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99
#298.
탈취하다 (3)
“나이가 든다고 해서 생각이 짧아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워 회주님을 이리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나를 모욕할 셈인가?”
“회주님.”
방진훈이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회주라는 자리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제가 회주 자리에 앉는 건 그저 명목일 뿐입니다. 이제 저 사람의 명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회주님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렇지. 자네도 힘들겠어…….”
이중걸의 힘 빠진 반응을 보던 방진훈이 웃고 말았다.
“정말 정치인 다 되셨군요.”
“뭐라고?‘
“제가 알던 회주님은 이제 없는 것 같습니다.”
이중걸이 인상을 썼다.
방진훈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저자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총회를 반쯤 손에 넣어버린 저자를 보시면요.”
“…….”
“두렵습니까? 무섭습니까?”
방진훈이 욕이라도 한바탕 씹어뱉을 듯한 얼굴로 이중걸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적의는 보여도 경멸은 보이지 않던 방진훈이 진정 실망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제가 어릴 적에 보았던 회주님이라면 아마 설렌다고 했을 겁니다.”
‘설렌다고?’
이중걸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인이니까요!”
방진훈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돈 한 푼 벌겠다고 악을 써야 하는 장사꾼도 아닙니다. 우리는 무인이라는 말입니다. 무인이 언제부터 자리에 연연했습니까! 무인이 언제부터 그랬냐는 말입니다! 적어도 제가 알던 회주님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회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한국의 무인계를 발전시키려 했기 때문이었지, 권력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제가 회주님께 반기를 들 수 있던 것도 회주님께서 회주의 권한을 약하게 만들어놓은 것 때문이 아닙니까!”
방진훈의 음성은 피를 토하는 듯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저자는 충돌을 몰고 오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 앞에는 충돌이 끊이지를 않겠지요.”
“…….”
“그걸 웃으며 반길 수 있는 게 무인이라는 존재 아닙니까? 네, 저는 설렙니다. 저 인간이 저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설레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회주님은 그 알량한 회주 자리를 빼앗긴 것만으로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있네요.”
방진훈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국 무인 총회 회주라는 자리가 당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본질은 회주가 아니라 무인 이중걸 아니었습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인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그런 모습은 보이시지 말란 말입니다.”
이중걸은 말없이 가만히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고문 자리를 비워두겠습니다. 상임 이사도 좋겠지요. 자리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에게는 아직 회주님이 필요합니다. 회주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대한민국의 무인계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요.”
방진훈이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말없이 방진훈이 나간 곳을 바라보던 이중걸이 허탈하게 운을 뗐다.
“무인이라…….”
그래, 나는 무인이었지.
그걸 잊은 게 언제였더라?
“할아버지.”
방진훈이 나간 곳으로 이현주가 굳은 얼굴을 한 채 들어왔다.
“……현주야.”
“다 끝났어요, 할아버지.”
“그래, 끝났구나.”
이중걸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끝은 아니지.”
“할아버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인석아, 할아비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다. 여기서 불복한다는 것은 그냥 칼 맞아 죽겠다는 뜻이란 걸 모르지 않아.”
껄껄 웃으며 말을 하는 이중걸이었다.
이현주는 이중걸의 모습이 조금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한 것이 아니라 예전 자상하던 이중걸의 모습이 다시 돌아온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
“그래.”
“고생하셨어요.”
“으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할아버지가 총회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해오셨는지 말이에요.”
“그래, 그랬지.”
조금은 씁쓸한 목소리.
“하지만 내가 틀렸다.”
“네?”
“다들 인정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할아버지.”
“내가 틀렸던 것이지. 총회를 위해 일을 한 것은 무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기 때문인데, 어느 순간 그런 것은 잊고 총회 자체가 내 목적이 되어버렸구나.”
“…….”
방진훈의 말이 귀에 자꾸 걸렸다.
무인 이중걸은 어디로 갔냐고.
‘나는 무인이었는데 말이야.’
언제부터 권력과 소유에 그리 목을 맸다는 말인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여전히 순수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자신을 선명히 비춰주는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안에 보이는 것은 무인이 아니라 권력에 찌들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늙은이뿐이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로 말이다. 순수하던 그때로.
이 나이에 그런 것을 바라는 건 과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 너무 상심마세요. 저 사람들도 이제는 알아야 할 거예요. 총회를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말이에요.”
“그래, 힘들겠지.”
이중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도와야지.”
“네?”
“강진호는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이지. 그런 이를 방진훈 혼자서 보필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경험이 부족한데다 그 사람 자체도 성격이 불같아서 되레 자신이 강진호 이상으로 날뛸 위험도 있지.”
“그래서 그들을 도우시겠다구요?”
“왜? 안 되느냐?”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중걸의 표정 때문인지, 이현주는 말문이 막혀왔다.
‘안 되냐구요?’
그들은 적이다.
지금 이중걸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가 있는가.
“할아버지…….”
이중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현명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몰랐구나.”
“네?”
“어깨와 등에 짐을 잔뜩 지고 있으면 고개를 들 수 없는 법이지. 그래서는 하늘을 볼 수 없다.”
“…….”
“시야가 좁아져 있던 게지. 이제 다 내려놓는다고 생각하니까 보이는구나.”
“그게 할아버지의 선택이시라면 저는 받아들일게요. 다만…….”
이현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도 돕겠어요.”
“현주야.”
“저도 한 사람의 무인이고, 이중걸의 손녀예요. 말리지 마세요.”
이중걸이 씁쓸하게 웃었다.
‘쉽지 않은 길인 것을.’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저 강진호라는 자는 필연적으로 피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자다. 당장 지금만 해도 대한민국 무인계에서 가장 큰 단체인 총회와 영남회를 적대하고, 이제는 일본과도 충돌했다.
판이 점점 커지는 만큼 충돌의 규모도 커질 것이다. 강진호가 지금처럼 계속 행동하게 된다면, 이제껏 없던 혼란이 찾아올 확률이 높았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뭔가 흥분되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무인혼이라는 녀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닌 듯싶었다.
“두고 보자꾸나.”
이중걸이 작게 중얼거렸다.
“뭘 얼마나 바꿔 나갈지 말이다.”
강진호는 가만히 걸어나왔다.
그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 주변은 이중걸이 이미 사람을 통제해 두었기에 딱히 그를 막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훔친다.
손끝에서 자욱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익숙한가?’
아니면 낯선가?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한바탕 설치고 나니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찝찝함이 못내 가시지 않기도 했다.
복잡하다.
지금의 기분과 상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리 말해야 할 것이다. 복잡하다고.
강진호는 이제 단순해질 수 없었다. 예전처럼 적이면 죽인다는 단순한 마인드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예전에는 아무리 상황이 잘못되더라도 잃을 것이라고는 그의 목숨 하나뿐이었지만, 이젠 지켜야 할 것도 늘어났고, 해야 할 일도 늘어난 상황이다.
이제 그의 죽음은 단순히 그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슬퍼할 사람도 있고, 그의 죽음으로 인생이 뒤틀릴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 하나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
부담스럽기도 하고, 뭔가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중적이라는 것.
지금의 강진호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일 것이다.
강진호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털어낸다. 생각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생각을 조금은 접어놓고 싶었다.
이럴 때는…….
빵빵!
옆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에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방진훈과 그의 수하들이 대놓은 차 옆에 익숙한 세단이 헤드라이트를 켜더니 그 쪽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손님!”
창을 연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서울 가시죠?”
강진호는 희게 웃었다.
“얼마죠?”
“너무 늦어서 좀 더 주셔야겠는데요?”
“뭘 더 드리면 됩니까?”
“맥주 정도면 좋을 것 같은데?”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콜!”
보조석으로 향하는 강진호를 보며 조규민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취하고 싶은 밤이다.
“그럼 총회 쪽의 정리는 끝난 겁니까?”
가벼운 안주를 사이에 두고 강진호와 조규민이 마주 앉았다. 적당한 술집을 찾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편의점에 가 과자와 맥주를 사 들고 강변에 앉았다.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강진호가 맥주를 따더니 깔끔하게 한 캔을 비워 버렸다.
‘맥주 광고 찍어도 되겠네.’
목젖이 움직이는 모습이 CF의 한 장면 같았다. 뭘 한들 폼이 나지 않겠냐만 말이다.
“이제는 영남회와 결전을 치를 일만 남았군요.”
“그게…….”
강진호의 설명을 들은 조규민이 눈을 부라렸다.
“일본요?”
“예.”
“아니, 일본이라니. 일본…….”
조규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인간은 왜 항상 뭐 하나를 해결하러 가서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온다는 말인가.
영남회를 손쉽게 처리하기 위해서 총회를 컨트롤하려는 건데, 그 와중에 일본과 충돌을 일으키면 문제가 더 커진 것 아닌가.
“그럼 이제는 일본까지 상대를 해야 하는 겁니까?”
“……그쪽에서 덤벼들면 그렇게 됐겠죠.”
“몇 명이나 온 겁니까?”
“한 서른쯤.”
“그중에 살아 돌아간 이는 몇 입니까?”
“……돌아간 이는 없어요.”
살아 있는 이는 한 명 있지만 말이다.
강진호의 어색한 목소리를 들은 조규민의 눈이 떨렸다.
아니, 이 인간은 인간 백정도 아니고, 뭔 사람을 이리 죽여 대는 건가.
저쪽 세계가 원래 그런 건가?
아니, 저쪽 세계가 아니지. 나도 이제 이쪽에 속한 사람이니까.
“일본이 어찌 나올지는 방진훈 씨와 상의를 해봐야겠네요.”
“예.”
“끄응…….”
일거리가 늘어난다는 생각에 조규민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뭐, 그래도…….”
재미있으니까, 그걸로 됐지.
조규민이 맥주 한 캔을 따서 깔끔하게 원샷했다.
“크으!”
불안이고 계획 같은 것은 내일로 미뤄두자.
지금은 그저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면 되는 것이다.
봉투에서 새 캔을 꺼낸 조규민이 강진호에게 건넸다.
그렇게 한동안 어둠이 내려앉은 강변에 맥주 캔 따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