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304
#303.
함께하다 (3)
“차 들어옵니다.”
백화점 주차 경력 2년차인 유일한은 능숙한 손동작으로 차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어?”
하지만 그의 손동작을 무시하고 차가 옆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씨, 이래서 영감님들은.’
차종으로 보나, 운전하는 포스로 보나 나이 지긋하신 분이 쇼핑 삼아 놀러 온 것이 분명했다. 길에서 만났다면 클랙슨을 한 번 울려주는 패기를 발휘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일하는 중이고, 아마도 저 차에 타고 있는 나이 지긋한 분은 백화점의 VIP 고객일 것이다.
차가 아래로 내려가 버리기 전에 서둘러 유일한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앞을 슬그머니 가로막고 차가 멈춰 서자 운전석 쪽으로 종종 걸음으로 뛰어간다.
“고객님 발렛 주차장은 이쪽입니다.”
차창이 내려가고 그 안에서 젊은 청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네?”
‘기산가?’
운전하시는 분이 나이가 있으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기사에게도 느긋한 운전을 강요하는 사람이 뒤에 타고 있는 모양이다.
“발렛 주차장은 이쪽입니다.”
“발렛이요?”
“……VIP 주차장이 이쪽입니다.”
고개를 내민 청년.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VIP요? 그런 거 아닌데요?”
“네?”
유일한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벤틀린데, 왜 VIP가 아냐?’
너는 VIP여야지, 왜 니 마음대로 VIP가 아니냐고!
“파킹권을 두고 오신 건가요?”
“그게 뭐예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진호를 보며 유일한은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로또 맞은 놈인가?’
아마 지난주에 로또를 맞고 이번 주에 차를 뽑아서 바로 이곳에 온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번쩍번쩍한 자태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으니, 잘 알아듣게 한 번 설명을 좀 해봐라’라는 저 태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아, VIP!”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재경 백화점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럼 맞을 거예요. 이리로 들어가면 되나요?”
“예, 고객님. 이쪽으로 차를 대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예.”
강진호가 차를 몰아 발렛 주차장 앞에 차를 댔다.
하지만 주차장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등록되지 않은 차량이라는데요, 고객님?”
“네?”
이번에는 강진호가 혼란에 빠졌다.
“그럼 VIP라는 게 대체 뭐지?”
‘이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돈 좀 있다고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니고, 주차 요원 한다고 사람이 쉽게 보이나?
유일한이 막 한소리를 내뱉으려는 순간, 강진호가 전화를 꺼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데요, 재경 백화점에 쇼핑하러 왔는데, VIP가 아니니 차량을 등록…… 네? 바꾸라구요? 예, 잠시만요.”
강진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폰을 내밀었다.
“받아보세요.”
“……예?”
유일한이 강진호와 폰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만히 휴대폰을 받아 들어 귀에 댔다.
“전화받았습니다.”
[재경 그룹 비서실입니다. 이쪽에서 미리 준비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이니, 일단 통과시키세요. 점장 통해서 지시 내려갈 겁니다.]“예? 다짜고짜 그러시면…….”
유일한이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쪽은 규정이 있다. 게다가 이 전화가 재경 그룹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어떻게 믿는다는 말인가.
저놈이 탄 차가 벤틀리만 아니었어도 장난하지 말라고 하면서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을 것이다.
[바로 해결해 드릴 테니, 일단은 차 통과시키세요. 바로 해결이 안 되면 그때 가서 다시 조치를 취해도 되는 것 아니겠어요?]“그, 그건 그렇죠.”
[전화 끊고 3분만 기다리세요. 차 주차해 드리구요.]“일단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강진호에게 폰을 건넨 유일한이 스위치를 눌러 문을 열었다.
“이 안쪽에 차를 대시면 됩니다.”
“……여기에요?”
유일한은 그제야 이해를 했다.
‘이 양반, 발렛이 뭔지 모르는구나.’
“제가 대신 주차를 해드립니다.”
“제 차를 왜?”
정말 순수한 의문이 담긴 눈이었다. 그 눈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기는 하지만, 나쁜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고객님의 편의를 위해서입니다. 나가실 때는 미리 전화 주시거나 앞쪽에 이야기하면 차를 대기시켜 드립니다.”
“아니, 그럴 필요…….”
“야!”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키는 대로 해! 시키는 대로! 발렛도 몰라? 원시인이야? 내가 쪽팔려서 얼굴을 못 들겠어!”
“넌 왜 그리 흥분하니!”
“그냥 시키는 대로 좀 하자고! 지금 엄마가 기다리잖아.”
어머니가 기다린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강진호가 시동을 끄고 키를 뽑더니 문을 열고 신속 정확하게 차에서 내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새끼, 뭐지? 진짜?’
키를 건네는 강진호를 보며 유일한이 떨떠름하게 받아 들었다.
분명 놀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골탕 먹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이쪽으로 가면 백화점으로 바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일한은 프로가 아닌가. 표정을 숨기고 부드러운 미소로 안내를 하는 유일한이었다.
“네. 그럼.”
강진호 일행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유일한이 인상을 확 썼다.
“내가 더러워서 성공해야지.”
그리고 그때, 그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 헐.”
점장이라는 이름이 찍힌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유일한의 등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웬일이지? 그것도 개인 폰으로.’
원래라면 일개 주차 요원인 그와 점장이 휴대폰 번호를 교환할 일이 없겠지만, 그는 발렛 파킹을 하는 VIP 전용 주차 요원이 아닌가.
백화점에 VIP도 아닌, VVIP들이 내방했을 경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받은 전화번호다. 큰 사고를 치지 않고서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 일은 있어도 저쪽이서 이쪽으로 전화가 걸려올 일은 없는 법인데…….
유일한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유일한입니다, 점장님.”
[방금 들어오신 손님 어디 갔어요?]“네? 방금요?
[베, 벤틀리. 벤틀리 타고 들어오신 손님 어디로 갔냐고!]“매장 안으로 들어가셨는데요?”
[유일한 씨, 잘 들어요.]“네, 점장님.”
[그 벤틀리에 기스 나는 순간, 내 인생도 기스 나는 거야.]“…….”
[그럼 유일한 씨도 기스 나겠지?]“……예.”
[우리 서로 인생 기스 나기 싫으면 잘하자고. 잘해야 할 거 아냐.]“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따 가실 때도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은 VIP가 아니라 오너급이라고 생각하고 응대하세요.]“오, 오너급이요?”
[그렇다니꺼요!]“명심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아마도 종료 버튼도 누르지 않고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인지, 폰 건너편으로 시끄러운 목소리가 마구 들려왔다.
당장 쇼핑 도우미를 준비하라느니, 명품 매장에 전화 다 때리라느니, ‘청소는 똑바로 했느냐’부터 해서 온갖 소리가 다 들려왔다.
가만히 전화를 끊은 유일한의 눈에 검은색의 웅장한 세단이 들어왔다.
“기스 나면 내 인생도 기스 나는 거야.”
“하, 씨.”
오늘따라 주차가 잘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신 사납게.”
강진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채 매장에 제대로 들어가 보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는 쇼핑을 도와드리겠답시고 그들의 뒤에 서려고 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려니, 점장이라는 작자가 대통령이라도 본 얼굴로 후다닥 뛰어와 명함을 내밀고는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제야 조규민에게 연락을 한 것이 실수라는 걸 깨달은 강진호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점장의 입장에서는 비서실에서 직접 ‘당장 그 차를 VIP로 등록하고 편의를 봐드려라’라는 말을 들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으리라.
‘백화점 개점 이래 초유의 사태란 말이다.’
원리 원칙이라는 것에 가장 목을 매는 곳이 바로 재경이었다. 기껏 백화점에 돈 가져다 바쳤더니 VIP를 VIP로 안 봐준다고 악명이 높은 곳이 아닌가.
일전에 발생한, 백화점에서 손님이 주차 요원을 무릎 꿇린 사건이 재경 백화점에서 벌어졌으면, 그 손님은 집이 아니라 경찰서로 끌려갔을 거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돌 정도로 ‘손님은 왕인데, 점원도 왕이거든요?’를 실천하는 기업이 재경이었다.
그런 재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런데 이런 미친 경우가 벌어졌으니, 목에 칼이 들어온 심정일 수밖에.
백현정의 얼굴이 부담으로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본 강진호가 필요 없다고 그들을 물리려고 했지만, 곧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뭔가 필사적인 표정을 본 강진호는 가장 앞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점장을 불러 ‘지금 나하고 대화할래, 아니면 내가 지금 재경에다가 전화를 넣을까’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를 물려냈다.
하지만 점장은 물러가면서도 미련이 남았는지 끝끝내 강진호에게 한 가지를 주고 갔다.
“이게 어디다 쓰는 거지?”
검은색으로 빛나는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본 강진호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은영이 눈을 빛내며 카드를 낚아챘다.
“이거, VIP카드잖아.”
“그게 뭔데?”
“백화점에서 매출을 많이 올려준 VIP들에게 주는 카드야. 헐, 이거…… 인피니티네? 최고 등급인데?”
“그래?”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거야?”
“당연히 좋은 거지! 이거 가진 사람이 대한민국에 천 명도 안 될걸? 대한민국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카드라고.”
“겨우?”
“그렇다니까. 이거 가지려면 백화점에서 일 년에 억은 써야 돼. 그래야 겨우 넣어줘.”
“억이라…….”
강진호가 인상을 썼다.
“백화점에서 일 년에 억을 쓰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너무 과소비 아냐?”
“니 차를 생각해라, 이 미친…….”
“응?”
“오라버니 차 한 대만 팔아도 사 년 치 쇼핑 금액이 나오는 것으로 소녀는 생각합니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그래, 그럼 뭐가 좋은 건데?”
“일단 주차를 공짜로 하잖아. 발렛도 해주고.”
“그리고?”
“VIP 라운지도 쓸 수 있다니까! 이거면 쇼핑하다 돈 안 들이고 쉴 수도 있어.”
“1억 써서 받는 혜택이 고작 그거냐?”
“……할인도 해주는 걸로 아는데.”
“별…….”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할인이고 뭐고, 1억을 안 썼으면 더 이득이지. 이걸 받아서 대체 어디다 쓴단 말인가.
영 뚱한 강진호의 표정을 캐치한 강은영이 눈을 빛냈다.
“오라비 필요 없으면 이거 나 해도 돼?”
“너 해.”
“와앙! 오라비! 진짜 고맙다! 이건 정말 고마운 거야.”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강은영이 좋아하니 그걸로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강은영은 축배를 너무 일찍 터뜨렸다. 사람이라는 것은 기뻐하기 이전에 모든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는 법이다. 강은영은 그걸 몰랐다.
“은영아.”
“……응?”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내놔.”
“…….”
“어서.”
“…….”
먹이사슬은 돌고 도는 것이다.