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03
#302.
함께하다 (2)
“좋아.”
강진호는 차고에 세워져 있는 차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규민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슈퍼카는 강진호 씨의 취향에 맞을지는 몰라도 어머니의 취향에는 절대 맞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닥치고 뒷자리가 넓고 안락하며, ‘우리 아들이 이만큼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차가 좋은 겁니다. 강진호 씨의 취향 따위는 일단 접어두세요. 이건 강진호 씨를 위한 차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차를 운전할 때만큼은 강진호 씨는 그냥 운전기사인 겁니다.”
조규민에게는 배울 점이 많았다. 강진호는 전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듣고 보면 조규민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았다.
그리고 ‘이게 과연 옳은가’ 생각되는 일도 일단 조규민의 말을 따라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렇기에 강진호는 눈앞에 보이는 우악스러운 차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베…… 어쩌고 하는 것 같았는데? 베…… 베토벤?
강진호는 운전석으로 들어서기 전에 조규민의 신신당부를 다시 떠올렸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어머니를 태운 상황에서는 절대로 규정 속도를 넘지 마세요. 될 수 있으면 추월도 하지 마세요!”
‘어째서?’라고 반문하는 강진호를 바라보던 조규민의 눈빛은 이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냥 제 말을 들으시면 됩니다. 이건 강진호 씨에게 있어서만큼은 이해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절대 급가속하지 마세요. 굼벵이가 지렁이가 되고, 지렁이가 거북이가 된다는 느낌으로 속도를 높이세요. 혼자 슈퍼카 탈 때는 강진호 씨 마음대로 운전하시고, 제발 가족분들을 태운 상황에서만큼은 제 말대로 하시죠.”
“으음…….”
강진호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백화점을 갔을 때는 어머니가 강은영의 차를 타고 가서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함께 이동을 하는 것이니 조규민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강진호가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었다. 그의 차와는 다르게 조용조용하기만 했다. 시동을 걸자마자 ‘내가 여기 있다!’를 외치며 길길이 날뛰는 차에만 익숙하다가 시동이 걸렸는지 걸리지 않았는지를 굳이 증명하지 않는 차를 만나니 좀 어색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것만 어색한 건 아니었다.
넓고 편안하지만, 왠지 이유 모를 중압감이 느껴지는 운전석도 처음 겪어보는 느낌이다.
“재미있네.”
‘다른 느낌의 차를 탄다는 것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운전 연습을 할 때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애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가.
묵직하게 움직이는 차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생소하기도 하지만, 색다름을 주고 있었다.
“아직도 차 안 대놨어?”
“…….”
저것만 없다면 좀 더 색다르고 편안할 텐데 말이지.
현관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강은영이 땍땍대고 있었다. 강진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늘 하루 저 녀석과 다니려고 하니, 벌써부터 어깨가 결려오는 느낌이었다.
“이 차는 대체 언제 가져다 둔 거니?”
‘가져다 놓은 지는 며칠 됐답니다.’
저도 몰랐지만요, 어머니.
“이번에 몰고 왔어요.”
“너 차 있잖아. 차 모으니? 별스런 취미를 다 가지는구나. 누가 보면 네가 엄청 부자인 줄 알겠다.”
‘부잔데요.’
강진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의 통장에는 현금이 억억대도록 쌓여 있었다. 이미 예전에 통장을 확인하고 심장이 반쯤 나왔다 들어간 강진호가 황정후에게 이제 돈 좀 그만 넣으라고 사정사정을 했지만, 황정후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계속 돈을 밀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은혜는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갚아야 하는 거지, 은인이 그만 갚으란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나 뭐라나.
여하튼 덕분에 단순 현금 보유량만을 따지면 대한민국에 강진호 이상의 돈을 가진 이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을 포함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너, 자꾸 이런 거 하면 안 되는 거야.”
“제가 산 거 아니에요. 회장님이 어머니 타기 편하라고 주신 거예요.”
“회장님이?”
황정후 회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걸로 은혜는 충분히 갚으신 것 같습니다, 회장님.’
돈이고 뭐고 당장의 위기에서 벗어날 피난처가 되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황정후는 그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은혜를 당장에라도 갚은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회장님이 주셨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런데 이런 거 받아도 되는 거니? 아무리 그래도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잖니. 대체 누가 차를 선물로 받아?”
“에이, 엄마.”
강은영이 어머니의 옆자리로 밀고 들어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기업 회장님 스케일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 솔직히 회장님급인데 차 선물이 별거겠어? 원래 그런 사람들은 이런 거 선물로 주고받는 거야.”
“그, 그러니?”
‘아닐 텐데…….’
강진호는 슬며시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다.
황정후는 검소하다.
매우 검소하다. 십오 년 전에 산 차를 아직 타고 다닐 정도로…… 좋은 말로는 검소하고, 나쁜 말로는 궁상맞은 자린고비다.
다른 대기업 회장들이 어떤 식으로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황정후는 차를 선물한다든가 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일단 출발할게요.”
“응.”
“가까운 데로 가면 되죠?”
순간, 어머니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들.”
“……네?”
“오늘은 엄마를 위해서 가주는 거지?”
“물론입니다, 어머니.”
“그럼 엄마 오늘 드라이브도 좀 하고 싶은데, 꼭 가까운 데로 가야 하는 거니?”
강진호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강은영도 맞장구를 쳤다.
“강 기사! 강 기사! 큰 데로 가자! 큰 데로!”
“옛 썰.”
강진호가 조심스레 액셀을 밟았다.
‘굼벵이에서 지렁이로, 다시 지렁이에서 달팽이로.’
조규민의 충고대로 아주 느리게. 강진호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굼벵이에서 마지막에는 조금 빠른 굼벵이 수준으로 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결코 규정 속도를 어기지 않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오? 오빠, 운전 잘하네?”
“……응?”
“유민이 오빠가 오빠 차는 절대 타지 말라고 했는데…… 이상하네?”
“하하, 장난이겠지.”
강진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호라, 박유민.’
잘도 내 정보를 팔아 제끼고 있었군. 그것도 강은영에게 말이야. 다음에 보면 철저한 응징을 해줘야겠군.
“그래. 차가 좋아서 그런지, 우리 진호가 운전을 잘하는구나. 원래 운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천천히 하는 거야.”
“네, 어머니. 항상 안전운전하고 있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혀를 꺼내 입술을 축였다. 일단 침은 발랐다.
“그러니 너도 그 시뻘건 건 좀 놔두고 이런 차 좀 타고 다니면 안 되겠니? 내가 그 빨간 차 볼 때마다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엄마, 그거 좋은 차야.”
“차만 좋으면 뭐하니. 시끄럽고 요란하고…… 생긴 건 무슨 우주선처럼 생겨서는…… 그런 차 타는 것도 어릴 때나 타는 거지.”
“……엄마, 오빠 어려.”
“아참, 그렇지.”
백현정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본인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한 번씩 나이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워낙 나이에 안 맞게 구니까.
“여하튼 엄마는 이 차가 좋아. 엄마와 다닐 때는 이 차 몰아줘.”
“넵, 그러겠습니다.”
강진호가 즉각 대답을 하자 백현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엄마가 아들 덕분에 이런 차도 다 타 보고 호강하네. 이거 비싼 거지?”
강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이거 장난 아냐. 엄청 비싸.”
“잘 못 보던 차 같은데…….”
“흔하지는 않지.”
백현정이 뚱한 시선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진호야.”
“네, 어머니.”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걸 먹는다고 해서 네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는 걸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것은 회장님이 너를 예뻐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걸 다 돌려 드렸으면 좋겠다. 남자는 자기 힘으로 서야지. 자기가 이루지 못한 걸 누리는 사람은 결국에는 홀로 서지 못하는 법이란다.”
“명심할게요.”
“그래. 엄마가 이런 날 잔소리해서 미안해.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는 것만 알아주렴.”
백현정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걱정 마세요.”
강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겉으로만 보면 강진호는 여전히 학생이고, 크게 하는 일 없이 이번에 가게를 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 애가 비싸기 짝이 없는 차를 타고 다니니, 괜히 허파에 헛바람이 들어갈까 봐 걱정이 될 것이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입장에서야 충분이 우려될 만한 일이었다.
‘그런 것보다…….’
강진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규정 속도라는 것이 이리 느린 거였나?’
차가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느낌이다. 살짝만 밟아도 앞으로 우르릉대며 나가려고 하는 차를 억지로 짓누르고 달래가며 타는 느낌이었다.
옆으로 쌩쌩 지나가는 차들 사이에서 혼자 규정 속도를 준수하려고 하니, 죽을 맛이 따로 없었다.
“엄마, 엄마. 오늘 뭐 볼 거야?”
“엄마가 뭐 딱히 보러 갈 게 있어서 가니? 그냥 너희랑 같이 돌아다니는 게 좋아서 가는 거지. 아들딸 키워놨더니 지들 일하기 바빠서 엄마는 신경도 안 써주잖아. 내가 내 밥그릇 못 챙기면 평생 이렇게 덩그러니 살겠지.”
“에이…… 헤헤, 백 여사님을 누가 그리 방치하겠어요.”
강은영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강진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강 기사! 목적지는 아직 멀었는가?”
‘저 썩을.’
남은 천천히 간다고 속이 뒤집어질 지경인데 말하는 거 봐라, 저거.
순간, 울컥한 강진호이지만, 룸미러로 보이는 백현정의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 그를 진정시켜 주었다.
“곧 도착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사모님.”
“음, 기사가 교육을 잘 받았군.”
“너 말고.”
나중에 따로 한 번 다시 정신교육에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강진호였다. 그렇게 투닥투닥하는 와중에 저 멀리 백화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 찾아왔어!’
강진호는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네비도 제대로 안 되는 차로 단번에 백화점을 찾아오다니, 이 아니 훌륭한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소리치려던 강진호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를 꽉 깨물었다.
“뭐야? 큰 데 가라니까, 여기 왜 왔어? 차 돌려. 우리는 남으로 간다!”
“남?”
“북괴군 같은 오라비야, 강남으로 가라고 강남으로! 어휴, 진짜! 차 돌려봐. 길 이야기해 줄 테니까.”
“……네.”
오늘만은 강은영의 포스에 완전히 짓눌린 강진호였다.
강진호가 고분고분 말을 듣자 강은영이 킥킥 웃더니, 귓속말로 백현정에게 속삭였다.
“엄마, 나중에 커버 쳐줘야 돼. 엄마가 나 안 지켜주면 나 오라비한테 맞아 죽어.”
“걱정 마.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게.”
“진짜지?”
‘다 들린다.’
강진호가 한숨을 쉬며 굼벵이처럼 액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