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89
#288.
전투하다 (3)
“오랜만에 진호 차 타고 집에 가는 건가?”
박유민이 신난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야, 박유민. 너, 내가 태워줄 때하고는 반응이 좀 다르다?”
“네 차 엉덩이 아파.”
“이 새끼가? 우리 붕붕이가 어때서!”
“응. 붕붕이가 좋은 차인 건 알겠는데, 네가 운전을 너무 못해.”
“……하, 새끼. 너 다시는 태워주나 봐라. 먼저 간다, 인마!”
입을 쭉 내민 주영기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삐치겠다.”
“아냐. 영기 저래 보여도 마음이 넓어.”
강진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에서 워낙 험한 일을 당한 주영기이다 보니, 말은 저렇게 해도 꽤나 이해심이 넓었다.
‘유민이와 뭔가 잘 맞기도 하고.’
강진호는 주영기와 친해지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하지만 박유민은 신기하게도 주영기와 빨리 친해지지 않았던가. 과거의 친화력 없던 박유민을 떠올리면 이상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우리도 가야지.”
“그래.”
강진호가 가게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건물 지하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간 강진호가 차 문을 열었다.
“이거, 새로 뽑은 거지?”
“음.”
“저번 차는 폐차한 거야?”
“응.”
박유민이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새 차를 이런 데다 대놓네. 넌 걱정도 안 돼?”
“걱정?”
“……아니다.”
박유민은 새삼 강진호가 그와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런 차를 뽑았다면 차가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불안에 떨 것이다.
흠집이라도 나면 세상이 무너져라 통곡할 텐데, 뭔 배짱으로 이런 으슥한 곳에다 차를 대놓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하려 들지 말자.’
강진호에 대해서 이해하려 들면 머리만 아프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박유민이었다.
“안 타?”
“어…… 응!”
보조석에 탄 박유민은 오랜만에 등을 조여오는 시트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차, 잊고 있었다.’
강진호의 차에 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기억해 낸 박유민이 사색이 된 얼굴로 강진호에게 말했다.
“진호야, 너도 피곤할 텐데…… 나 그냥 택시 타고 갈까?”
“타놓고 무슨 택시야? 내가 데려다 줄게.”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도 빨리 가서 쉬어야 하는데, 내가 그냥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낫겠어.”
“괜찮아. 내가 태워줄게.”
내가 안 괜찮다고! 내가 안 괜찮다잖아, 인마!
마음속의 절규가 울려 퍼졌지만, 안타깝게도 강진호는 아직 독심술을 익히지 못한 모양이었다.
“벨트 매야지.”
“으응.”
박유민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벨트를 맸다.
‘주님.’
강진호가 사고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고는커녕 그동안 운전하면서 가벼운 상처 하나 내지 않은 강진호다. 어쩌면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도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는 고소공포증 환자처럼 박유민은 결코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면을 바라보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만 내려다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간다.”
부르르르르르릉!
엔진이 격렬한 소음을 토하는 것과 동시에 차가 앞으로 쭉쭉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익숙한 가속을 느끼면서 박유민이 몸을 떨었다.
“우웁.”
“괜찮냐?”
“……어, 괜찮아.”
“멀미가 심한가 보네?”
“……응.”
박유민은 허탈한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드려 주는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멀미?’
저 차 보조석에 타면 슈마허도 멀미를 하게 될 거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태연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목숨이 수십 번은 오고 가는 상황을 누가 버텨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 사람 보지 말라고.’
태연스레 자신을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강진호를 보자니, 자기가 유난을 떠는 것 같은 기분이다. 박유민은 한숨을 쉬고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죽겠다.”
“물 좀 줄까?”
“있어?”
강진호는 말없이 차 안에서 생수병을 꺼내 박유민에게 가볍게 던졌다. 물을 받아 들고 벌컥벌컥 마신 박유민이 물통을 내렸다.
“좀 살겠다.”
“들어가야지?”
“정신 좀 차리고. 지금 들어가면 제대로 씻지도 못할 거야.”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유민이 보육원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강진호도 말없이 박유민을 따라 벤치에 앉았다.
“근데 진호야.”
“음?”
“너 왜 드라마 안 한다고 했냐?”
강진호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미 아까 전에 대답을 했다. 그럼에도 박유민이 새삼 물어온다는 것은 아까와는 다른 대답을 원한다는 뜻이다. 적당히 얼버무린 대답이 아니라, 강진호의 진심을 듣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박유민은 강진호에게 진실을 요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까우니까.”
“아까워?”
“음…….”
강진호는 살짝 고민을 했다.
박유민은 친한 친구지만,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왔다. 때로는 어리게만 느껴지는 그의 친구에게 설명하기에는 강진호가 살아온 삶의 깊이가 남달랐다.
“고등학교 때 기억나냐?”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시기였는데.”
“당시에는 여러 일이 있었는데, 이만큼이나 지나고 나니 중요한 일 말고는 별로 기억도 안 나잖아.”
“……그야 그렇지.”
박유민은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했다.
강진호를 만나기 이전, 박유민의 학창 시절은 암흑이나 다름없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애 때문에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고, 괴롭힘의 표적이 되어야 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네.’
생각나는 것들은 다들 우울한 일들뿐이었다. 그나마 강진호를 만난 이후에야 즐거운 일들이 있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냐. 다시 말하자면 지나고 나니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지. 학교도 그렇고, 군대도 그렇고.”
“응. 그런 거 같다.”
“인생도 그렇겠지.”
“……응?”
“마지막이 되었을 때, 정말 뿌듯했다고 느끼게 될까? 보통은 조금 아쉽지 않을까? 충분한 시간이 있은 것 같은데, 그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지 못했다고 말이야.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는 게 삶이라는 건데, 왜 조금 더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소중히 보내지 못했는지 말이야.”
“음, 그럴 수도 있겠다.”
강진호가 가만히 박유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이 되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 지금 있는 시간도 어설프게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야.”
박유민이 이해가 갈 듯 말 듯하다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해하기 힘들겠지.’
아직 20대인 박유민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강진호는 이미 두 번의 삶에서 끝을 보았다.
한 번은 나름 젊을 때 끝을 보았고, 한 번은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짧든 길든 마지막에 강진호가 느낀 감정은 비슷했다.
후회, 그리고 아쉬움.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후회 없는 편안한 죽음은 적어도 강진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과도 같았다. 죽음이란 언제나 아쉽고 암담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삶을 좀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촬영이니 뭐니 하는 일들에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적어도 강진호에게 있어서 그런 시간은 무의미하니까.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삶에 좀 더 충실하고 싶다는 것이 강진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뭐가?”
“보통은 촬영을 해서 배우가 된다거나, 유명해진다거나, 그런 쪽이 좀 더 중요한 일이잖아. 친구들끼리 소꿉장난처럼 가게를 하고 그런 게 아니라 말이야.”
“글쎄.”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적어도 나는 이쪽이 좀 더 중요해.”
“너, 진짜 이상한 거 알지?”
“……이상해?”
박유민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당연히 이상하지. 보통은 톱 여배우랑 같이 영화를 찍는 시간이 시커먼 남자들 셋이서 끙끙대는 시간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그걸 반대로 생각하니 이상하지, 당연히.”
“그런가?”
박유민은 태연하게 대꾸하는 강진호를 보다가 웃고 말았다.
‘이상할 것도 없지.’
그게 강진호이니까.
“말해 뭣하겠어.”
아무리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강진호는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 생각해 보면, 강진호가 연예인이 되겠답시고 영화를 찍고 드라마를 찍으면 되레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박유민이 아는 강진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이제 정말 안 하는 거야?”
“모르지, 언젠가는 하고 싶어질지도. 그런데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변덕스럽네?”
“그럴지도.”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늦었다. 얼른 가봐. 난 이제 들어갈게.”
“들어가서 인사라도 하고 잘까?”
“애들 다 잔다. 그리고 애들 봐주시는 분들도 좀 주무셔야지. 괜히 애들 깨우지 말고, 얼른 가.”
“오랜만에 와서 그냥 가려니까 좀 찝찝해서.”
“안 그래도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하더라. 고등학생 애들은 가게라도 한 번씩 나오니까 그런 말이 없는데, 꼬맹이들이 보고 싶다고 징징댄다.”
“……시간 한 번 내야겠네.”
“다음에 또 그런 선물 사 오면 문 잠가 버릴 거다.”
“부수고 새로 달면 그만이야.”
박유민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강진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간다.”
“음.”
손을 흔들며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는 박유민을 지켜보다 천천히 몸을 돌린다.
‘중요하기 때문이라…….’
강진호는 박유민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생각이 정리된 것을 느꼈다.
마땅치 않던 이유는 따로 없다.
그저 거기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박유민이나 주영기와 잉여롭게 노는 게 강진호에게는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이 어찌 보는가가 아니지.’
강진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에 얼마나 만족할 수 있느냐다.
그리고 이제 확고부동한 방향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다. 강진호는 가만히 차에 올라타고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이제 이틀이 지났다.
그가 이중걸에게 준 시간은 이미 모두 지나 버렸다. 하지만 이현주도, 이중걸도 그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강진호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강진호는 이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겁에 질린 이들이 모든 것을 내놓고 물러나는, 그런 싱거운 상황은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에 들러야겠군.’
침대 밑에 넣어둔 녀석들을 꺼내야 할 시간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방향은 정해졌다. 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번 삶은 후회로 끝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
그의 삶에 끼어들어 삶을 뒤틀어놓으려는 방해물들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 오늘 그의 첫걸음은 그걸 위한 일이 될 것이다.
우우우웅.
울리는 전화를 받아 든 강진호가 가라앉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강진호 씨만 오시면 됩니다.]“지금 가죠.”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끊은 강진호가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커져 가는 엔진음만큼이나 커다란 달빛을 받은 강진호의 눈이 요사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