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9
#28.
계약하다 (3)
최명길이 이를 갈고 있던 그 시각, 강진호는 수업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앞이 자꾸만 흐렸다.
눈은 계속 뜨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눈앞이 흐려지고, 열심히 수업을 하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두세 개로 갈라져 보였다.
결국 강진호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뚝.
수업을 하고 있던 김성주 선생님의 손이 멈춘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팔자를 그린다.
“이놈…….”
김성주 선생님의 눈이 꾸벅대며 졸고 있는 강진호에게로 꽂혔다.
김성주 선생님이 분필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강진호의 머리를 향해 힘껏 분필을 던졌다. 내공이 실리지도 않은 분필이 가공할 살기를 머금고 강진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팟!
그런데 순간 강진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날아드는 분필을 섬전 같은 속도로 잡아버렸다.
강진호는 얼굴 바로 앞에서 잡힌 분필과 김성주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음…….”
김성주 선생님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잡아?”
강진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졸았습니다.”
“복도로 나가 서 있어!”
“예.”
강진호는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뒷문을 열고 나온 강진호가 복도에 섰다.
“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딱히 피곤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잠이 부족하고 피곤에 찌들어 사는 것이 고등학생이라고는 하지만, 하루 반 시진의 운기조식으로 모든 피로를 풀어버릴 수 있는 강진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학교만 다니니 최소한의 피곤함도 쌓일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강진호가 수업 시간에 졸아댄다는 것이 미스터리였다. 딱히 피곤한 건 아니나 수업만 시작되면 이상하게 잠이 왔다.
정신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자부하는 강진호도 버티기 힘들 만큼.
‘강제로 잠이 오게 만드는 전진파(全眞派)의 술법도 이 정도로 효과가 강하지는 않았어.’
온갖 진귀한 술법을 수도 없이 경험해 본 강진호조차도 버틸 수 없는 강력한 주문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육체는 강진호의 것이라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신은 적천마존의 것이다.
적천마존이 수업을 버티지 못해 잠이 든다?
중원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을 일이었다.
강진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뛰는 심장이 느껴진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느끼게 된다. 그는 과거를 겪었지만 그의 육체는 중원을 겪지 않았다. 정신과 육체가 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중원이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강진호는 엄청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정기신(精氣身)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무학의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자는 일류로 나아갈 수가 없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지금 강진호의 무위는 이류 무사 정도였다.
‘이류 무사라…….’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교에서 가장 말단에 있는 자도 최소 일류 무사는 되어야 무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지금 강진호는 말단 무사 수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정기신을 일치시키고 무학에 전념한다면 일 년 내로 절정 이상으로 올라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현대에서도 힘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이상의 무력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강진호는 알고 있다.
힘이 있으면 쓰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힘이란 있어도, 있어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이 세계 어디에서도 짝을 찾기 힘들 만큼의 무력을 손에 넣고 있음에도 금세 절정급의 무력을 갈구하게 되지 않았는가.
절정의 무력을 손에 넣으면 멈출 수 있을까?
그때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끝이 없는 갈구.
이 이상의 무학을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 그는 다시금 적천마존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그가 그 자신으로 남기 위해서는 무학에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제 마교의 적천마존이 아니라 일개 평범한 학생인 강진호니까.
현대에서 그가 사용할 힘은 따로 있었다.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쯤 황정후 회장이 그가 현대에서 사용할 힘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노력 중일 터였다.
강진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현대식 자재로 된 천장이 보인다.
‘지금은 조금 더 천천히 걸어야 할 때다.’
최영수의 일로 조금 뒤틀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가 꿈꾸던 삶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변수를 제거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가 바라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 벌 받는 거야?”
그때, 강진호의 상념을 깨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진호는 두 눈 가득 웃음기를 담고 말을 건네는 한세연을 보고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왜? 또 사람 때렸어?”
“아니다.”
“그럼 왜?”
강진호는 귀찮다는 듯 인상을 썼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왜 사람 붙들고 물어 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졸았다.”
“졸았다고?”
“그래.”
“야, 너 진짜 웃긴다. 너 그러다가 성적 떨어져. 저번 시험은 나보다 잘 쳤던데, 이번에는 내가 이기겠네?”
이 여자가 내 성적은 어떻게 아는 거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딱히 그 일로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강진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럴지도.”
“어? 반응이 이상하네? 너 공부에 관심 없어졌어?”
강진호는 고민을 했다.
공부에 관심이 없어졌냐고?
그러고 보면 학창 시절 그는 꽤 공부를 잘했다.
대학도 나름 명문이라는 곳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의 가족을 산산이 부숴놓은 교통사고만 아니었다면 그도 대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공부라…….’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기에 공부에 모든 것을 쏟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공부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아예 손을 떼버릴 수는 없었다.
성적이 너무 떨어진다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게 빤하고, 학교에서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런 것은 원하지 않았다.
“관심 있다.”
“그렇게 졸고, 놀 것 다 놀면서?”
“내가 노래방에서 봤던 사람은 네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나는 그 시간 외에는 공부하거든?”
강진호는 자신의 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딱히 공부란 것을 시간을 내 한 적은 없는 듯했다. 교과서를 좀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그것도 언제나 수업 시간뿐이었다. 그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공부에 조금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었다.
“이젠 할 거다.”
“그럼 지금까진 안 했다는 거야?”
“그래.”
“그러면서 나보다 성적이 잘 나왔다고?”
“그럴지도.”
한세연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너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볼 거야. 다음 주가 모의고사니까.”
“그러든지.”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김성주 선생님이 밖으로 나왔다.
“마!”
“예.”
“내가 복도에 서 있으라고 했지, 노닥거리면서 연애질을 하라 그랬냐?”
“말을 건건 제가 아닙니다.”
“대답한 건 너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당당해!”
강진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을 걸어 대답한 것인데, 그게 잘못이라는 건가?
“어휴, 됐다! 너 들어와라!”
“예.”
강진호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세연은 ‘앗 뜨거라’ 하는 얼굴로 김성주 선생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드는 김성주 선생님이었다.
“피시방 가자.”
올 것이 왔다.
정인규의 말에 강진호의 가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이날이 온 것이다!
‘기다렸다.’
그동안은 최영수와의 일을 마무리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주변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그가 겪은 치욕을 되갚을 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날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그날 이후 시간만 남으면 컴퓨터를 붙들고 게임을 했다. 잠을 자려 누우면 눈앞에 게임 화면이 어른거릴 정도였다.
“간다.”
강진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자신 있는 얼굴인데.”
“당연하다.”
“저번처럼 맥없이 하지 마라?”
“걱정 붙들어 매.”
강진호의 얼굴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게임이든 뭐든 지고는 살 수 없었다.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작한 이상 어떻게든 이겨야 했다.
패배로 결말이 나버린 시간을 버티고 참느라 그동안 얼마나 열불이 끓어올랐던가. 이제 그 모멸감을 해소하고 승리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다른 애들은?”
“태호랑 민재는 당연히 가지. 안 가면 게임이 되겠냐?”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인규는 휘파람을 불며 따라나섰다.
“자신 있는 모양이네.”
“하찮은 것들.”
“와! 이 새끼, 자신감 쩐다.”
그때, 강진호의 눈에 가방을 싸고 있는 애가 들어왔다.
박유민은 교과서를 가방에 넣고 절뚝이며 가방을 등에 멨다.
“박유민.”
“으응?”
강진호가 부르자 박유민이 살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강진호는 박유민을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너 갤럭시 할 줄 아냐?”
“갤럭시? 응, 조금.”
조금?
강진호가 가만히 박유민을 바라보다 턱짓을 했다.
“가자.”
“가자니?”
“게임하러 가자고.”
강진호에 말에 놀란 것은 되레 정인규였다.
정인규는 화들짝 놀라서 강진호에게 소리쳤다.
“쟤랑 같이 가자고?”
“안 돼?”
“아니, 안 될 건 없지만, 편이 안 맞는데?”
“한 명 더 불러.”
“누굴?”
“알아서 불러. 친구 없어?”
정인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부르라고 하면…….”
“아, 아냐, 진호야. 난 안 가도 돼.”
“싫어?”
“…….”
“싫으면 안 가도 된다. 억지로 가자고 할 생각은 없어.”
박유민는 우물쭈물했지만 딱 부러지게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진호는 박유민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가자고.”
박유민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지켜본 정인규가 울상을 지었다.
“야, 쟤랑 같이 가면 시간 오래 걸려서 자리 다 뺏긴다고.”
“내 자전거에 태워 가면 돼.”
“아니…….”
“편이나 맞춰 와.”
정인규는 혀를 찼다.
‘아, 진짜 왜 이래?’
불과 얼마 전에 거짓말로 강진호를 엿 먹인 박유민이다. 그런 놈을 굳이 불러서 같이 피시방을 가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사람이 좋은 것도 유분수지. 벨도 없나, 진짜.
싫다고 하고 싶은데, 요즘 강진호에게는 은근히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알았어.”
정인규는 입을 내밀고는 하교하는 애들을 붙잡고 물어보더니 적당해 보이는 아이를 물어 왔다.
“편 맞췄다.”
여전히 조금은 불만스러워 보이는 정인규였지만, 강진호는 그런 기색까지 읽어주기에 지금 너무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가자.”
강진호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오늘은!
땅에 떨어진 그의 명예를 회복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