간다.
이제는 이 땅의 무인들을 통합해야 할 시기가 왔다.
그리고 방진훈이 그 첨병에 설 것이다.
“필요하다면 악마의 손이라도 빌려야지.”
물론 그 손이 자신의 목줄기를 잡고 있지만 말이다.
귓가에 들려오는 웅장한 클래식을 들으며 방진훈이 눈을 감는 순간, 그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눈을 뜨고 휴대폰을 든 방진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 방진훈이 가만히 전화를 받았다.
“예. 방진훈입니다.”
“이건 뭐…….”
방진훈은 얼떨떨한 얼굴로 건물을 바라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서 있는 건물을 보고 있으려니, 지금 자신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 만나자는 것은 좋다.
만나자는데 뭔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왜 만나자는 곳이 그 천하의 재경 그룹의 비서실이란 말인가.
“……대체 뭐하는 놈이야?”
강진호에 대해서는 나름 조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천태훈이 처참하게 무너져서 돌아왔는데, 상대에 대해서 조사를 하지 않고 무작정 만남을 가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재경이라니.
대체 왜 강진호가 재경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강진호가 부유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 돈이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무인치고 가난한 사람도 없기에 딱히 그 사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재경이라니.
“아닐 거야.”
순간, 강진호가 재경 그룹의 인척이라도 되는가를 고민하던 방진훈이 고개를 저었다. 강진호의 가족 관계에 대한 조사도 이미 끝냈다.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재경과 이어질 만한 구석은 없었다.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재경의 사옥을 바라보던 방진훈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경비들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쩝.”
기분이 좋을 리 없는 일이지만, 납득해야 하는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 방진훈은 힘쓰는 깍두기 아저씨처럼 생겼으니까.
‘연예인 중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요즘 귀엽다고 인기 좋던데.’
화면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위압감의 차원이 다르니 이런 반응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게다가 시간이 자정에 가까우니 방문자가 오는 것도 이상하겠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약 소지범을 검문하는 듯한 자세로 다가오는 경비원들을 보며 방진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비서실에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순간, 경비가 눈을 빛냈다.
“방진훈 씨?”
“예.”
“실례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순식간에 경계를 풀고 안내하기 시작하는 경비들을 보며 방진훈은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이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은 방진훈의 생각 이상으로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강진호와의 협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진호의 성격으로 볼 때, 자신과 대등한 자를 인정할 리 없으니.
‘꼬붕인가.’
방진훈이 실실 웃었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이곳에도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반갑습니다. 조규민이라고 합니다.”
‘뭐지?’
자신을 마중 나온 사내를 본 방진훈이 눈을 찌푸렸다.
말쑥한 얼굴과 몸에 딱 맞는 핏의 슈트. 누가 보아도 이쪽 세계와는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다.
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무인들은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굳이 슈트를 입어야 한다 해도 헐렁한 타입의 슈트를 선호하고, 그나마 패션을 좀 안다고 자부하는 부류는 슈트 자체를 입지 않는 경향이 컸다.
‘애초에 전혀 무술을 수련한 티가 없네.’
조규민을 가만히 바라보던 방진훈이 입을 열려는 찰나, 조규민이 선수를 쳤다.
“강진호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으로 가시죠.”
“……예.”
강진호라는 이름이 나오자 방진훈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제길.’
이름만 듣고도 이 꼴이라니.
방진훈이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움켜잡아 진정시켰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다. 강진호를 보는 것이 말이다.
공포라는 것은 묘한 측면이 있었다.
막상 자신이 당할 때는 그 감흥이 크지 않으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조금씩 자신 안에서 그 크기를 키워간다. 지금 방진훈의 상황이 딱 그랬다.
다시금 강진호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몸 곳곳이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리와 손이 덜덜 떨려오고, 속이 자꾸 메슥거린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흔들리는 몸을 다잡은 방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이쪽으로.”
조규민이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방진훈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자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소파였다. 강진호는 그 소파의 한쪽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강진호 씨, 방진훈 씨를 모셔왔습니다.”
“예.”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강진호와 눈이 마주친 방진훈이 몸을 살짝 떨었다. 하지만 예상 한 것보다는 충격이 크지 않았다.
‘뭐지?’
강진호의 표정이 부드럽다. 그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그 표정과는 분명 달랐다.
‘그랬지.’
생각해 보면 강진호는 원래 저런 표정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카페에서 강진호가 보여준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그전까지의 강진호의 모습이 살짝 흐릿해졌는데, 지금의 모습을 보니 평소 강진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생각났다.
그와 동시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세상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지만, 저만한 이중인격자는 결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앉으시죠.”
“아…… 네.”
강진호가 건너편을 가리키자 방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흐음.”
강진호가 조규민을 보며 말했다.
“커피 한잔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내려 드리죠.”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만은 합니다.”
조규민이 충격을 받은 듯 몸을 휘청거렸다.
“마, 맛있지 않나요? 제가 신경 써서 내린 건데……. 강진호 씨도 학교 다닐 때는 제가 내린 커피 많이 드셨잖아요.”
“아버지가 워낙에…….”
조규민이 시무룩해졌다.
‘그거랑 비교하면 안 되지.’
원두도 직접 볶는 강진호의 아버지가 아닌가. 프로 바리스타가 직접 내린 커피를 어떻게 조규민이 내린 커피와 비교한다는 말인가.
조규민이 시무룩한 얼굴로 커피를 따라서 방진훈의 앞에 내려놓았다.
“먹을 만은 한 커피 나왔습니다.”
“…….”
방진훈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뭔가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강진호의 이미지와 조규민과 농담을 주고받는 강진호의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익숙해져야 해.’
강진호가 평소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방진훈도 이런 모습에 적응해야 한다. 그게 앞으로 강진호와 함께 행동해야 할 방진훈의 임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려놓은 커피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진훈이 물었다. 그러자 강진호가 말없이 커피를 가리켰다.
“…….”
방진훈이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나자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준비가 다 되었나를 묻기 위해 불렀습니다. 얼굴도 익힐 겸요.”
얼굴을 익힌다?
강진호와 그가 얼굴을 익혀야 할 이유는 없다. 이미 그들은 관계를 정립했으니까.
그렇다면?
방진훈이 굳은 얼굴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이 말쑥하게 생긴 자가 그의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자라는 뜻이었다.
방진훈의 시선을 받은 조규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간단한 인사가 오가자 강진호가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