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96
#295.
베어내다 (5)
악이란 무엇일까?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은 악에 대한 모호한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말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어려워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타인에게 악(惡)이라 지칭되는 이도 스스로는 자신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을 자청할 때는 스스로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위악(僞惡)에서 오는 이득을 노릴 때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만큼이나 악한 사람이니 알아서 내게 덤비지 마라’는 허세와 노림수가 사람들에게 악을 입에 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나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게 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다카히라 신고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악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 세계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라도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살인과 범죄를 옹호하려 든다.
‘무인들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다’라는 말로 말이다.
하지만 다카히라 신고는 그런 말을 혐오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살인이고, 범죄는 범죄다. 그러니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각을 해야 한다.
나는 범죄자고, 또한 살인자다.
그리고 악(惡)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나친 악으로 빠지지 않기 위한 그만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다카히라 신고는 지금 이 순간 그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기준이 명백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이는 그에게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악(惡)이라는 것이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을 오해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문이 열리고 보인 것은 두 남자였다.
정확하게는 서 있는 한 남자와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온 한 남자였다.
서 있는 남자는 그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머리채를 잡혀 끌려온 남자는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이였다.
그가 직접 가르치고 키운 부하를 모를 수는 없다. 눈이 삐지 않고서는.
하지만 다카히라 신고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광경을 확인한 순간, 바닥에 끌려오는 남자의 존재를 일순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의 명제가 충돌한다.
그의 수하들은 극한의 훈련을 받아 결코 적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택할지언정 결코 대일본제국의 사내다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
고문을 당하든, 약물에 중독이 되든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한 남자로 끝을 맞이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그가 아는 부하의 모습이 아니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흘러내린 마스크 위로 드러난 입에서도 침이 지저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흐으아…… 아아…… 흐흑, 흐으윽…….”
다카히라 신고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귓가에 들려오던 신음 같고, 울음 같은 소리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리고 그 소리가 그의 부하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그의 평정심을 모조리 깨트려 놓았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수하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이곳까지 끌고 온 사내의 얼굴을 직시하는 순간, 다카히라 신고는 깨달았다.
이곳에 악이 있다.
어쩌면 악이라는 것은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로 결정이 나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악을 품고 태어나는 이가 있어서 누가 악이 될 것인지가 미리 결정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은 마치 세상의 모든 악의를 똘똘 뭉쳐 놓은 것만 같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당장 달아나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을 주지 않는가.
‘저걸 뭐라고 하더라?’
다르다.
그가 아는 악과는 달랐다.
사악하다거나 행동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것.
‘그래.’
다카하라 신고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건 악이 아니다.
세상은 저런 것을 마(魔)라 불렀다.
선과 악은 결정으로 나뉜다. 하지만 마는 그 근원부터가 검은 것이다. 인간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악마가 선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끄으으으…….”
다카히라 신고의 상념을 깬 것은 수하의 울부짖음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은 모든 감정을 죽이기를 강요받는다. 수많은 훈련과 세뇌에 가까운 수련으로 적어도 표정에서만큼은 감정을 없앨 수 있도록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그런데 지금 수하의 얼굴에는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강진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아이러니가 다카히라 신고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두려움과 공포를 뚫고 분노가 올라온다. 하지만 이내 그의 분노는 차게 식을 수밖에 없었다.
“다카히라 신고?”
“…….”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56세. 맞나?”
그의 눈은 강진호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강진호의 손에 잡혀 있는 그의 수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했다는 건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고문과 심문, 약물과 최면을 통해서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 인자다. 그렇기에 반대로 상대에게 잡혔을 경우에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는 훈련도 받기 마련이었다.
다카히라 신고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수하들을 훈련시켰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네 부하들의 말로는 너는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라고 하더군. 그런가?”
암담하다. 아연하다.
“……어떻게?”
말을 섞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어떻게 이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나? 어떻게?”
어조는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강진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중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는 거야?”
“…….”
그에게 뭘 바라는 걸까?
“통역해.”
태연히 통역을 요구해 오는 강진호를 보고 있으려니,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이중걸이 한숨을 내쉬고는 통역을 시작했다.
“어떻게 이들의 입을 열었는가를 묻고 있소.”
“그게 무슨 말이지?”
강진호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놀리는 건가?
아니다.
강진호의 태도는 정말 알지 못하는 자의 그것이었다.
이중걸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본의 닌자들은 고통에 저항하는 훈련을 받고, 결코 자신의 정보를 발설하지 않소. 그런데 당신이 그런 훈련을 무너뜨리고 정보를 빼낸 것 같으니 놀라워서 묻는 거요.”
강진호가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것참, 이상한 일이네.
“그냥 물어보니 말을 해주던데?”
이중걸은 강진호의 말을 신고에게 전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런 말을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고 역시 강진호의 말을 어투만으로 이미 알아들은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됐나?”
“…….”
“아니, 물을 것도 없겠지. 목숨이 붙어 있는데도 적을 그냥 보내줄 놈들이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가르쳤지.”
신고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내 실수다. 인정하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하찮은 조선인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느냐고 생각한 내 잘못이다.”
“뭐라는 거야?”
강진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중걸을 바라보았다.
이중걸은 이 광경이 더없는 희극으로 느껴졌다.
비장한 어조로 말을 늘어놓는 다카히라 신고와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 짜증난 얼굴로 그를 돌아보는 강진호.
이게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폭소를 터뜨릴 만큼이나 우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중걸은 웃을 수 없었다.
이것은 희극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비극이다. 그리고 그 자신과 무관한 일도 아니었다.
“……너는 강하다. 정말 강하지. 하지만 너는 죽는다. 너는 반드시 죽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다카히라 신고가 천천히 도를 뽑아 들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일본도가 뽑혀져 나오자 강진호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와야지.”
강진호가 자신이 끌고 온 닌자를 다카히라의 발치로 집어 던졌다.
“흐어어어…….”
겨우 강진호의 손에서 빠져나온 그가 다카히라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저, 저는…….”
하지만 다카히라는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히데.”
“예? 예!”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
“원래는 너 같은 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너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히데라 불린 이가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적을 앞에 두고 격식을 차릴 상황은 아니겠지? 약식으로.”
“으…….”
강진호가 흥미롭다는 듯이 둘을 바라보았다.
말이야 알아듣지 못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특히나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이라는 것은 다들 비슷하게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뭣하고 있느냐!”
다카리라의 호통에 히데가 덜덜 떨리는 손을 자신의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작은 소도를 꺼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은 히데가 소도를 뽑아 시리게 빛나는 날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
“적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일 셈이냐?”
“으으!”
양손으로 소도를 역날로 움켜잡은 그가 머리맡까지 칼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제 그대로 내려 긋기만 하면 된다.
할복이다.
명예를 지키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하지만 그저 자살일 뿐이기도 했다.
“으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른 히데가 칼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는 강진호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강진호의 등 뒤에 있는 문일 것이다.
“멍청한!”
욕을 내뱉은 다카히라 신고가 손에 든 도를 휘둘렀다, 달아나고 있는 히데의 뒷목을 향해 정확히.
하지만 그의 도는 결코 히데의 목에 닿지 못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그의 도가 튕겨 나갔다.
“생각이 바뀌었다.”
강진호가 신고의 도를 막아선 것이다.
“병신 같은 짓을 하고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살아남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래도 가치가 있을 테니까 말이야.”
강진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신고 역시 강진호가 히데를 보호하겠다는 의미를 보인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건방진 조센징이!”
“큭큭큭.”
강진호가 웃었다.
“화를 낼 때가 아닐 텐데?”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난 둘은 필요 없거든.”
그걸로 다카히라 신고의 운명은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르르릉.
적루와 함께 청루가 천천히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