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00
#299.
탈취하다 (4)
총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른 아침부터 회주인 이중걸이 중역들을 모으더니,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본인은 이사로 내려가고 현재 이사 중에서 방진훈을 회주의 자리에 올릴 것이라는 발표가 났다.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방진훈과 이중걸이 앙숙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총회의 윗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방진훈에게 회주 자리를 넘긴다니.
이건 이중걸이 방진훈에게 백기 투항을 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면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세력으로는 아무래도 회주가 방진훈 이사에 비해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뜬금없는 백기 투항이라니.
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총회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방진훈에게 줄을 대려는 이들이 방진훈의 집무실을 기웃댔고, 회주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 회주가 있을지 모르는 회주의 집무실을 기웃댔다.
하지만 정작 화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그런 이들의 반응을 나 몰라라 하고 따로 총회를 빠져나와 있었다.
찰칵!
방진훈이 이중걸이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이중걸이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으며 이죽거렸다.
“무인이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담배는 잘도 피우는군.”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쯧쯧.”
이중걸이 혀를 찼다.
“한창때인 사람이 그렇게 담배를 피워 대면 체력이 떨어지기 마련이야. 큰일 할 사람이면 미리미리 몸 관리를 해야지. 지금은 몰라도 십 년 뒤에는 차이가 확 난다.”
“회주님도 피우시잖습니까.”
“나야 갈 날 며칠 남았다고 그거 건강해 보겠다고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이러다 가면 그만이지. 그리고 이제는 회주도 아닐세.”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글쎄? 그게…….”
이중걸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도 좀 그렇고, 삼촌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한동안은 회주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일단 이사라고 부르게.”
“어찌 그게…… 입에 잘 붙지를 않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호칭 하나로도 관계를 파악하는 법일세. 존중은 좋지만,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방진훈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결국 회를 떠나지 않고 그를 도와주기로 한 선배이자 스승에 대한 예우였다.
“난리가 난 모양이더군.”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방진훈과 이중걸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이 이런 식으로 뒤에서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한다는 것을 짐작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 한 끗을 결단하느냐, 결단하지 못하느냐가 위에 서는 사람과 그저 지켜보는 사람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진훈과 이중걸은 누가 승리하든 총회의 회주라는 자리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었다.
“쉽지 않을 걸세.”
“알고 있습니다.”
“총회의 회주라는 자리는 참 골치 아픈 자리이지. 자존심 빼면 남는 것도 없는 이들을 이끌고 가야 하는 자리다 보니 무슨 일을 하려고만 하면 반대하지. 반대하고 또 반대하고.”
“……죄송합니다.”
“자네만 그런 건 아니야. 다들 그렇지.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이중걸이 고소하다는 듯이 낄낄댔다.
“이제는 그걸 자네가 감당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하군. 그동안 사실 너무 힘들었거든.”
“그리 힘드셨으면 빨리 좀 넘기시지.”
“……그러게나 말일세. 내가 왜 이리 잡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결국에는 이리될 것을 말일세.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제 놓은 지가 겨우 하루도 안 됐는데 마음이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양도하고 이쁜 할멈이나 꼬실 것을.”
“저는 이제 하루 됐는데 벌써 속이 더부룩합니다.”
“벌써?”
“아까 회의실에서 나오는데, 그동안 호의적이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불만투성이인 얼굴로 노려보더군요. 갑자기 그렇게 태도를 바꿀 줄은 몰랐습니다.”
“위에 선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그들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할 걸세. 동급이었다고 생각하던 이가 나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야.”
이중걸은 진심으로 방진훈을 걱정했다.
어제까지 서로 목숨을 노리던 사이를 걱정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방진훈이 처한 상황은 녹록하지가 않았다.
‘보통 일이 아니지.’
내부적으로는 아직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이중걸 휘하의 세력과 그에게 반발심을 가진 이들을 다독여 흡수해야 하고, 외부적으로는 영남회와의 충돌을 정리해야 한다.
또한 분명 시비를 걸어올 일본의 도발에 대처해야 한다.
‘거기에 영남회는 중국과도 얽혀 있지.’
까딱했다가는 영남회를 일통한다 하더라도 한국이 중일의 격전장이 될 수도 있었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 나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미안하네.”
“예?”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인데, 내가 일을 늘려 버렸구만. 나도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방진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대로라면 회주님이 손을 뻗지 않았어도 무슨 구실을 대서든 한국에 영향력을 끼치려 했을 겁니다. 이미 관련 정보를 몇 개 들은 것이 있습니다.”
“으음…….”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으로 삶을 지킬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자네 말이 맞는 것 같으이.”
이중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가 변하고 있지. 그래.”
그리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 다름 아닌 강진호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서는 한국의 무인계를 뒤집어엎어 버린 사나이.
그런 이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한국의 무인계도 더 이상은 지금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위기이지.”
“또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방진훈이 씨익 웃었다.
“사실 저는 회주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강진호를 눈앞에서 보면 불만 같은 것은 다 사라질 테니까요.”
“그를 전면에 내세울 셈인가?”
“안 됩니까?”
“그는 마인이네.”
“네. 그리고 이제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시대이지요.”
“마인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건가?”
“회주님.”
방진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살의에 빠지지 않은 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이는 마인이 아닙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어떤 무공을 익혔는가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는가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으음…….”
“그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창고에 밀어 넣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중걸과는 다른 생각이다.
하지만…….
‘인정해야겠지.’
이제는 방진훈이 이중걸의 의견을 따를 게 아니라, 이중걸이 방진훈의 의견에 맞추어 위험성을 줄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지.”
“예, 회주님.”
방진훈이 담배를 깊게 빨았다.
“회주님도 느끼고 있지 않으십니까?”
“뭘 말인가?”
“그는 인화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
“좋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그저 그 등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지요.”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말을 하는군. 그 나이 먹고 말이야.”
“낄낄낄.”
웃음을 터뜨린 방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나이가 먹으면 소년처럼 불같은 사랑을 할 수는 없어지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가지는 동경이라는 건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말은 잘하는군.”
둘러대고는 있지만, 이중걸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강진호를 만난 이후로 정치가였던 이중걸이 무인혼을 다시 되살리고 있으니까.
“힘든 길이 될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믿고 따라갈 등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만약 그도 진즉 그런 등을 볼 수 있었다면 이리 이상한 길로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중걸을 씁쓸함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그자, 아니, 그분은 지금 뭘 하고 계시지?”
“아마 어제의 격전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힘든 일이었으니까.”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야 하니 걱정이 많으실 겁니다.”
“음…….”
이중걸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최근 들어 이만큼이나 고민을 한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세상은 때로 그에게 수많은 난제를 던지지만, 다들 나름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마련이었다.
길은 언제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강진호가 가진 문제는 길이 없는 게 아니라 길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어렵군.”
주영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려워?”
박유민도 영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냥 아무거나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아.”
“……남자답게 결정해.”
“으음.”
고민에 빠진 강진호를 보며 주영기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인마! 메뉴 하나 추가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냐? 언제까지 불고기랑 콤비네이션만으로 먹고살려고 했어!”
“페페로니도 있어.”
“으으음.”
강진호는 생사의 대적을 만난 표정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네 번째 피자를 추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견받는다.”
결국 결정하지 못한 강진호가 도움을 구했다.
“그거 해, 그거. 핫 치킨인가? 요즘 피자집 보면 매운 피자 많이 하던데?”
“사도다.”
“사도는 얼어 죽을!”
“그럼 하와이안 피자는 어때?”
“하와이안?‘
박유민의 말에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와이안 피자라니, 그가 먹어본 적 없는 종류의 피자였다.
“응. 쉽게 말하자면 파인애플 피잔데…….”
강진호의 눈이 떨렸다.
“피자에 과일을 넣는다고?”
“응. 많이 파는데?”
“……과일? 과일이라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피자가 무엇인가.
도우 위에 양념을 바르고 치즈를 올려 먹는 빵이다. 그런데 그 빵에 과일을 넣는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과일이라니, 그럼 딸기 피자도 있나?”
“……들어본 적은 없는데, 맛있을 것 같은데?”
“너는 의견 내지 마라.”
강진호가 대놓고 무시하기 시작하자 박유민이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인마. 그건 좀 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피자에 과일을 올려? 파인애플을 누가 구워 먹냐? 무슨 원시인도 아니고.”
눈 세 개인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평범한 사람이 가면 눈이 두 개라고 병신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박유민은 지금 그 사실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말을 말아야지.’
이런 놈들이 피자집을 한다니.
“뭘 그렇게 고민해요?”
“피자 새 메뉴 추가하라면서요?”
정수연이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 그거 때문에 이리 열을 올리고 있는 거예요?”
“아니, 얘가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요!”
“니가 이상한 거거든! 파인애플 피자 있거든?”
“얘가 약을 먹었나? 헛소리를 하네.”
정수연은 투닥대는 세 사람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애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